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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지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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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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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 지난 번 글은 배교의 시대에도 미쁘신 하나님에 대해 썼습니다. 미쁘다는 것은 신실하다 또는 성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사랑에 대해 배신을 해도 당신이 세우신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배교와 그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반복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했고 왕정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도 없이 하나님을 배신했고 하나님께서는 수도 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참 된 신앙고백에서 가장 우선되는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반역적 존재라고 해야 할 인간이 조건 없이 용서 받고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할 때 그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 전에도 그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도 존재 목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섭리에 그 토대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사랑을 경험한 자는 호흡을 비롯한 생명현상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그 사랑을 증거 하는 특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라고 하였습니다. 

 

1742년 4월 13일 헨델의 메시야 첫 공연을 관람하던 영국 왕 조지 2세가 할렐루야 곡이 연주될 때 감동을 참지 못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메시야 공연 때 할렐루야 부분에서 청중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곡을 작곡한 헨델에 대한 존경과 예의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고 장엄한 음악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하신 구속사역의 완성이 선포되고 묘사될 때 죄인인 우리가 그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 감격을 인하여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메시야 두 번째 공연 때부터는 공연에 참가하는 여자들은 후프(Hoop: 치마 끝에 링을 넣어 펑퍼짐하게 하는 치마)를 못 입게 했고 남자 기사들도 메시야 공연에 참석할 때는 칼을 차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메시야에 대한 거룩한 감동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천재 음악가 하이든이 이 메시야에 감동을 받아 천지창조를 작곡하였고, 베토벤은 메시야에 감동을 받아 평생에 헨델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의 한 분이신 헤르만 바빙크의 『Our Reasonable Faith』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그 책 제6장 특별계시의 내용을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다시 읽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유명한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는 자기 서재에서 성경을 제외한 한 권의 책만 남겨야 한다면 단연 바빙크의 Our Reasonable Faith를 남길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감격하게 하고 찬송하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 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글의 제목은 『용서에 지치신 하나님』입니다. 배교와 배신에 대하여 끝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입니다. 단순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앞글과 이 글은 모순을 일으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과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으로 계시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도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도 없이 뜻을 돌이키시고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다.”(렘 15:6)고 하십니다. 이런 표현은 한두 번 뜻을 돌이키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수도 없이 마음을 바꾸고 뜻을 돌이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일체 뜻을 바꾸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불안하고, 수시로 마음이 변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더욱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검사처럼 법대로 우리를 다루시지도 않으시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우리를 버려두지도 않으십니다. 때로는 한 없이 참으시고 끝없이 용서하시는 너그러운 하나님이시지만 때로는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으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양면적 성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계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에는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논리적이거나 합리적 정당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신비롭게 조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당신께서 수도 없이 마음을 바꾸시다가 지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은 안 참는다.’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런 표현이 원칙적으로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런 표현을 하셨으니까 우리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도 끝도 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좋은 부모, 훌륭한 부모는 어떤 부모일까요?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끝까지 용서만 하는 부모일까요? 아니면 아주 속상하면 너 죽고 나 죽자 라고 하며 잘못한 자식을 두들겨 패는 부모일까요? 성경은 아무리 잘못을 해도 무조건 용서만 하는 부모는 자격 없는 부모라고 합니다. 자식을 매로 때리지 않는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사랑의 징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다.”고 하신 경우는 징계가 아니라 심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결심에 추호의 번복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cf. 시 99:6).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크게 범죄 했을 때 모세나 사무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와 사무엘은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세나 사무엘이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결심을 하신 원인은 너무나 여러 번 마음을 바꾸시느라 지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순종이나 불순종이나 용서 같은 것을 몇 번 했느냐 하는 횟수에 관심을 쏟지만 하나님께서는 횟수보다 그 죄의 성격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나 사무엘이 기도한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겠다고 지목하신 구체적인 죄는 유다 왕 므낫세가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렘 15:4). 므낫세는 히스기아의 아들이고 아하스의 손자입니다. 아하스와 므낫세는 악한 왕이고 히스기야는 선한 왕입니다. 아하스와 므낫세 말고도 악한 왕은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죄나 므낫세의 죄나 우리가 보기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므낫세의 죄를 특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시적 언급은 없지만 므낫세의 죄는 하나님을 배반한 상징적인 죄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온갖 종류의 죄가 많지만 후대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면 성경은 그 거역과 불순종이 므낫세의 길을 따른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세상적 역사 이해에서 평가한다면 므낫세는 남 유다나 북 이스라엘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무려 55년 동아니 집권하였습니다.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제국 앗수르의 비위를 잘 맞추어 경제적 번영과 안정을 누렸습니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정책을 완전히 뒤집어엎었습니다. 가나안 토착신은 물론 앗수르로부터 우상을 들여와 종교적 혼합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고 그 과정에서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려 한 백성에게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을 자행하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하스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고 우유부단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강대국을 믿고 우상을 섬겼지만 므낫세는 고의적으로 하나님 신앙을 버렸고 방해하며 박해하였습니다. 왕하 21:16절에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피가 가득하게 하였더라.”고 하였고,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므낫세는 의로운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하여금 유다를 진멸하게 하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은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게 되면 그 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현대 국가들이나 집단들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치자의 권력이나 개인 혹은 집단의 이익이나 심지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인권을 유린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보편 가치를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환경, 의학, 과학, 문학, 예술 등에서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합니다. 뉴욕대학의 물리학자 Alan Sokal의‘지적 사기사건’은 강단 좌파들의 무지와 거짓과 왜곡을 고발한, 이를테면 학계의 내부고발로 세상을 경악케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이유 중의 하나도 유럽연합이 지나치게 좌편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유럽연합 국가들의 정책은 거의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들 중 상당부분이 거짓이었음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 의장인 Pachauri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채식을 해야한다고 강조하며 자신이 실제로 채식을 하며 지구를 살리는 일에 올인 한 금세기의 영웅입니다. 빛나는 세계 영웅 상을 비롯하여 노벨평화상까지 받고 엄청난 상금도 받았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고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났고, 주장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고, 수많은 성희롱 죄가 드러나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 강단과 환경운동, 유엔과 노벨제단, 문화와 종교까지 온통 거짓된 이론과 주장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죄는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철폐해 버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물질, 성공, 성장, 부흥 등이 지배적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이 좋은 일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예의주시하여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 중에서 물질 성공 성장 부흥 등에 집착하는 이들이 좋은 일을 할 때도 예의주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좋은 일은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물질 성공 성장 부흥 등에 집착하는 이들의 좋은 일도 좋은 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렘15: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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