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6-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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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9-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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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사랑하다’는 의미를 가진 필레인(Φιλειν)과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σοφία)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그리스어로 '농담'이 '웃음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농담’의 그리스어를 필로겔로스(Φιλόγελως)라고 하는데, 철학의 그리스어처럼 필로겔로스는 ‘사랑하다’는 뜻의 ‘필로’와 ‘웃음’이라는 뜻의 ‘겔로스’가 합쳐저서 된 단어입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었고 웃음을 사랑하는 것이 해학이었던 셈입니다. 그들에게는 웃음도 학문이었으니까 필로겔로스는 소학(笑學, 웃을笑+ 배울學)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영어에서는 필로겔로스를 주로 '웃음에 대한 사랑'(Love of Laughter)이라고 번역합니다.
농담이라는 뜻의 이 필로겔로스는 히에로클레스와 필라그리우스가 엮은 현대에 전해진 가장 오래 된 고대 유모 모음집이기도 합니다. 히에로클레스는 서기 5세기 초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향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했고 거기에서 권력자들에게 맞서다가 당국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벌로 채찍질을 당한 뒤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가 법정으로 끌려가서 유죄판결을 받고 채찍으로 두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피를 손바닥에 담아 판사에게 뿌리면서 “이 외눈 괴물 퀴클롭스야, 와서 이 포도주를 마셔라. 방금 사람고기를 먹었으니 목마르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히에로클레스가 한 이 행동은 자신에게 채찍질하라고 선고한 판사를 사람고기를 먹는 외눈 괴물 퀴클롭스라고 모욕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피를 포도주라고 부르면서 기독교의 성찬식도 비웃고 있습니다. 그 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였기에 그가 반기독교적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 당국에 기소되어 처벌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유배를 마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히에로클레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가르치고 필로겔로스 외에도 여러 책을 썼습니다. 그는 점성술이나 운명론이 이성적인 신의 섭리보다는 비이성적인 이유에 근거를 둔다며 반대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마법이나 초자연적 치료법도 신의 섭리적 질서를 대신하려는 헛된 시도라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지만, 몇몇 학자들은 그의 책들에서 자신의 그리스철학 전통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만났던 기독교 신앙 사이의 화해를 시도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히에로클레스 역시 신플라톤주의자로서 그리스의 옛 종교와 철학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기독교를 거부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기독교처럼 신플라톤주의도 단 하나의 신적존재가 존재 계층의 최상위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신플라톤주의와 많은 논쟁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교리를 발전시켜왔고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이야기가 본 글의 주제를 벗어나서 핵심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본 글의 주제는 고대로부터 인간은 장애인을 농담과 해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의 인간관과 인권의 문제를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히에로클레스의 <필로겔로스>에 실린 농담 중에는 노예와 여성과 다른 사람의 장애나 질병을 소재로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미개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인종, 성별, 신체적 정신적 결함, 특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외모나 학력이나 경제력을 혐오, 비하, 희롱하는 농담이나 유머나 해학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습니다. 농담이나 유머나 해학 등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을 소재로 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농담이 상당히 많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자신의 많은 영지와 노예와 하인을 소유한 부자나 학자들에 대한 비아냥의 농담도 많았습니다. 그 농담 속에서 ‘학자’들은 보통 사람보다도 더 멍청하고 엉뚱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농담과 해학은 오늘날 더 개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옛 조선 시대의 탈춤에서도 주요 풍자대상이 고약한 양반이나 관리들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각설이 타령이나 소위 병신 춤 같은 민속 농담이나 해학은 장애인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성을 비하하고 혐호하거나 장애를 희화화 하거나 노예제를 당연시하거나 특정 인종이나 민족등 소수자를 비하하고 혐호하는 내용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지금의 수준에서 평가하면 원시적이고 야만적입니다. 그러한 고대의 농담과 해학은 반면교사로서 역사적, 인류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가 '올림푸스 산의 신들은 연회를 즐기면서 웃는 데 열중했다'라고 시를 썼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들을 웃게 하는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연회 시간에 웃으며 즐겼던 이야기가 헤파이스토스를 절름발이로 만든 우스꽝스러운 사고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많은 이들이 실망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과 여신들은 호메로스가 살았던 시대의 사상과 관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훗날 중세 서양의 궁전에서 왕과 귀족들을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고용했던 사례의 초기 형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기형이 유머러스하다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인류의 문명이 성장하는 가운데 거쳐온 다양한 단계들로 판단해 볼때 신체적 기형이나 장애를 유머러스하게 생각하던 단계는 인류 문명의 초기 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장애를 재미와 해학으로 즐기는 것은 문명의 초기 단계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적 영역에서는 장애를 웃음거리로 묘사하거나 즐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꼽추 병이나 사팔뜨기 사시인 사람을 흉내 내며 낄낄거리고 재미있어하는 때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장애인 복지가 지금보다 나았다고 하기도 하지만 장애인이 있는 거의 모든 가정은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집안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은 혼인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애인 가족을 숨기는 행위는 장애인에게 더 견디기 힘들고 가혹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장애인을 웃음거리의 소재로 삼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가혹한 인권 유린입니다.
