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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과 불가지론적 태도를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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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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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신이 존재한다고 하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든지 그것은 엄청난 무게의 주장이기 때문에 입증 책임이 요구됩니다. 유신론자들의 신 존재 입증은 쉬운 반면 무신론자들의 신 부재 입증은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신 존재 증명은 이성을 바탕으로 이론이나 논리적 차원이 아닌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이나 유신론자들은 서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합리와 상식으로 생각할 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하나만 확인되어도 신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를 샅샅이 다 조사하고 역사 이래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경험을 다 조사한 다음에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가지론자들은 무신론의 신 부재 입증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에 그 부담을 피하기 위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표현들, “근접한 무신론”, “신에 대한 믿음 부족”등은 애써 무신론자의 신 부재 입증 책임을 회피하려는 궁여지책의 주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불가지론의 탈을 쓴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의 믿음의 전제에서의 신 존재 입증을 비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지만, 자신들이 신 부재 입증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유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매우 교만하고 사악하고 교활한 일종의 확신입니다. 신 존재론에 대한 모든 책임은 유신론자들에게 떠넘기면서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마치 학문적 겸양지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이성적 합리를 벗어나는 모순적 표현이며 철학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이 이론적으로 무신론은 아니지만 그 둘의 구분은 철학의 말장난일 뿐 그들 스스로 이성과 철학을 배신해 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모순과 억지와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가지론의 스펙트럼이 넓은 이유도 자가당착의 모순과 억지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불가지론이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보는 이신론을 반대하는 것을 볼 때 모든 지식의 불확실함을 주장하는 회의주의와도 사상적 조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결국 그들은 모든 이론과 주장은 알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또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 또한 불완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일반인들이나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 모든 것은 알 수 없다고 믿는 불가지론적 회의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아무것도 믿지 않거나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냉소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현대인들은 그와 같은 특징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게 된 사람들은 잘못 된 정보나 거짓이나 음모론 같은 것에 쉽게 휩쓸리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근본을 생각할 때 인간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은 이성과 합리의 결론이 아니고 그 또한 일종의 믿음입니다. 확실한 것이나 절대로 옳은 것은 없다고 믿는 잘못된 믿음은 토대가 부실한 매우 불완전한 믿음이기 때문에 거짓과 선동과 음모론에 취약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류 역사에서 정치계와 학문과 사상과 교회와 신학계에서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정치계의 음모론, 환경 음모론, 종말론적 음모론, 선교적 음모론, 한국에는 반일 음모론까지... 건전한 믿음과 정신과 가치관과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는 과장되고 극단적인 음모론에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까지 부화뇌동하는 일이 많습니다. 도무지 근거 없이 떠도는 음모론에 흔들리는 이유는 이 시대정신과 가치관과 경향과 상황을 읽어내는 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지력이 부족한 것은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탄핵될 것이라는 음모론은 세계의 주류 언론이 떠들어대는 음모론이고, 일본의 방사능 오염 음모론은 현 한국 정부가 이용하는 음모론이고, 시한부 종말론은 목회자들이 좋아하며 써먹는 음모론이고, 미국 전 부통령이었던 알 고어의 환경론은 전 세계 수많은 언론들과 학자들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던 환경론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그의 주장은 거짓되거나 확실하지 않은 정보에 의한 것임이 전문가들에 의해 다 드러났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벌써 지구의 종말이 왔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환경론이 음모론임을 증명하였지만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준 노벨 제단이나 그를 칭찬했던 언론이나 학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몇 년 전 내가 속한 교단 총회 신학부 모임에서 오바마 케어를 적그리스도의 음모라고 누군가 문제 제기를 할 때 그 모임에 참여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 주장에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던 적이 있습니다. 거짓과 위선과 선동이 난무하고 지식인과 언론과 힘 있는 정치인들이 그런 것을 이용하거나 방조하고, 온갖 조작된 통계가 발표되고, 온갖 음모론이 회자되어도 그것을 분별할 책임은 각자의 몫이고, 지도자는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도해야 할 부가적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중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하나님과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는 주장이 대결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주장이 채택되어 정통 교회가 표방하는 니케아신조가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호모우시오스(ὅμοούσιος)와 유사본질이라는 호모이오스(ὅμοιος)라는 유명한 논쟁인데,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호모우시오스가 채택되었지만, AD 385년 서머나교회 공의회에서는 당시 많은 성직자들이 그 논쟁에서 두 가지 주장 중에 그 어떤 것도‘결정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입장을 보류하는 