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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몽 아롱과 장폴 사르트르를 통해 생각하는 오늘의 사상과 이념의 대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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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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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제2차 세계 대전 후 30년 동안 사르트르는 프랑스 지식계의 대부였습니다. 정치와 사상과 이념의 첨예한 갈등과 분쟁 가운데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사르트르가 무어라고 말하는가에 주목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가에 대한 옳고 정직한 판단을 쉽게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식계를 석권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철학서를 통해 실존주의를 전후 프랑스에 대대적으로 유행시켰고, 평론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참여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소설과 희곡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정치 사회 이념의 갈등이 심한 당시 데모와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을 때 사르트르는 군중 데모, 항의 시위, 공개장 서명 등의 현장에 어김없이 찾아가 군중을 선동하는 운동권의 투사였습니다. 지식계의 대부이며 대중들의 절대적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었던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과 매우 가까웠고, 레닌주의와 마오이스트와 관련성을 띤 철학과 정치에 저돌적으로 참여하여“반공주의자는 개다”라고 할 만큼 보수 자유주의에 대해 투쟁적이었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철학 문학 소설 연극 비평 등 다방면에 걸친 영향과 인기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삶을 그린 자서전 “말”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수상을 거절했고, “리베라시옹”이라는 신문 창간에도 기여하고, 신문 광고를 위해 자신이 직접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방법까지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물로 그는 단순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엉터리 좌파는 아니었던 것이 “나는 잡종처럼 나의 철학으로 내 삶을 나중에 옹호하려 하지 않으며, 현학적으로 나의 철학에 내 삶을 맞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실로, 삶과 철학은 하나이다.”라는 그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우리 세대에게는 참여하는 지식인의 상징인 20세기의 볼테르로 남아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르트르의 삶은 그의 두 작품을 통해 볼 때 두 시기로 나눠집니다. “존재와 무”(1943)의 존재론에 중점을 둔 이론적인 철학적 접근과, 그 이후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에 제시된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하고자 한 보다 실천적인 시기로 구별됩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부르주아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료 선교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촌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선천적 근시와 사시였고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며 심리적 부담을 겪었지만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이 그의 학문적 탐구심을 자극하였습니다. 1924년 명문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하였지만 1928년에 아그레가시온이라는 1급 교원 자격시험에 낙제하여 그의 지인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이듬해 재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차석으로 합격한 평생의 반려자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났습니다. 1932년에 베를린으로 건너가 훗설의 현상학을 공부하였고, 1935년에는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갓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맞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도는 환각을 겪었고 그로 인해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으며 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파리로 돌아 온 후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를 출판(1938년)함으로 문학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 하여 1940년 독일 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습니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현대”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는데 그 잡지는 국제적 차원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잡지가 되어 그의 실존주의 사상을 확산시켰습니다. 1945년에는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사르트르는 현저한 명성과 성공을 이루었으며 10년 이상 프랑스 지성계와 문학계의 교황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는 1950년대에“현대”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본격적으로 발표하면서 많은 동료를 잃었고,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실존주의가 시들해 진 1960년대에 인간 자유에 대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구조주의 철학자들과 대립하였고 노벨 문학상과 유명 대학의 정교수 직을 거절하면서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 지식인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출판하면서 소위 68 혁명 5월 사태에 적극 참여하여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맹렬하게 비난하여 혁명 에너지를 청년들에게 불어넣었으며 청년들에게 정치에 적극 참여하라고 선동하였습니다. 당시 드골 대통령의 참모들은 사르트르를 체포할 것을 권하였지만 드골은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68 혁명의 정치적 위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김지하 씨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 수감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김지하의 “오적”번역본을 읽어 본 사르트르는 즉각 그의 석방 호소문에 서명해주었고 김지하는 이듬해 2월에 풀려나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1973년 갑작스런 실명으로 저술활동을 중단하였고 1980년 4월 15일 75세 때 폐수종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의 조문객들이 그를 추모하였고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 공산당원들과 동지들, 알제리에서 평화를 외친 사회운동가들, 젊은 마오이스트들이 그의 삶에 대해 마지막 경의를 표하며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성취하기 위해 엄숙히 다짐하며 장례 행렬을 따랐습니다.

