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끼리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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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ㆍ2020-06-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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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고기를 안 먹는다. 왜 안 먹는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중학교시절 동네에서 개잡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개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 경사진 바위 아래로 개를 내려놓고 목매어 죽이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개가 숨이 끊어지지 않으니까 목매어 죽어가는 개를 향해 나무 막대기로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렇게 때려야 개고기 맛이 더 난다고 했던 아저씨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개를 죽인 후에 불에 굽는 광경까지 보았다. 검게 그을린 개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인지 누가 개고기를 먹자고 하면 그 때 생각이 나서 먹지를 못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개를 키웠었다. 몇 년을 같이 지낸 개인데 어느 날 개장사가 와서 개를 끌고 가는 그때의 모습도 기억난다. 개가 안 가려고 질질 끌려가면서 나를 뒤돌아보았던 그 개의 모습도 기억난다.
난 그때 개는 그렇게 팔아도 되고, 그렇게 죽여도 된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았다. 개는 인간처럼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는 당연히 그렇게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딸은 전혀 다르다. 개를 사람대하 듯 대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서 개를 대우하는 모습에 놀랐다. “개가 사람이냐, 그렇게 사람같이 대하게...” 그때 딸이 하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빠, 개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 알아, 개도 생각할 줄 안다고...” 개가 생각할 줄 안다고? 그때 난 그 말에 내가 생각했던 개에 대한 편견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개도 감정이 있고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00년 전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에 들어가서 당시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는 것을 난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은 명분이 복음전파였다. 중남미에 복음을 모르는 미개인들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명분을 가지고 그곳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석을 닥치는 대로 강탈하면서 나라를 정복했다. 그렇게 강탈하는 과정에서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잔인할 정도로 닥치는 대로 죽였다. 원주민들을 아주 말쌀해 버렸다.
왜 이렇게 정복자들은 잔인했던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꼭 그래야만 했던가? 물론 그 당시에 그럴만한 이유야 다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미개한 원주민들은 인간으로써의 자격이 없는 동물 같은 존재들이라는 인식, 즉 개나 돼지 정도로 취급해도 된다는 생각이 아무 죄책감도 없이 그들을 학살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마치 내가 개는 그렇게 죽여도 되고 그렇게 사고팔아도 된다는 인식, 그것이 오늘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행선에서 보았을 때,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됨이 아닐까,
흑인은 원래 인간이하의 저급한 인간이다. 노예 수준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오랜 세월 우리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학습되어진 관점에서 흑인들을 보고 있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어져 있었다. 왠지 흑인을 보면 경계가 되고 좀 우리보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나도 모르게 내 맘에 자리 잡고 있지나 않았는지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사실 이런 인종차별이라는 내면적인 인식이 우리에게도 짙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남미에 단기선교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가난한 나라, 인간이 갖추고 살아야 할 기본 물품조차 없는 사람들, 화장지가 없어 옥수수 속대로 뒤처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가지고 간 모든 물품들을 아낌없이 주었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 복음을 알려주는 사람, 그들보다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 복음을 알아야 하는 사람, 아직 축복을 못 받은 사람... 그러니까 난 고급한 사람, 저들은 아직 저급한 사람으로 편 가르기가 되면서 보이지 않는 편견이라 할까.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한수 낮은 그런 사람들로 마음에 되새겨지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묻고 싶다.
물론 이것이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차별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들끼리도 차별이 서 있다. 명문 대학을 나와 명문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법 크다는 교단에 소속된 대형교회 목사와 군소교단 신학교 출신의 미자립 교회 목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
그런 차별이 어쩌면 성도들에게도 비쳐질 때가 있다. 이민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분들에게는 뭔가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한국에서 뭐 국회의원 정도 했다는 분들은 거의 장로감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성도들도 목사도 그런 분을 장로로 인정한다. 반면 막노동을 하면서 주일에도 돈벌이를 해야 하는 성도는 만년 집사다. 또는 부목사와 담임목사, 주인과 종업원, 영어를 잘하는 목사와 못하는 목사, 이 모두가 질서상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차별로 선을 긋고 갑과 을의 관계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새겨보아야 한다.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외침을 외면한 채 생명을 짓밟아 버린 한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적 행동이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경찰 입장에서 범죄자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인식, 백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인식, 그런 인식이 바로 우리들에게도 깔려 있다는 사실을 왜 우린 인정하지 못 하는가?
