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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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2-01-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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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세기 경의 로마의 전략가인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그의 군사학 논고에서 “시 비스 파쳄, 파라 벨룸(Si vis pacem, para bellum)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라틴어입니다. 역설처럼 생각되는 이 말의 출처가 플라비우스의 논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그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으로 쉽게 생각하지만, 이미 플라톤의 법률론에도 같은 뜻이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교훈입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나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감행하였습니다. 전쟁의 경험은 많은 사람이 하였지만, 그 전쟁이 평화를 위한 전쟁이었음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비우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수많은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감행해왔으면서도 플라비우스의 말에 사뭇 놀라게 됩니다. 경험은 아무나 하지만 표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이 타인에 의해 이론적으로 제시될 때 충격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플라비우스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고 한 것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치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들이 해 왔던 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입니다.“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말의 원문 표현은 "평화를 원하는 이들은 전쟁을 준비한다.(Igitur qui desiderat pacem, praeparet bellum.)"라고 되어있다는데, 이로 보아서 이것이 플라비우스가 발견한 이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평화를 얻기 위한 전쟁 준비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 국제 정치학에서도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플라비우스의 군사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평화를 얻고 지키는 인간의 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플라비우스의 군사전략을 극도로 싫어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여류 소설가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는 1889년에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Die Waffen nieder!)》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평화주의 운동가가 되어 1905년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1891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평화주의 기구를 설립하여 활동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평화주의 운동은 헨리 토머스 버클과 허버트 스펜서와 그리고 찰스 다윈의 저서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1주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노벨의 비서로 고용되었던 인연으로 노벨이 사망한 1896년까지 노벨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노벨이 노벨상에 평화 부문을 포함시키도록 영향을 끼쳤고 190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오스트리아 화폐에 그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지만, 그녀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를 발표하면서 플라비우스의 군사전략을 비판하는 평화의 여전사가 되어“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외치며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말을 비웃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는 그녀의 주장을 역으로 거슬렀습니다. 그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지 10년이 체 되기 전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4년간 지속하여 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이나 전쟁이 아닌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세상은 언제나 악한 인간의 욕망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무장 강도가 인질의 생명을 위협할 때 강도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할 것을 종용해야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상황을 대비하여 동시에 무력으로 강도를 제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언제나 일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후의 방법이어야 하지만 전쟁 준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극단적 평화주의입니다. 극단적 평화주의는 잘못된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실수로 저지르는 폭력이나 전쟁을 평화적 설득으로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악하다면 평화적 설득에만 의존할 수 없고 폭력적 억제의 방법을 병행해야 합니다. 인간 역사에서 평화적 설득을 무시하여 폭력 지상주의로 인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인간의 악을 강제와 폭력으로 억제하여 나름의 불완전한 평화를 유지하여 인류에게 이바지한 예도 무수히 많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보지 않고 철저히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악하고 무능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이 선을 행하기에 완전히 무능한 존재인 인간에게 선과 의를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순종하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남부 국경을 열어놓은 것은 결코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없고 평화주의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성은 극단적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미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감성을 뒤로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냉정하게 인간의 수준과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인간 감성에 호소하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은 감성을 따라 판단하여 화를 부르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를 부르짖으며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은 현실을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직시하여 내린 판단이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는 감성적 대응이라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베트남 작가 바오닌이 그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서 한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한 말을 좋아한다며 극단적인 남북 대치 현실에 대하여 평화적 정책으로 일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왜곡이며 오해이고 국가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은 작가가 전쟁과 평화를 대비하여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지만, 그 말을 대한민국 안보정책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과 평화는 개념의 논리상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 둘이 구분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전쟁 중에도 있을 수 있고, 평화가 전쟁을 부르기도 하고, 전쟁이 평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현실을 극복한 이상적인 국가는 존재한 적이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한 국가의 안보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통치자가 문학적 감성으로 안보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고 그것을 묵인하는 관료들이나 국회의원이나 모든 국민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바오닌의 이 말에 동의하는 24명의 세계 13개 나라 작가들이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위기 상황을 대화로 해결하라고 호소문을 발표한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평화를 위한 긍정적인 역할로 받으면 될 것입니다. 국가 안보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상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입니다. 