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7-우생학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후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전에 올려진 오피니언 글은 지난 오피니언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

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7-우생학

페이지 정보

황상하2021-10-03

본문

황상하흔히 결혼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합니다. 인륜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뜻이고, 지(之)는 '의'라는 뜻의 조사이고, 대사란 큰일이라는 뜻입니다. 큰일이란 물리적 규모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혼인을 통하여 집안이 흥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서 인륜지대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자녀가 좋은 가문의 자녀와 혼인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좋은 가문을 세우려면 좋은 자손이 태어나야 하고, 좋은 자손이 태어나려면 좋은 유전자를 지닌 배우자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유전은 과학적으로 상당할 정도로 증명된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이나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입니다. 현대 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족의 병력인 것도 유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는 속담도 유전을 믿는 데서 비롯된 속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혼사를 할 때는 매우 다각도로 상대방과 그 집안을 검색하였습니다. 개인과 가문이 혼인을 통하여 부와 명예를 쌓으려는 욕망을 성취하려 했다면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머리 좋고 외모가 잘 생긴 젊은이들을 결혼시켜 우수한 후손을 많이 배출하여 낳아 사회와 국가의 위상을 높이려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우수한 종족을 얻기 위해 국가가 인간의 종족번식을 감시하고 통제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적령기에 도달한 청춘 남녀들의 여러 가지 자질을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가진 남녀들이 서로 결혼하도록 의도적으로 제어하여 국가의 인구를 조절한다는 내용입니다. 플라톤은 만성적 허약과 방종에 의해 질병에 걸린 인간들은 의학적 치료의 대상이 아니며, 도덕적 타락은 추방이나 처형의 이유가 되고, 우수한 자손의 번식을 통한 도시 국가의 이상 실현을 위해 우수한 계급의 현명한 결혼을 주장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가장 훌륭한 남자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훌륭한 여자와 동침시켜야" 하며,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양육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내다 버려야 하며, 고칠 수 없는 정신병에 걸린 자와 천성적으로 부패한 자는 죽여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역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이상적 공동체를 설계해야 하며, 하층 계급의 다산으로 인한 과잉 인구는 빈곤이나 범죄, 혁명의 중심지로 자라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하층계급의 출산율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문명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로마, 아테네 그리고 스파르타 문명에서는 우수 종족 보전을 위하여 태어날 때부터 약하거나 기형인 영아의 살해를 허용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플라톤을 찬양했던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캄파넬라도 그가 쓴 《태양의 도시》에서 "우월한 젊은이만이 자손을 남길 수 있도록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우생학(優生學)이라는 학문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83년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과 인자 등을 통계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생학 연구를 위하여 영국에서 좋은 유전자형질(Greater social and genetic worth)을 가진 인간과 나쁜 유전자형질(Less social and genetic worth)을 가진 인간을 분류하였습니다.

골턴의 우생학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인기를 끌어 영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 캐나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까지 많은 나라에 전파되었으며, 우생학을 지지한 유명인 중에는 루즈벨트(Teddy Roosevelt), 웰스(Herbert George Wells), 쇼(George Bernard Shaw), 처칠(Winston Churchill), 벨(Alexander Graham Bell), 크릭(Francis Crick), 폴링(Linus Pauling),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윌슨(Woodrow Wilson), 쇼클리(William Shockley) 그리고 히틀러(Adolf Hitler)등이 있습니다.

우생학(Eugenics)은 그리스어로 좋은, 우월한(good, well)의 뜻을 가진 “eu” 와 태생, 자손(offspring)의 의미를 지닌 “genos”의 합성어입니다.