장애인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도 나쁘지만 장애인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던 독일 나치의 만행이나 장애인의 존재를 숨기는 가족의 처사는 더 악한 죄악입니다. 장애인 가족의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을 악하다고 하는 지적을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족에 의해서 유령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장애인 인권 유린을 조장하는 단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인권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 책임 문제이기 이전에 가족의 책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나치의 장애인 제거 정당성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가 다 같이 기여한 면이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자원만 축내는 장애인을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며 추구한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의 이상은 그들이 기대한 대로 그들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즐거움과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그 의무로부터 도피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특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즐거움과 웃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인데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잃어버린 즐거움과 웃음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서 즐거움과 웃음은 완전히 회복되겠지만 지금 이 땅에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 맛보고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사는 이들은 즐거움과 웃음을 누리며 살지만 아직은 고통과 걱정근심을 아울러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서 즐거움과 웃음을 얻지만, 인간 장애를 웃음과 즐거움의 소재로 삼지는 않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성경의 관심은 특별합니다. 장애가 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한 장애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의 장애든지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배려와 태도와 사랑은 그를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또한, 성경은 장애를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수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장애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복음을 듣게 될 자들이 사회적 장애인들과 육체적 장애인들이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러한 장애인들을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교회 안에서 직접 확인해보라고 제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장애인인데, 인간이 장애인을 농담과 해학의 소재로 삼는 것은 장애인이 장애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자학행위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애에 대한 차별은 끝이 나지 않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장애인이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21-2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농담이라는 뜻의 이 필로겔로스는 히에로클레스와 필라그리우스가 엮은 현대에 전해진 가장 오래 된 고대 유모 모음집이기도 합니다. 히에로클레스는 서기 5세기 초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향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했고 거기에서 권력자들에게 맞서다가 당국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벌로 채찍질을 당한 뒤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가 법정으로 끌려가서 유죄판결을 받고 채찍으로 두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피를 손바닥에 담아 판사에게 뿌리면서 “이 외눈 괴물 퀴클롭스야, 와서 이 포도주를 마셔라. 방금 사람고기를 먹었으니 목마르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히에로클레스가 한 이 행동은 자신에게 채찍질하라고 선고한 판사를 사람고기를 먹는 외눈 괴물 퀴클롭스라고 모욕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피를 포도주라고 부르면서 기독교의 성찬식도 비웃고 있습니다. 그 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였기에 그가 반기독교적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 당국에 기소되어 처벌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유배를 마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히에로클레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가르치고 필로겔로스 외에도 여러 책을 썼습니다. 그는 점성술이나 운명론이 이성적인 신의 섭리보다는 비이성적인 이유에 근거를 둔다며 반대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마법이나 초자연적 치료법도 신의 섭리적 질서를 대신하려는 헛된 시도라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지만, 몇몇 학자들은 그의 책들에서 자신의 그리스철학 전통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만났던 기독교 신앙 사이의 화해를 시도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히에로클레스 역시 신플라톤주의자로서 그리스의 옛 종교와 철학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기독교를 거부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기독교처럼 신플라톤주의도 단 하나의 신적존재가 존재 계층의 최상위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신플라톤주의와 많은 논쟁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교리를 발전시켜왔고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이야기가 본 글의 주제를 벗어나서 핵심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본 글의 주제는 고대로부터 인간은 장애인을 농담과 해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의 인간관과 인권의 문제를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히에로클레스의 <필로겔로스>에 실린 농담 중에는 노예와 여성과 다른 사람의 장애나 질병을 소재로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미개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인종, 성별, 신체적 정신적 결함, 특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외모나 학력이나 경제력을 혐오, 비하, 희롱하는 농담이나 유머나 해학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 어디서나 발견되고 있습니다. 