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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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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지난 200년 동안 서구의 개신교 교회들의 건축양식에는 외형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회중석과 분리된 챈슬(chancel)이 강조된 건축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스테이지 형식의 건축 양식입니다. 챈슬(chancel)은 예배당 앞 중앙이나 가까이에 성단소라고 불리는 장소로 성직자나 성가대나 예배를 인도하거나 순서를 맡은 이들이 앉는 자리로서 대게는 동쪽에 위치합니다. 챈슬이 강조되는 교회당 건축 양식은 주로 십자가형 대형 본당 건축 양식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서 챈슬이 높은 곳에 있으며, 대개 아치형 또는 복도와 연결되는 성당이나 교회당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임을 강조합니다. 십자형 건축 양식은 서양 교회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 중 하나이며, 교회당의 형태가 십자가 모양을 이룹니다. 이 양식에서는 챈슬이 크로스 중앙에 위치하며, 이를 둘러싼 네 개의 팔각형 상황실(Transept)과 함께 전체적인 구성을 이룹니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서는 대개 챈슬이 본당 중앙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으며, 이를 감싸는 둥근 장식벽으로 챈슬을 강조합니다. 챈슬이 강조되는 교회당 건축 양식은 로마식 건축 양식이나 고딕 건축 양식으로부터 온 것임과 동시에 그것을 구약 성전의 구조와 융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건축 양식은 교회 내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귀족 계급이 교회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교회 당 안에서 이들의 자리는 챈슬이거나 챈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유럽에서는 챈슬 주변에 귀족들을 위한 좌석이 마련 되었고 이를 통해 교회 안에서 귀족 계급의 특권이 강조되었습니다. 현대 교회 건축에서도 챈슬을 강조한 경우가 많지만, 옛날처럼 귀족들을 위한 자리로 챈슬이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건축 양식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배와 성도의 교제까지 보이지 않는 계급의식에 젖어 들게 합니다. 계급의식은 그 자체로 나쁘지만, 더 나쁜 점은 장소나 지위나 형식 자체의 권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진실된 삶과 경건의 능력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뿐만이 아니라 챈슬 방식은 무의식 가운데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하는 가로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리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물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으로 작용하여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도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설교자는 회중이 무조건 성직자를 존경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외적 권위에 편승하여 영적으로 게으르고 권위적으로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결과 현대 교회는 실제로 경건의 능력과 맛과 빛을 잃고 맛을 내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하나의 교회 건축 양식은 공연을 위한 스테이지 형식입니다. 이 형식은 19세기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19세기 부흥 운동은 챈슬 형 건축의 권위를 거부하고 좀 더 회중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여 공연에 적합한 스테이지 형식의 건축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챈슬 형 건축의 교회가 권위에 편승 하였다면 스테이지 형 건축의 교회에서는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챈슬 형식의 건축이 건축 구조를 통해 구별과 계급과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처럼 스테이지 형식의 건축 역시 단순히 물리적으로 회중과 가까워지는 것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인위적입니다. 스테이지 형 건축 교회당에서는 예배도 콘서트 방식을 취하여 설교자와 성가대가 앞에서 인도하는 극적인 예배를 강조합니다. 건물 구조가 그러한 콘서트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고 무대 배치나 예배를 돕는 이들이나 사운드 시스템이나 조명 등은 가능한 회중의 감정에 최대한 자극을 주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큰 교회들이 대형 고화질 스크린을 이용하여 회중을 압도하며 예배의 본질에서 빗나간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재정이 넉넉한 교회는 회중이 엄청난 규모의 프로젝트나 고가의 음향 시스템 같은 설비의 고급문화를 즐기게 하고 그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는 빗나간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성가대나 찬양 인도자나 모든 예배 보조 팀은 회중을 감화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드라마나 유명 성악가의 독창이나 감동적인 짧은 간증 같은 것은 회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적합하게 순서와 설교 사이에 배치됩니다. 최근의 경향은 챈슬 형식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회와 스테이지 형식의 공연식 예배를 선호하는 교회가 별다른 구별 없이 강력하고 인위적 카리스마로 회중을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대개 복음의 메시지를 복 받고 잘 사는 방법론으로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 받는 비결이나 방법, 성공하는 방법이나 비결 등 ㅇㅇ 방법이나 ㅇㅇ 비결 같은 설교 제목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 대부분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회중이 생각할 때 이러한 교회에는 권위도 계급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한 교회 안에도 권위와 계급이 존재합니다. 