68혁명이 한창이던 당시 사르트르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미국을 극렬하게 비난하며 청년 대학생들에게 혁명에 동참하고 정치에 참여하라고 선동하면서, 언제나 진보주의자들이나 좌파들이 그렇듯이 소련의 강제 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 또는 그런 것이 배태되어 있는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일에는 일체 입을 다물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지금 미국에서 플로이드의 죽음을 구조적 인종차별과 인권 문제라고 비난하는 지식인들과 언론들이 중국과 관련 된 지역, 홍콩이나 신장 위구르, 북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이슬람 여러 나라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는 이들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극단적인 인권 유린이 저질러지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면서도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는 언제나 달려가 선동연설을 하였습니다. 전후 30여 년간 프랑스는 내각이 수시로 바뀌던 불안한 제4공화국과 드골의 강력한 지도 체제 등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부르주아 우익 세력이 정권을 담당했지만 지식층의 헤게모니는 마르크시즘 진영이 잡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시즘을 반대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수구골통의 추악한 보수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그 누구도 자신이 보수임을 표방하지 못했습니다.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그랬듯이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반공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한 시대의 또는 한 사회의 주류 사상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1975년을 전후해서 5월 혁명 때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던 세대가 갑자기 마르크시즘의 한계와 소련의 죄악을 깨닫고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인권 문제를 들고 나와 소련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 의해 새롭게 발견한 인물이 레이몽 아롱입니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이 진보의 사상을 독점한 데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우익과 좌익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레이몽 아롱이 옳았으며, 사르트르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좌파의 대표는 사르트르, 중도 우파의 대표는 레이몽 아롱을 들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고등사범학교 입학 동기이자 친구사이기도 합니다. 교원 자격 고사도 아롱이 수석 졸업하였으며, 사르트르는 그해 시험에 떨어졌으나 다음 해에 수석 졸업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주로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레이몽 아롱은 주로 중도 우파 일간지 르 피가로에서 자신의 논설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 둘의 명성이나 영향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르트르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사르트르에 비하면 레이몽 아롱의 명성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명성은커녕 치욕스러운 보수파의 상징으로 프랑스의 지식 사회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 교수로 들어갈 때는 그가 우익 인사이며 우익 신문인 피가로의 논설위원이라는 이유로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레이몽 아롱은 마르크시즘이 세계를 해석하는 절대적 인식 도구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전후 프랑스가 상당한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고, 생활수준이 신장되고, 사회적 불평등은 축소되고, 교육 제도도 민주화되었는데 과연 좌익이 정권을 잡았어도 그런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는,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며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는 사르트르와는 대조적으로 인권 유린과 전체주의, 팽창주의를 경계했고, 이와 같은 오류가 스탈린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이미 공산주의의 이론 속에 배태되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아롱은 이런 입장에서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 적수(intellectual opponent)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지식인의 아편(The Opium of the Intellectuals, L'Opium des intellectuels,1955)”, “사회학적 사고의 단계들”입니다. 사르트르와 레이몽 아롱의 사상과 이념은 마르크시즘의 유행 사조에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마르크스주의가 압도하는 상황 이였지만 아롱은 이에 동화되지 않고 주변인으로 남아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소련을 철저하게 비판하였고 냉전 체제 하에서의 쟁점들에 대해 크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스탈린 치하 소련의 모순들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세속화 된 종교라고 정의하였고, 공산주의는 자격지심이 있는 지식인들을 유혹한다고 간파하였습니다. 그의 저서의 제목 “지식인의 아편”은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을 패러디한 것으로, 전후 프랑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저지른 억압, 학살, 비관용에 대해서는 변호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하다고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가 1955년에 소르본느 대학 교수로 임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에 의해 악마처럼 묘사되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마르크스주의가 파열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새로운 젊은 세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높이 재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자유주의 전통에 대해 혐오해왔습니다. 자유주의는 봉건귀족 및 전제왕정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사상적 무기가 되어 근대 이후 서구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이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주류 이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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