복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인종차별에 투쟁해야 한다는 우리가 스스로 내가 그런 차별주의자라는 죄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린 고급한 하나님의 종들로만 인식 할뿐 자기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살지는 않는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개를 키웠었다. 몇 년을 같이 지낸 개인데 어느 날 개장사가 와서 개를 끌고 가는 그때의 모습도 기억난다. 개가 안 가려고 질질 끌려가면서 나를 뒤돌아보았던 그 개의 모습도 기억난다.
난 그때 개는 그렇게 팔아도 되고, 그렇게 죽여도 된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았다. 개는 인간처럼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는 당연히 그렇게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딸은 전혀 다르다. 개를 사람대하 듯 대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서 개를 대우하는 모습에 놀랐다. “개가 사람이냐, 그렇게 사람같이 대하게...” 그때 딸이 하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빠, 개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 알아, 개도 생각할 줄 안다고...” 개가 생각할 줄 안다고? 그때 난 그 말에 내가 생각했던 개에 대한 편견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개도 감정이 있고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00년 전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에 들어가서 당시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는 것을 난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은 명분이 복음전파였다. 중남미에 복음을 모르는 미개인들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명분을 가지고 그곳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석을 닥치는 대로 강탈하면서 나라를 정복했다. 그렇게 강탈하는 과정에서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잔인할 정도로 닥치는 대로 죽였다. 원주민들을 아주 말쌀해 버렸다.
왜 이렇게 정복자들은 잔인했던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꼭 그래야만 했던가? 물론 그 당시에 그럴만한 이유야 다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미개한 원주민들은 인간으로써의 자격이 없는 동물 같은 존재들이라는 인식, 즉 개나 돼지 정도로 취급해도 된다는 생각이 아무 죄책감도 없이 그들을 학살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마치 내가 개는 그렇게 죽여도 되고 그렇게 사고팔아도 된다는 인식, 그것이 오늘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행선에서 보았을 때,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됨이 아닐까,
흑인은 원래 인간이하의 저급한 인간이다. 노예 수준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오랜 세월 우리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학습되어진 관점에서 흑인들을 보고 있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어져 있었다. 왠지 흑인을 보면 경계가 되고 좀 우리보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나도 모르게 내 맘에 자리 잡고 있지나 않았는지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사실 이런 인종차별이라는 내면적인 인식이 우리에게도 짙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남미에 단기선교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가난한 나라, 인간이 갖추고 살아야 할 기본 물품조차 없는 사람들, 화장지가 없어 옥수수 속대로 뒤처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가지고 간 모든 물품들을 아낌없이 주었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 복음을 알려주는 사람, 그들보다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 복음을 알아야 하는 사람, 아직 축복을 못 받은 사람... 그러니까 난 고급한 사람, 저들은 아직 저급한 사람으로 편 가르기가 되면서 보이지 않는 편견이라 할까.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한수 낮은 그런 사람들로 마음에 되새겨지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묻고 싶다.
물론 이것이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차별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들끼리도 차별이 서 있다. 명문 대학을 나와 명문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법 크다는 교단에 소속된 대형교회 목사와 군소교단 신학교 출신의 미자립 교회 목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
그런 차별이 어쩌면 성도들에게도 비쳐질 때가 있다. 이민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분들에게는 뭔가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한국에서 뭐 국회의원 정도 했다는 분들은 거의 장로감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성도들도 목사도 그런 분을 장로로 인정한다. 반면 막노동을 하면서 주일에도 돈벌이를 해야 하는 성도는 만년 집사다. 또는 부목사와 담임목사, 주인과 종업원, 영어를 잘하는 목사와 못하는 목사, 이 모두가 질서상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차별로 선을 긋고 갑과 을의 관계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새겨보아야 한다.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외침을 외면한 채 생명을 짓밟아 버린 한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적 행동이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경찰 입장에서 범죄자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인식, 백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인식, 그런 인식이 바로 우리들에게도 깔려 있다는 사실을 왜 우린 인정하지 못 하는가?
복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인종차별에 투쟁해야 한다는 우리가 스스로 내가 그런 차별주의자라는 죄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린 고급한 하나님의 종들로만 인식 할뿐 자기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살지는 않는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Kate님의 댓글
Kate
참으로 인자하시고 따뜻하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의 대부분 갑남을녀들은 한 뼘 막대자로 사람을 재고 차별하는 수준을 넘어서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것도 정말 어려운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내 자신부터 부당하게 섣불리 차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할수 밖에요. 따뜻한 인사성, 장소에 맞는 옷차림, 격조있고 당당한 태도와 언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가짐..등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