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성 목사 웨일즈 방문기 (2) 하노버교회(토마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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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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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웨일즈 하노버교회는 한국 최초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로 그의 희생이 평양대부흥 등 한국교회 성장의 씨앗이 되었음을 되새기게 하며 CRC 총회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선사했다.
39회 CRC 한인목회자협의회(Korean Ministers Association: KMA) 총회/컨퍼런스가 2025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영국 웨일즈에서 열렸다.
웨일즈에서 만난 순교 신앙의 발자취, 하노버교회
CRC 총회 참석자들은 이 기간 중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모교회인 하노버교회를 방문하여 그의 순교 신앙을 기리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이번 방문은 참석한 목회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적 도전을 안겨주었다.
하노버교회는 한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주성 목사에 따르면 이 교회는 1644년에 설립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를 배출한 곳이다. 그의 신앙적 뿌리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있게 된 영적 근원을 되짚어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성장과 소명
토마스 선교사의 부친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7년부터 37년간 하노버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백의흠 목사는 토마스 선교사가 9살 때부터 이 교회에서 신앙 안에서 성장했다고 전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16세 때부터 모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정도로 비범한 면모를 보였다고 정 목사는 덧붙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 등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대학 졸업 후 신학과정을 마치고 1863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하노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캐서린 조 CRC 목사는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도유망한 목회자로 주목받던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목회자였던 것이다.
모두의 기대를 받던 토마스 선교사는 그러나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부유한 집안의 딸 캐롤라인 고다드와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선교사의 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백의흠 목사와 캐서린 조 목사는 이 여정이 사실상 신혼여행과 같았다고 언급했다. 이는 그의 헌신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련과 조선을 향한 꿈
그러나 상하이에 도착한 지 불과 서너 달 만에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풍토병으로 태중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는 큰 아픔을 겪었다. 정주성 목사와 백의흠 목사, 캐서린 조 목사 모두 이 비극적인 사건을 언급하며, 토마스 선교사가 겪었을 깊은 슬픔과 절망을 헤아렸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은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선교 사역을 포기하려던 순간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는 우연히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 산둥성으로 피난 온 두 명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정 목사는 전했다. 캐서린 조 목사 역시 그가 조선 상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조선 땅으로 가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위해 조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통역 겸 안내자로 배에 올랐다. 그렇게 그는 꿈에 그리던 조선 땅, 대동강변에 이르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제너럴 셔먼호와 조선 관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배는 불타고 말았다.
순교의 현장과 그 열매
배에서 겨우 육지로 상륙한 선원들은 조선 관군에 의해 참수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토마스 선교사 역시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정주성 목사와 백의흠 목사는 그가 칼날 앞에서도 "여러분 예수님 믿으십시오. 여기 예수님의 말씀이 적힌 성경을 바치니 읽어보고 존귀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치며 가져온 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뿌린 성경책은 헛되지 않았다. 그를 참수한 조선 관군 박춘권과 당시 열두 살 소년이었던 최치량, 그리고 박영식 등 많은 이들이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특히 박춘권은 훗날 예수를 믿고 평양 지역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이는 장대현교회의 설립과 평양 대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세 목회자는 한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주성 목사는 토마스 선교사의 어머니가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교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내 아들을 목 베어 죽인 민족이지만,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조선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했다고 전했다. 이 기도는 한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놀랍게 응답되었다.
순교의 피, 부흥의 씨앗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약 40년 후인 1907년, 평양에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정 목사는 이것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라는 씨앗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했다. 그의 희생이 한국 교회 부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백의흠 목사는 토마스 선교사뿐 아니라 수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젊음, 아내, 어린 자녀들까지 한국 땅에 묻으며 복음을 전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덕분에 우리가 복음을 알고 구원받았다"며 "눈물 나도록 감격스럽고 고맙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그 작고 오래된 하노버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귀하다고 평가했다.
참석자들의 감동도 이어졌다. 박명애 사모는 "토마스 선교사님의 가족을 통해 조선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내가 그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 백성이 된 축복의 현장을 직접 방문한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전했다. 윤원환 목사는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들던 시기에 순교적 사명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고, 또 실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님의 행적을 볼 수 있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정 모 선교사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하노버교회 담임은 한국인 선교사
오늘날 하노버교회는 세월의 흐름 속에 다소 낡고 초라한 모습일 수 있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복음의 열정은 한 청년 순교자를 통해 바다를 건너 한국 땅에 심겨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현재 한국인 선교사인 다니엘 유 목사가 하노버교회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 놀라운 섭리의 연결고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신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일깨워준다. 그의 헌신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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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성 목사 웨일즈 방문 시리즈
정주성 목사 웨일즈 방문기 (2) 하노버교회(토마스 선교사)
정주성 목사 웨일즈 방문기 (7) 옥스퍼드 위클리프 홀
정주성 목사 웨일즈 방문기 (8)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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