것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태도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결국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틀린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이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주장이나 한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없거나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진리에 대해 그 풍성함이나 깊이를 다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지 그 희미하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무엇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정통 학자들은 무지에 근거한 주장이고 신성모독이라고 힐난하였습니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자들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동성애를 금하는 본문을 비틀어 해석하여 동성애를 금지하려는 뜻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하거나 혹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여성 목사 안수 문제나 사도직의 계승 문제에 대해서조차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런 입장은 결국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효과로 작용하게 마련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의 목회자나 신학자조차도 명시적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까지 마치 너그럽고 겸손한 것처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거나 단정적으로 말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러는 동안 비 성경적인 세속적인 입장들과 방법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바른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같은 신학과 교리를 표방하는 전문적인 신학자들조차 서로 다른 입장들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신자들은 더욱 극심한 혼란을 격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정말 우리가 몰라서 결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시켜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하는 데 이용하면 안 됩니다. 동성애의 경우 성경에서 그것이 옳지 않음을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여섯 개의 구절이 있고 그와 연관된 여러 가르침이 있어서 명백하게 ‘아니요’라고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부를 결정할 수 없다거나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는 아닐지라도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대부분 ‘예’‘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사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단정적으로 ‘예’‘아니오’를 할 수 없지만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혀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확신은 보편 가치나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포즈를 취하는 것일 뿐 결국 개인의 욕망을 위한 수단에 불가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자기에게 힘이 있을 때는 무엇이나 확신에 차서 행동하지만 불리하게 되면 한 순간에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거나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나 가치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이나 평화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산주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누구라도 평소에는 온갖 그럴듯한 이상을 주장하지만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을 수단화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국가는 그럴 위험이 있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증세가 심각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마치 공산주의 국가에서처럼 인권이나 성이나 자유나 정의나 윤리나 경제나 그 어떤 가치도, 심지어 거짓까지도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살면서 마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경험하는 일들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사실과 진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진실이 아니고 필요하면 사실과 진실까지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 어떤 악도 정당화 할 수 있고, 어떤 진실도 부정할 수 있고, 어떤 사악함도 고상하게 미화할 수 있는 사회, 법도 전통도 질서도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부정될 수 있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난 13일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존슨 총리는 브렉시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러서 압승을 하였습니다. 존슨이 이끄는 보수당은 48석이 늘어서 압승을 거두었고 노동당은 59석이 줄어 참패를 하였습니다. 영국이 지난 2016년 프렉시트를 결정하자 세계 언론들은 영국을 맹비난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진보 언론들은 브렉시트가 영국이 국수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사실은 사회주의적으로 폐쇄된 EU에서 탈퇴하여 열린 자유세계 무역의 길로 나가려고 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존슨의 총선 승리를 축하하는 트윗에서 “영국과 미국은 이제 브렉시트 이후 새로운 대규모 무역 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또 “이 거래는 유럽연합과 체결할 수 있는 어떤 거래보다 훨씬 더 크고 수익성이 좋은 거래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총선 승리가 알려지자 영국의 파운드 가치도 올랐습니다. 한국 언론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세계 언론이 영국의 브렉시트는 영국을 경제적 수렁으로 빠지게 할 것이라며 어리석고 무모한 결정을 하였다고 비난하였지만 EU 탈퇴가 눈앞에 다가오자 오히려 영국 경제에는 파란 불이 켜졌습니다. 그동안 세계 언론들이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이 정말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믿은 것인지 아니면 잘 한 결정인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브렉시트에 대해서는 아직 두고 보아야 하지만, 이곳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도 주류 언론들을 비롯하여 온 세상이 떠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주류 언론들과 유명인사들의 주장이나 유명한 학자들의 주장일수록 잘 듣고 분별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셨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주장일수록 피해야 할 넓은 길일 수 있습니다. 거짓은 우리의 감성과 이성에 부드러우면서도 합리적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파고들어 우리의 영혼을 잠재우고 악한 욕망을 일깨워 파국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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