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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keism, 가치 질서에 대한 분별력을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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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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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미국의 대기업들이 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Wokeism을 수용하였습니다. 대기업들이 이러한 스텐스를 취하게 된 것은 이념적으로 Wokeism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Wokeism은 그 용어 자체가 지닌 의미처럼 깨어 있는 시민의식이 아니라 극단적인 신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었습니다. 기업이란 본래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는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으로 왜곡된 Wokeism을 수용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기업들이 Wokeism을 이용하는 진보 정치에 편승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IMF 사태 이후 방만한 기업 운영으로 도산하게 된 대기업들이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생존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기업이 경영을 잘못하여 망하게 되어도 정치적으로 유리한 스텐스를 취하거나 또한 그 기업이 망하면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줄 만큼 규모가 큰 기업은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도와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IMF 이후 미국을 비롯한 미국과 같은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기업들과 언론과 심지어 대학들까지 Wokeism에 편승하지 않고는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분위기로 변하였습니다. Wokeism이 일반 대중에게 확산하게 된 것은 기업들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은 기업들이 Wokeism에 편승하여 진보 정부의 비위를 맞추며 일정 수의 유색인종과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기업들이 진보 정부의 환경론에도 협력하였기 때문에 Wokeism이 쉽게 대중에게 확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업들의 태도가 단기적으로 기업들과 사회에 이익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에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극단적으로 Wokeism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려 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신마르크스주의와 Wokeism이 교묘하게 연대하여 벌이고 있는 일들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Wokeism이 서구 사회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왜곡된 배경은 신마르크스주의가 치밀한 계획과 학문적 이론으로 인프라를 구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도한 세력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와 헝가리의 문예 사상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인 게오르그 루카치와 그리고 신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 집단인 프랑크푸르트학파입니다.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제는 파시즘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었습니다. 파시즘에 대한 그들의 대체적인 태도는 반동적 부르주아 운동의 또 다른 운동에 불과하다고 보며 파시즘 운동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라는 면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람시는 파시즘을 자유주의적 학자들처럼 단순히 서구 문명의 일탈로 보지 않았고 독점 자본주의의 극단적 지배 형태로 보지도 않았으며 사회주의운동을 지지해야 할 소시민과 노동자 계급 조차도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점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람시의 중요한 이론적 관심사는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과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람시나 루카치에게는 물적 토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에 더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그들은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 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람시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지향했는데, 이를테면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가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그때 그때 인간 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보지 않고 기본적 지향은 사회주의 스텐스를 견지하면서 그것의 필연적 승리가 보장된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양쪽 모두를 비판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로 변화되긴 하나 필연적으로는 붕괴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루카치, 그람시, 프랑크푸르트학파들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기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왜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설명하였습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학자는 1781년 파리 시민들이 세운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 정부 파리 코뮌(Paris Commune)을 전후한 혁명적 노동운동을 보면서 그러한 것을 자본주의의 몰락의 징조로 보았으며,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보면서 자본주의 몰락의 징조를 발견하였음에 반해 그람시는 1871년 이후 혼란 속에서 자본주의가 벗어나 안정화되고 확산되어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 특히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중요성에 주목하였습니다.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안정화되어가는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같은 면에서 그림시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 실패를 극복하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관념보다는 물질,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나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즉 상부구조는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고 하여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의 주요개념은, 정치와 헤게모니, 역사적 지배블록, 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 진지전과 기동전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치 또는 지배에는 두 가지 측면 즉 강제의 측면과 동의의 측면이 존재하는데, 어떤 사실과 어떤 지배도 100% 강제와 100% 동의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는 강제 기구로서 자본가 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한 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면 그람시는 국가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다고 간파하여 국가가 지닌 기능의 복합성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훨씬 더 확장, 발전,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가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적 자본주의로 발전해가면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다고 보았습니다. 경찰국가가 아니라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호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하였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국가는 경쟁적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로 시장질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면서 기본적 질서만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지만 그람시의 국가관은 경제사회 영역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며 더 나아가 복지 국가로까지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기능과 역할로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전망하였습니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시민사회를 통해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국가는 공적 영역의 대표이며 시민사회는 사적인 영역의 대표인데,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질서가 국가를 매개로 공식화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시민사회가 국가영역을 지배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기능이 점차 확대되면서 시민사회는 국가의 사적 네트워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민사회를 통해 국가는 모든 의식과 조직에 침투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며, 그런 속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강제 측면을 담당하는 부분은 정치사회이고, 동의를 창출하는 부분은 시민사회로서 그람시의 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입니다. 전통적 서구의 사회과학 속에는 국가(공적 영역)와 사회(사적 영역)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 집단,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바로 이런 시민사회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동의를 창출하면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축하는 통합국가입니다. 통합국가는 시민사회까지 포괄하면서 독재(강제)와 헤게모니(동의)를 구축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이론에서 한 걸음 발전하였습니다. 그의 헤게모니는 계급적 동맹의 원칙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지배질서를 의미합니다. 즉 이데올로기 매개로 기본적 집단과 추종집단이 융합되는 것으로 정치적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적, 도덕적 영역까지 통합을 이루어내고 추종집단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까지 창출해내는 것이 헤게모니입니다. 즉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정치적 강제와 지적 도덕적 동의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본집단의 근본적 이익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종 세력과 동맹세력의 이익을 수용, 융합해 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헤게모니 지배가 구축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치적 수준에서 출발, 도덕적, 지적 수준에까지 통합, 공통의 집단의지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역사적 지배블록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하나는 변형주의(Transformism)로 수동적 동의이며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파악 하였습니다. 기본집단들이 동맹집단에 의해 산출되는 능동적요소, 심지어는 적대적 집단한테서 나오는 요소까지를 점진적으로 흡수, 그들의 반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다음은 확장적 헤게모니로서 진정으로 다양한 계급 융합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마침내 민족적, 민중적 의지로까지 확장되어가는 헤게모니입니다. 기본계급이 헤게모니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추종계급에 대한 확실한 리더쉽을 확립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도적 집단이 임무를 수행하며 지도적 집단을 매개로 헤게모니질서가 확립된다고 합니다. 서구 사회의 핵심에는 국가가 있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어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 러시아에서와 같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으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러시아 볼세비키의 기동적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 이론입니다. 그람시는 서구 부르주아 지배질서가 얼마나 강고하며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장고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진지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는 이들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보았습니다. 대중운동으로서 노동계급보다는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을 상당히 강조했습니다. 레닌이나 루카치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보다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그람시에 와서는 지식인의 혁명적 역할이 한 층 더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를 정복하려는 그람시의 이같은 헤게모니 이론과 진지전에 혁명적 지식인의 전사로 투입된 이들이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찌 독일서 도망쳐 미국서 자리 잡은 유태인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일군의 동종 교배 집단입니다. 하버마스,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칼 그룬버그, 레오 루벤탈 등입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독을 먹고 배양되는 문화 마르크시즘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Wokeism으로 상징되는 문화 마르크시즘은 오랜 진지전을 통해 정치와 대학과 기업과 언론과 문화 예술과 경제와 교육과 환경 문제와 인종 문제까지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폭넓은 저변 확대를 이룬 Wokeism은 일반인들의 인식을 마비시키며 무소불위의 지배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다양성에 대한 광신적 태도, 다문화주의에 대한 병적 집착, 이방인에 대한 무한 환대, 소수자 권리 보호에 대한 병적 집착, 전통적 가족 관계 파괴, 남녀 구별 철폐, 성의 해방, 비판적 인종이론, 극단적 환경 종말론 등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국가와 인간 사회를 허락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wokeism이라는 탈을 쓴 무신론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0-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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