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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2-노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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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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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노예(奴隸)란 인권이 인정되지 않고 가축처럼 소유주의 재산이 되어 강제로 통제되어 지내고, 또 매매의 대상이 되며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국제연맹이 채택한 노예제 조약(Slavery Convention, 1926)에서는 노예제를 "Slavery is the status or condition of a person over whom any or all of the powers attaching to the right of ownership are exercised"로 정의하였다. 즉 노예제는 소유권에 부과되는 권력의 일부 또는 전부를 행사하는 사람의 지위 또는 조건입니다. 노예의 역사는 동서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과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그리스, 중국, 로마 제국, 인도, 중남미 아메리카, 그리고 한반도 조선 시대에도 노예제는 존재하였습니다. 노예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니만큼 그 형태도 다양하였으며 노예에 대해 대우도 차이를 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술에서 노예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고대에는 부자, 권력자, 철학자, 종교 지도자들까지 노예를 소유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성경도 노예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이 노예제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성경이 원칙적으로 이혼을 반대하지만 허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이 노예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노예제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제를 극복하고 궁극적으로는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노예제 아래서나 행해지는 것들을 명령하는 것은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려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흔히 고대를 가리켜 노예 경제 혹은 노예제 사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스파르타의 경제는 노예 노동에 의존하였고, 이집트나 로마 제국도 노예 덕분에 대농장 경영이 가능했었습니다. 노예제가 허용된 국가에서는 어떤 사람이 노예에게 상해를 입히게 되면 그 죄는 법으로 타인의 물건을 훼손한 죄와 동급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무덤을 비밀로 하기 위해 노예들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고대 노예제 사회라고 할 때는 노예 노동이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노예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노예 노동을 경제적 인프라로 취급하게 되면 인권과 노예 문제는 원시 공산사회,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와 같은 제도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노예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로마 제국에서 공화정 초기에 노예들의 삶은 대체로 비참했습니다. 1세기 초기까지 로마인들의 인식에서 노예는 가축과 같았습니다. 물론 노예도 물건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세네카 같은 소수의 철학자도 있었습니다. 당시 노예에 대한 이러한 통념과는 달리 로마법 어디에도 노예를 물건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노예는 주인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되었고 주인은 노예들을 임의대로 처벌할 수 있었으며 노예 처벌의 비인간적 잔학성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인 베디우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는 노예가 자신을 실망하게 하면 칠성장어의 연못에 먹이로 던져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의 노예가 유리잔을 깨자 그 노예를 먹이로 던지려고 했었습니다. 이를 본 아우구스투스가 그 집의 모든 유리잔을 깨버리고 칠성장어의 연못은 메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노예의 주인은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했고 매질과 성폭행도 일삼았습니다. 로마의 귀족 부인들과 처녀들은 남자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거나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곁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안하무인이라고 하는데, 노예는 사람이 아닌, 개나 말 같은 동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곁에서 옷을 벗는다고 해도 전혀 창피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노예가 주인의 암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십 수백 명의 노예가 무자비하게 처형당하는 것을 시민들이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처형이 이루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황제가 칙령으로 노예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고 선포하였지만, 이는 노예를 처벌할 정당한 이유가 없이 죽인 경우에 한정되었습니다. 즉 주인이 노예를 죽일 만한 정당한 이유가 공평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입니다. 실제로 노예의 주인은 노예에 대하여 생살여탈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는 로마의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노예가 아닌 여자와 어린아이의 인권도 노예처럼 무시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의 인권 유린은 노예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에 대한 무지가 노예제를 쉽게 받아들이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로마법의 기초인 12표법은 아버지가 자식을 3번까지 노예로 팔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노예의 처우는 조금씩 좋아지는데, 노예 처우가 조금씩 개선된 것은 인권에 대한 의식의 변화라는 측면보다 로마의 정복 전쟁이 중단되면서 정복지로부터 노예 수급이 끊어진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노예 인구가 많았던 때는 말 안 듣는 노예는 죽여도 다른 노예를 사서 그 자리를 메우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노예를 존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노예 수급이 중단되자 경제도 함께 몰락하였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자유민이 사실상 노예의 자리를 대체하는 농노가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제국 후기에 기독교의 만민평등 사상에 따라 노예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었고 국가들도 노예에 관한 법을 개선하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대전의 노예 관련법 개정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주인이 노예를 죽이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고대가 끝난 중세 유럽에도 노예는 존재했습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에스파냐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시장이었고, 1128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상인들이 제노바 시장에서 이슬람 노예를 팔았습니다. 1348년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갑자기 가내 노예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피렌체에서 1336년에 공포된 시 법령은 노예들이 이교도, 즉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조건으로 노예 수입을 공식 허가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거의 모든 부유한 가정이 노예를 두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지중해 노예무역은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다른 상품에 노예를 덤으로 끼워 운송하는 형태였습니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노예 제도가 기승을 부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패트릭도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대략 서기 8세기 무렵에 점차 줄어들다가,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를 침입하면서 다시 노예 제도를 되살렸습니다. 바이킹들이 서기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쇠퇴해지자, 노예들은 바이킹에서 토착 아일랜드인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군대를 보내 아일랜드를 공격했던 1171년에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중세 말 흑사병의 유행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 국가들의 인구가 감소하며 타격을 받자 14세기 말을 기점으로 제노바 공화국에서 흑해의 무슬림 타타르인들로부터 슬라브인 노예를 수입했습니다. 한때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중산층들이 집마다 노예를 한두 명씩 둘 정도였으나,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제노바의 흑해 식민지들이 함락되면서 이탈리아 노예 시장의 주 공급처는 아프리카 서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로 개발을 촉진하며, 대서양 노예무역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북동부 프리올리에는 16세기까지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프리울리의 법령에는 노예 신분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아버지가 자유인인 경우에도 노예가 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인 존 녹스의 경우 1547년 7월 프랑스 군대에 붙잡혀 1549년까지 약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갤리선 노트르담에 끌려가 노를 젓는 노예로 살았습니다. 아울러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는 살인범, 좀도둑, 밀수업자, 탈영병 같은 범죄자들과 게으름뱅이들(거지, 실업자, 노숙자 등)과 집시들을 비롯한 부랑자와 빈민들은 물론 심지어 1660년에는 프랑스에 있는 한 성지를 방문한 폴란드인 순례자들까지 강제로 징집하여 갤리선으로 보내어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아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기독교인은 같은 기독교인을 노예로 삼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몇몇 그런 경우가 있었고 전체적으로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형태의 노예제라도 그것은 인종차별의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가 무조건 특정 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노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소유주의 재산으로 취급되거나 어느 정도의 소유와 자유가 허락되는 예도 있었지만, 노예제는 그 어떤 인종차별보다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적 존재를 비인격적 존재로 취급하는 노예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어떤 경우에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은 옛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현대적 노예제가 시행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노예 제도는 위협, 폭력, 강요, 권력 남용 또는 학대로 인해 사람이 거부하거나 떠날 수 없는 상황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노예제는 인신매매, 강제 노동, 빚 속박, 강제 결혼 또는 노예 결혼, 어린이 유괴 및 착취 등을 포함합니다. 현재도 존재하는 노예제 문제는 해결할 수는 있지만, 실제 현대판 노예제가 존재하는 나라의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이지리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라크, 예멘, 도미니카 공화국, 수단, 파키스탄, 콩고 민주공화국, 러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인도, 북한 등에는 과거 노예제 아래서의 노예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그 국가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개선해야 할 일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범죄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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