전통적 우생학이나 의도적인 선택적 육종은 수천 년 동안 농작물과 가축의 유전적 특성을 개량하기 위해 수행되었었고 그 연구 범위는 생물학, 해부학, 유전학, 역사학, 사회학, 고고학, 족보학, 심리학, 통계학, 정치학 등으로 매우 광범위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생학이 20세기 초에 사회 운동으로서 큰 인기를 얻게 되며 세계 곳곳에서 정부, 기관 및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 채택되어 추진되고 실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우생학에 대한 골턴의 생각이 19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전통을 가진 우생학적 담론이 골턴의 정교한 유전적, 통계적 방법에 따라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는 광범위한 가계 조사 자료를 통계적으로 정리하여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환경의 영향과 관계없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골턴은 자기 생각을 그의 사촌인 다윈의 진화 이론과 결합해 유전자에 의해 형질이 결정된 개개인들 사이의 경쟁과 선택을 통해 인간의 진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선택은 자연선택도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인위적인 선택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위적 선택은 지적,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도록 장려되는 것과 열등한 사람은 되도록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골턴은 1865년, 《유전적 재능과 특질》이란 논문에서 처음으로 우생학적 전망을 개진하면서 인간은 스스로의 진화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생학이 형성되던 당시에는 인위선택을 통해 육종가들이 동식물에서 원하는 형질을 선택적으로 강화하는 연구가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골턴은 이를 사회로 확장하여, 인간도 인위적으로 개선될 수 있으며, 이는 문명화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인간종에 해가 되는 계층은 축소하고, 이로운 계층은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다윈의 주장처럼 단순한 생식이론이나 유전 원리 같은 지식만으로는 어려우므로 적극적인 정책적 수단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원에 있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조사보다 진화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생존에 유리한 개인들과 불리한 개인들의 비율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의 열등한 유전 형질이 확산하는 것은 인종을 퇴화시키는 사회적 공포이므로 제거해야 하며, 고차원적 수준의 능력을 소유한 전문직 계층의 출산율 저하 경향을 적극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다윈의《종의 기원》을 읽은 뒤, 인간 개선을 목적으로 우량종 육성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1883년에 선택적인 출산을 의미하는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하여 이를 "인종을 개선하는 과학"이라 정의했던 것입니다. 골턴의 주된 관심은 현명한 결혼을 통해 인류의 유전적 개선을 도모함으로써 사회적 진보와 문명화를 달성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후 골턴은 "미래 세대 인종의 질을 개선 또는 저해하는, 사회적으로 통제 가능한 수단에 관한 연구"인 우생학의 다양한 가설과 이론, 그리고 방법론을 활용해 과학적 근거가 있는 학문으로 정착시키려 했습니다. 이처럼 골턴의 우생학은 단순한 과학적 차원의 논의가 아니라 항상 사회적 실천을 수반했던 연구 분야였습니다. 우생학의 성립과 발전 과정에서 골턴이 제기하고 구체화한 가정들, 즉 첫째, 정신적 능력도 유전의 대상이라는 판단, 둘째, 유전 능력에 대한 자의적인 범주 설정과 주관적인 가치판단, 셋째, 계급 및 인종 사이의 우열의 차이는 유전적으로 고정된 것이고, 생물학적 약자들과 부적격자들은 진화와 유전 과학에 기초하여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가정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또한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우생학 운동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골턴은 우생학을 창안하기 오래전부터 유전적 특질, 특히 지적 능력의 차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는 골턴 자신의 가계에 관한 관심, 즉 외조부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사촌인 다윈의 영향에 기인합니다. 이들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골턴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양육보다 인간의 형질을 규정하는 우선적 요인이라 생각했고, 이는 유전성의 강조를 내세우며 인간 개선을 도모하는 잘난 태생에 대한 과학, 그것을 실현할 방법과 그 과학적 기초를 '우생학'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골턴의 주장은 기독교적이었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쇠퇴하였지만 20세기의 전반기(1900년~1950년)까지 크게 성장하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일본 등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각종 우생학 단체가 만들어졌으며, 전문 학술지까지 발간되었습니다. 특히 미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는 우생학이 법률로 제정되어 수많은 사람이 강제 불임 수술과 거세를 당했으며 심지어 학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생학이 광범위한 대중적 여론과 연결고리를 갖는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04년5월 16일에 있었던 제1회 영국 사회학회에서 <우생학: 정의, 전망, 목적>이란 강연이었습니다. 그 강연이 있었던 같은 해 런던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우생학 기록 사무국(ERO)이 창설되었고, 1907년에는 이것이 발전하여 국가 우생학을 위한 골턴 연구소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1907년 런던에서 우생학 교육 협회(EES)가 설립되어 우생학이 활발한 대중운동 차원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명확한 유전 이론이 설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종 개량의 방법을 고민하며 사회적 실천을 추구했던 생물학의 응용과학이자 이념이었던 골턴의 우생학은 이후 30여 개의 나라에서 대중화됨으로써 20세기 전반 서구 역사에 지우기 힘든 흔적을 남겼습니다.

인간 유전의 전제 위에 세워진 우생학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 같은 것에 대한 일말의 고민이나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이나 지적 도덕적 유전까지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더 나은 사회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 과학의 바벨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갖게 된 육체적 정신적 결핍을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이유라고 판단하여 제거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요 인간 생명과 인권을 짓밟는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이고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복합 장애인 여자를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