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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생명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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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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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불신자들은 기독교 안에 여러 종파가 있는 것을 아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자들 중에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파가 많은 것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독교에는 크게 세 종파가 있습니다.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프로테스탄트)로 구분됩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 루터교, 장로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아주 복잡하게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더욱 교파가 여럿인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같은 장로교 안에 백 개도 넘는 교파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하나였는데 이렇게 여러 개로 나누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파가 없었는데 지금처럼 나누어 진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할 당시에도 파가 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가 있었고, 디아스포라 기독교가 있었고, 이방인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는 주로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 기독교는 주로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이들은 유대교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이들은 유대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 같이 한 하나님과 한 주님 예수를 믿는다면 파벌이 생기기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의 이 같이 조금씩 다른 교회들이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혹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본거지로 삼는 유대기독교와 안디옥을 본거지로 삼는 이방기독교는 서로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큰 알력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속사정이 갈라디아서 1,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소위 안디옥 사건이 그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작은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차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여전히 지키고 있던 유대기독교들 앞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유대기독교인들이 동의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 크고 작은 불평이 불거져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방 기독교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기독교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스스럼없이 음식을 같이 먹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이방인 교회 교인들과 교제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강조하고 특히 할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할례파들입니다. 베드로는 당황했고 또 그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기독교인들도 이방인 신자들과 밥을 안 먹은 체하며 물러났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렇게 가식적인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갈 2:11-14).

그 때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이런 심각한 해프닝이 일어난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아주 명백한 목소리로 자신이 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앙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고, 그 핵심은 “의롭게 되는 것”이고, 그 길은 “믿음으로”입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의롭게 되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의로워야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사실 평화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평화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집니다. 평화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학문이나 지성이나 교양이나 권력이나 도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으며,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또 믿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율법을 섬겼습니다. 그 율법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이 토라이고 십계명은 토라의 핵심입니다. 이 십계명을 기초로 해서 많은 규례와 교훈이 생겨났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에 이르는 모세오경, 그 이외에도 온갖 종류의 성문법과 불문법들이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생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말을 듣고 배우고 믿으며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할례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기독인들에게까지 강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은 막강한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중심으로 열두 제자들이 모두 유대기독교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그들에게 잘못 보이면 신상에 해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겁 없이 그들과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바울의 주장이 당연한 것이지만 할례파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 기가 막히고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유교 문화권에서 삼강오륜을 무시하면서 효도를 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예수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행위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기둥 같고 또 대선배인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이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를테면 바울은 복음의 원리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 같은 주장은 혁명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유일한 길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겉으로 보이는 업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업적을 포기할 때만 믿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곧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포함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가장 처참하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에 집착하고 지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만 실제로는 이 땅에서 누릴 생명을 연장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신앙은 자기의 존재 전체를 거는 하나의 거룩한 도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까지 포함한 전체 삶을 판돈으로 거는 거룩한 도박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사업도 몽땅 거는 것입니다. 도박은 잘 되면 대박이지만 잘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적 싸움은 적당하게 타협할 수 있는 그 지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율법주의, 할례주의와 끝장토론을 벌이는 중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은총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인가를 밝히려고 합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파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을 비판하였습니다. 업적과 율법적 성공은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로 불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생명은 육신이 죽어서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 부활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생명은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고 신비로운 생명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마치 겨울의 언 땅을 헤집고 돋아나는 새싹처럼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새싹들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능력과 방식으로 생명력을 발휘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부활생명의 삶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힘으로 생명력을 확장해 갑니다. 부활생명은 어떤 두려움도 극복합니다. 바울은 생명의 이 신비로운 힘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 38, 3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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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복님의 댓글

황규복

존경하는황목사님의 글은 언제 대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정도로 깊습니다. 또한 어느 누가 읽어도 금방 이해가 가는 쉬운 글로 잘 설명이 되어 너무 좋습니다. 위의 글을 읽으며 초대교회와 믿음의 다양한 시대적 환경을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기본성이 갗추어진 성도들이 읽기에는 그렇게 부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는 있겠지만 그러나 보편적인 믿음에 지식을 갖게된 초심자들이 볼때에 구원의 도가 도박의 비교될 정도로 50% 정도의 확률로 표현되는 것은 복음과 주님의 죽으심의 목적에는 너무 죄송한  확률로 표현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시기 위해 설명하시려는 노력과 의도로 인해 자칫하면 이 귀하고 분명한 진리 100%의 구원의 도가 훼손되어질 까 염려스럽기까지 한 것은 저 혼자만의 편파적인 노파심이어야 할 것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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