농담이나 유머나 해학 등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을 소재로 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농담이 상당히 많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자신의 많은 영지와 노예와 하인을 소유한 부자나 학자들에 대한 비아냥의 농담도 많았습니다. 그 농담 속에서 ‘학자’들은 보통 사람보다도 더 멍청하고 엉뚱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농담과 해학은 오늘날 더 개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옛 조선 시대의 탈춤에서도 주요 풍자대상이 고약한 양반이나 관리들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각설이 타령이나 소위 병신 춤 같은 민속 농담이나 해학은 장애인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성을 비하하고 혐호하거나 장애를 희화화 하거나 노예제를 당연시하거나 특정 인종이나 민족등 소수자를 비하하고 혐호하는 내용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지금의 수준에서 평가하면 원시적이고 야만적입니다. 그러한 고대의 농담과 해학은 반면교사로서 역사적, 인류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가 '올림푸스 산의 신들은 연회를 즐기면서 웃는 데 열중했다'라고 시를 썼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들을 웃게 하는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연회 시간에 웃으며 즐겼던 이야기가 헤파이스토스를 절름발이로 만든 우스꽝스러운 사고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많은 이들이 실망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과 여신들은 호메로스가 살았던 시대의 사상과 관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훗날 중세 서양의 궁전에서 왕과 귀족들을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고용했던 사례의 초기 형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기형이 유머러스하다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인류의 문명이 성장하는 가운데 거쳐온 다양한 단계들로 판단해 볼때 신체적 기형이나 장애를 유머러스하게 생각하던 단계는 인류 문명의 초기 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장애를 재미와 해학으로 즐기는 것은 문명의 초기 단계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적 영역에서는 장애를 웃음거리로 묘사하거나 즐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꼽추 병이나 사팔뜨기 사시인 사람을 흉내 내며 낄낄거리고 재미있어하는 때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장애인 복지가 지금보다 나았다고 하기도 하지만 장애인이 있는 거의 모든 가정은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집안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은 혼인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애인 가족을 숨기는 행위는 장애인에게 더 견디기 힘들고 가혹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장애인을 웃음거리의 소재로 삼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가혹한 인권 유린입니다.
장애인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도 나쁘지만 장애인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던 독일 나치의 만행이나 장애인의 존재를 숨기는 가족의 처사는 더 악한 죄악입니다. 장애인 가족의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을 악하다고 하는 지적을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족에 의해서 유령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장애인 인권 유린을 조장하는 단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인권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 책임 문제이기 이전에 가족의 책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나치의 장애인 제거 정당성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가 다 같이 기여한 면이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자원만 축내는 장애인을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며 추구한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의 이상은 그들이 기대한 대로 그들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즐거움과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그 의무로부터 도피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특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즐거움과 웃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인데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잃어버린 즐거움과 웃음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서 즐거움과 웃음은 완전히 회복되겠지만 지금 이 땅에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 맛보고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사는 이들은 즐거움과 웃음을 누리며 살지만 아직은 고통과 걱정근심을 아울러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서 즐거움과 웃음을 얻지만, 인간 장애를 웃음과 즐거움의 소재로 삼지는 않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성경의 관심은 특별합니다. 장애가 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한 장애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의 장애든지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배려와 태도와 사랑은 그를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또한, 성경은 장애를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수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장애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복음을 듣게 될 자들이 사회적 장애인들과 육체적 장애인들이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러한 장애인들을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교회 안에서 직접 확인해보라고 제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장애인인데, 인간이 장애인을 농담과 해학의 소재로 삼는 것은 장애인이 장애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자학행위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애에 대한 차별은 끝이 나지 않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장애인이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21-2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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