문학가들의 평화에 대한 호소나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직접적인 군사전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주님은 평화의 왕이시지만 기독교가 모든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더 나쁜 상황을 막기 위함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전쟁을 통해 불안전한 평화를 이루고 지켜낸 경우는 무수히 많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평화는 있을 수 없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방법을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도 안 되며 동시에 평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전쟁에 대비하는 것도 모든 국가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정당하고 이상적인 이론이라도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은 이론이라면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이고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역설이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핵폭탄을 만드는 목적도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선한 의도대로 안 될 가능성의 위험이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성실하고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평화주의가 전쟁을 억제하고 예방한 것보다 철저한 전쟁 준비가 전쟁을 억제하고 예방한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역사의 종말의 순간까지 전쟁의 위험과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하지만 극단적인 평화주의자가 되어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28-3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평화를 얻기 위한 전쟁 준비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 국제 정치학에서도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플라비우스의 군사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평화를 얻고 지키는 인간의 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플라비우스의 군사전략을 극도로 싫어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여류 소설가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는 1889년에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Die Waffen nieder!)》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평화주의 운동가가 되어 1905년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1891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평화주의 기구를 설립하여 활동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평화주의 운동은 헨리 토머스 버클과 허버트 스펜서와 그리고 찰스 다윈의 저서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1주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노벨의 비서로 고용되었던 인연으로 노벨이 사망한 1896년까지 노벨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노벨이 노벨상에 평화 부문을 포함시키도록 영향을 끼쳤고 190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오스트리아 화폐에 그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지만, 그녀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를 발표하면서 플라비우스의 군사전략을 비판하는 평화의 여전사가 되어“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외치며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말을 비웃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는 그녀의 주장을 역으로 거슬렀습니다. 그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지 10년이 체 되기 전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4년간 지속하여 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이나 전쟁이 아닌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세상은 언제나 악한 인간의 욕망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무장 강도가 인질의 생명을 위협할 때 강도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할 것을 종용해야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상황을 대비하여 동시에 무력으로 강도를 제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언제나 일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후의 방법이어야 하지만 전쟁 준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극단적 평화주의입니다. 극단적 평화주의는 잘못된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실수로 저지르는 폭력이나 전쟁을 평화적 설득으로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악하다면 평화적 설득에만 의존할 수 없고 폭력적 억제의 방법을 병행해야 합니다. 인간 역사에서 평화적 설득을 무시하여 폭력 지상주의로 인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인간의 악을 강제와 폭력으로 억제하여 나름의 불완전한 평화를 유지하여 인류에게 이바지한 예도 무수히 많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보지 않고 철저히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악하고 무능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이 선을 행하기에 완전히 무능한 존재인 인간에게 선과 의를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순종하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남부 국경을 열어놓은 것은 결코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없고 평화주의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성은 극단적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미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감성을 뒤로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냉정하게 인간의 수준과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인간 감성에 호소하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은 감성을 따라 판단하여 화를 부르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를 부르짖으며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은 현실을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직시하여 내린 판단이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는 감성적 대응이라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베트남 작가 바오닌이 그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서 한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한 말을 좋아한다며 극단적인 남북 대치 현실에 대하여 평화적 정책으로 일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왜곡이며 오해이고 국가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은 작가가 전쟁과 평화를 대비하여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지만, 그 말을 대한민국 안보정책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과 평화는 개념의 논리상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 둘이 구분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전쟁 중에도 있을 수 있고, 평화가 전쟁을 부르기도 하고, 전쟁이 평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현실을 극복한 이상적인 국가는 존재한 적이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한 국가의 안보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통치자가 문학적 감성으로 안보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고 그것을 묵인하는 관료들이나 국회의원이나 모든 국민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바오닌의 이 말에 동의하는 24명의 세계 13개 나라 작가들이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위기 상황을 대화로 해결하라고 호소문을 발표한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평화를 위한 긍정적인 역할로 받으면 될 것입니다. 국가 안보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상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입니다. 문학가들의 평화에 대한 호소나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직접적인 군사전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주님은 평화의 왕이시지만 기독교가 모든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더 나쁜 상황을 막기 위함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전쟁을 통해 불안전한 평화를 이루고 지켜낸 경우는 무수히 많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평화는 있을 수 없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방법을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도 안 되며 동시에 평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전쟁에 대비하는 것도 모든 국가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정당하고 이상적인 이론이라도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은 이론이라면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이고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역설이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핵폭탄을 만드는 목적도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선한 의도대로 안 될 가능성의 위험이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성실하고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평화주의가 전쟁을 억제하고 예방한 것보다 철저한 전쟁 준비가 전쟁을 억제하고 예방한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역사의 종말의 순간까지 전쟁의 위험과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하지만 극단적인 평화주의자가 되어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28-3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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