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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나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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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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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현대 자본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회의 공통된 특징은 경제 성장에 의해서 그 정당성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지지도 결국은 미국 경제 성장에 대한 평가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렇게 요지부동이던 지지도가 경제 정책의 실패로 체감되자 하락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 (黑猫白猫 抓老鼠 就是好猫)”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고 했었는데, 이는 현대인의 가치관을 잘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사회관은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에 상관없이 국민의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을 끌어낼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현대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을 합리적 국가 경영의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먹기 곶감이 달다”는 수준의 체감에 의존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의 뜻을 따르는 것마저 불안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고 여러 나라가 그런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어서 더욱 불안을 느낍니다.

요즘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 현실에 무관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치체제나 경제체제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은 다 같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가 서로 다른 정치와 경제의 제도를 표방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제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정치제도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고, 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나라가 선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들까지 자본주의 경제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는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어울리는 파트너이지 공산주의와는 같이 갈 수 없는 제도입니다. 만약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자본주의를 끝까지 유지하려면 공산주의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는 공산주의를 하면서 경제만 자본주의를 하려고 하면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인데 지금의 중국이 바로 그 딜레마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국이 정치 제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본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자본주의가 비록 가장 이상적인 제도는 아닐지라도 현실적으로 가장 최선의 제도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현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종교개혁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종교개혁을 교회 개혁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에 끼친 영향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계 많은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선호할 뿐 아니라 그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종교개혁의 열매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은 정치와 경제뿐만이 아니라 학문과 문화예술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긍정적 영향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손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며 개혁활동을 하였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종교개혁을 강조하고 그 영향의 덕을 누리면서도 종교개혁을 통해 정치와 경제 나아가 학문과 문화 일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손길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교회 안에서만 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학자였고 목회자였지만 사회사상 연구와 사회적 활동에 더 큰 주목을 끌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의 신학사상 자체의 독특한 성격 때문입니다. 칼빈신학의 별명이 정치신학인데, 그의 정치 및 경제관은 그의 신학사상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칼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정론인데, 그의 예정론은 그보다 더 핵심 교리인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루터는 신약성경과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주 관심을 기울였다면 칼빈은 구약성경과 창조자이며 통치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강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을 강조하였고,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공의를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루터와 칼빈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으며 모두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고, 그 은혜를 얻는 수단을 인간의 행동이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간의 전적 무능에 대한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범죄한 인간을 전적으로 무능하여 선을 선택할 자유조차 잃어버린 존재라고 하였는데, 예정론은 그러한 전제의 결론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해서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정론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시간적으로 어떤 사람의 구원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사람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예정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시간의 선후 개념의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선후가 전혀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 받고 멸망 받을 사람을 미리 결정해 두었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중요한 사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결정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정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피할 수 없이 제기 되는 문제는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예정하였다면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은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딜레마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의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 그 자체를 구별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으나, 모든 선택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며 의지의 기능 그 자체가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성경 이해의 토대에서 칼빈은 정치, 경제, 가정, 학문, 문화 등에서 인간은 의지의 기능을 통해 그 나름의 자유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고, 인간의 자유와 능력은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타락의 작용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어떤 사람을 그의 의지에 역행해서 선택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의지가 죄의 노예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칼빈의 이런 설명이 이 문제를 이론적으로 완전히 해명해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책임이 강조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부분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베버는 바로 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자본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에 의하면 사람의 구원까지도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의 수단으로 간주하게 합니다.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테면 개종이전의 인문주의자로서의 칼빈과 개종이후의 기독교 신학자로서의 칼빈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예부흥에서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요 목적이라면 종교개혁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요 목적이며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수단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개인들의 연장선상에서 완전하지 못하지만 악을 억제하고 은혜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증거 할 의무가 있습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 국가, 정치, 경제, 학문, 교육, 문화 등 사회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가야 할 역할을 위임 받았습니다.

사회와 교회는 동일시 할 수 없으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에서의 임무에 대해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사회에 미치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와 사회가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일원일 뿐 아니라 국가의 국민이고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 대한 임무가 있습니다. 한 개인이 교회의 일원이면서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그가 속한 사회가 이상적인 교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이상이 비록 실현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불가능의 가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역사는 어떤 법칙이나 필연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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