특히 권위를 거부하여 회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공연식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에도 감성에 호소하는 공연식 예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감동을 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지나치게 구별합니다. 그러한 교회에서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들이 강조하는 체험과 은사를 모르는 자들을 무시하고 어린아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계급의식을 갖는 태도나 계급의식을 갖게 하는 건축이나 시스템이나 제도나 형식은 지양되고 개혁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찬 테이블을 지나치게 장식하는 것이나 성찬 테이블 위에 촛불을 켜 두는 것 같은 것은 모두 인위적이고 이교적인 것들입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목사와 성가대가 줄을 지어 입장하는 것도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것입니다. 권위적인 건축 설계나 영적 의미를 부여한 거룩한 장식품 같은 것에서는 참된 권위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권위에 의존하는 예배는 결국 무미건조하게 되고 회중은 수동적으로 길들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 건축 형식과 예배 형태는 회중을 관람자와 구경꾼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능력도 나타내지 못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경건의 능력을 잃고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신화와 이교와 세속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건물 구조나 예배 형식이나 챈슬 스타일이나 스테이지 스타일이 이교적이고 세속적이라는 지적에 대하여 사람들은 내심 반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건물의 설계가 이교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을 잘 활용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것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당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예배당이 없어야 된다는 것인가? 교회 건물이 이교사상과 세속 관습에 기초해서 지어진 것이라 해도 그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것이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인간의 능력과 약점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간은 문화를 만들지만 인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불완전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리스도에게 속했지만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적 위치가 설정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적인 위치는 그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고 또 어떤 형태로건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교회 모임 장소를 편의와 안락과 인터테인먼트에 적합한가 아닌가로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본연의 실체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교회 건물과 예배 형식은 우리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외형이나 내용이나 그것들은 교회가 무엇이며 그 기능이 어떤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형식은 기능을 따라간다"는 건축 표어가 있습니다. 건물의 형식은 그 건물의 독특한 기능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교회 모임 장소의 사회적 환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의 위치와 장소는 어떻게 모여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위치와 장소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모임 장소는 회중 상호 간에 무슨 말이 허용되고 무슨 말이 허용되지 않는가를 가르쳐줍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교훈들을 교회 건물이든 개인 집이든 상관없이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교훈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 건물이든지 그곳에 들어가는 이들은 그 건물과 구조를 보고 무언의 암시와 가르침을 받습니다. 교회당에 들어가 앉는 즉시 무엇이 더 높고 무엇이 낮은지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모두 앞을 향해 앉아 있어서 서로를 바라보고 보살피고 배려하고 교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건물 구조와 예배 형식을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였을 때와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유기적인 가족이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현대 교회당에서 예배하는 형태로 앉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적 위치는 교회 생활에서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잘못된 건축과 형식과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회의 사회적 위치는 순진한 회중에게 몹시 나쁜 교훈과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영적 삶을 질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가정집이거나 교회 건물이거나 예배가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예배가 일상의 삶과는 구별되어야 경건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치 기독교의 특징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예배가 삶의 전체구조와 분리되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룹으로 모아 포장한 것처럼 이해합니다. 이런 것은 지난 수 세기 동안의 고딕 건축 양식의 교회당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영향을 미친 그릇된 형태의 예배입니다. 거대한 대성당 안에 들어가서 공간의 위력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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