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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가 잘못 가르친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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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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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가 잘못 가르친 성탄절 

-청소년 교회 교육을 다시 생각한다- 

 

교회 교육에서 절기 교육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절기 교육은 주로 일회성 혹은 연례행사처럼 판에 박힌 모양과 내용으로 치러지곤 한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절기 장식은 물론, 서구풍의 구유 장식, 성탄 트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성경과 거리가 먼 풍경이 변함없이 펼쳐진다. 익숙한 연례행사로서의 성탄맞이가 아닌 성경이 말하는 성탄의 의미를 오늘에 재적용하는 도전의 시간으로 성탄절 행사를 준비할 수는 없을까.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해 마다 성탄절이 되면 언제나 등장하는 친숙한 그림이 있다.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 계시고 그 주변에 말을 비롯한 양과 몇 마리 가축들이 마리아, 요셉과 함께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목자들과 화려한 옷을 입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둘러서 있다. 배경이 되는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있다. 그야말로 화이트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성경 읽기가 아닌 사실적인 성경 읽기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성탄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자.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베들레헴 말구유요.”

이 것은 정확하게 틀린 대답이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적도 없을 뿐더러, 우리가 생각하는 구유에 누워계셨던 것도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눅 2:7)라고 적고 있을 뿐이다. 오해를 풀기 위하여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 현황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베들레헴 인구는 최대 300명 정도였다.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은 거주 인구가 최대 3만 명이 되지 않았다.

 

‘구유’ 이것은 일반 가정이나 숙박업소의 마구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 외양간도 아니다. 베들레헴에서는 말이나 소를 키우지 않았다. 양이나 염소가 일반적이었다. 드물게는 나귀가, 아주 드물게는 낙타가 있었을지 모른다. 양이나 염소 우리는 울타리만 쳐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겨울철을 대비하여 종려나무 잎과 흙을 이용한 지붕을 씌운 우리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에는 천장이 없었다.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눅 2:8)던 상황을 떠올리면 예수님의 탄생 시기는 눈 내리는 겨울철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목자들은 주로 들판에서 생활을 한다. 목자라고 모두가 자영 목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예수님 탄생을 전후한 시기에는 고용 목자 즉 삯꾼 목자들이 더 많았다. 예루살렘의 돈 있는 이들의 가축을 키우던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겨울철이 아니면 들판에서 꼴을 뜯기면서 양과 염소들과 함께 생활한다. 야외에 머물다가 비라도 지나가거나 추워지는 시간이면 몸을 피하고, 양이나 염소 등을 숨기는 공간들이 있었다. 석회암 산지에 생긴 자연 동굴 등이었다. 이런 공간은 때로는 추위를 피하거나 하룻밤을 지새울 수 있는 쉼터가 되기도 했다. 오갈 데 없었던 예수님 일행이 이런 공간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마리아와 요셉에게 나귀는 없었다

 

요셉이 만삭이 다 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장면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자가용이 없었다. 오늘날의 자동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나귀와 말, 낙타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말이나 나귀가 끄는 수레가 더해질 수 있겠다. 당시 나귀는 고급 승용차에 해당했다. 흰 나귀는 아무나 탈 수도 없었고 지체 있는 이들의 소유였다. 평범한 서민들의 교통수단은 두 다리였다. 

 

마리아나 요셉 모두 ‘깡촌’ 나사렛 사람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들 말한다. 깡촌에서 사는-최소한 당시 거주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고려하면-사실혼 상황도 아닌 가난한 부부가 나귀를 타고 베들레헴까지 오갔을 가능성은 없다. 마리아의 친인척인 사가랴가 제사장 집안이라고 하여 부자였을 것 같지도 않다. 부자였다고 한들 제사장이 사용하는 업무용 나귀도 개인 소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가랴 집안이 마리아에게 나귀를 빌려 줬을 가능성 또한 없다.

 

마리아와 요셉은 걸어서 일주일 넘는 거리를 움직였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족장로’로 부르는 사마리아 산지 길과 유대 산지 길을 따라 이동했을 경우의 소요 시간이다. 그렇지만 당시 보편적으로 유대인들이 이 길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족히 편도 2주는 걸렸을 것 같다. 어쨌든 이들은 걸어서 베들레헴으로 향했을 것이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세례 요한이 출생한 예루살렘 근교의 사가랴 집(오늘날의 엔케렘)을 찾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

 

예수님 당시 자녀들은 ‘누구의 아들’로 불렸다. 성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하여 지역 연고나 가족 연고를 이름에 덧붙이곤 했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릴 때는 당연히 아버지 아무개의 아들로 불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 예수로 불렸다. 이것은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의미였다.

 

동방박사 세 사람?

 

성극을 할 때면 으레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이들 가운데 목자들과 동방박사가 동시 출연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이 이야기를 풀어 보자.

1) 동방박사들은 박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점성술사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예루살렘으로 유대인의 왕을 찾아 나섰다. 동방, 오늘날의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비행기로도 2시간 안팎이나 걸린다. 아마도 3개월 안팎이 걸렸을 이 장거리 여행에 이들은 낙타를 타고 이동하였다. 다른 교통수단은 불가능했다.

 

2) 동방박사는 모두 몇 명이었을까? 흔히 3명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3명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한 성경 교육을 하려 한다면 그냥 ‘동방박사들이 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언제일까? 그거야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아닌가?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서는 헤롯이 박사들을 만난 시점 등을 기준으로 하여 베들레헴 주변 지역의 두 살 이하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박사들이 예수님 탄생일에 베들레헴에 들어왔다면 헤롯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 그때를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예수님 일행은 헤롯의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이집트(애굽)로 들어가기까지 베들레헴 지역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발견한 시점부터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던 때까지는 2년여의 시간이 있었다. 이 기간 중 많은 시간은 동방박사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베들레헴까지 오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최소한 동방박사들은 예수님 탄생 1년은 족히 지났을 시기에 베들레헴을 찾았을 것이다.

 

4)동방박사는 별 따라 오지 않았다

동방박사는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까지 온 것이 아니다. 별을 발견(관측)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계산하고 판단하여 예루살렘으로 온 것이다. 동방에서 그들이 본 별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문득 다시 나타났다고 성경은 적고 있다(마 2:9). 별에게 끌린 이들이 정작 별의 인도를 받아서 갔던 구간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길어야 8킬로미터 정도였다.

 

맺는 말

 

예 수님은 아비 없는 자식처럼 태어났다. 그의 탄생을 함께해 준 이들은 유대 땅에서는 사회적으로 왕따 대상이기도 했던 목자들, 고용된 목자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 그것도 종교적, 인종적으로 유대인과는 상종할 수 없는 존재였던 페르시아의 종교인들이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요 1:1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이런 복음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종교나 인종 등 수많은 이유로 막힌 담이 존재하는 그 시대에, 막힌 담이 깨진 자리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담긴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과 다르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익숙한 성경 읽기를 넘어서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성경을 다시 보도록 하는 훈련이 교회 교육에 주어졌으면 한다.

 

성탄절을 성탄의 의미를 느끼고 나누는 중요한 절기로 맞이할 수는 없을까? 이번 성탄절에는 세계지도(최소한 중동 지도)와 당시의 탈 거리, 먹을거리, 입을 거리 등을 잘 소개하면 좋겠다. 입체적으로 지형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구글 어스도 활용하고, 예수님 시대 생활 풍습을 담은 시청각 교재나 1세기 전후한 시대의 로마제국이나 팔레스타인, 페르시아의 문화 관련 동영상도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의 탄생은 시공간 속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해석이 없는 ‘재현’하기를 넘어서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성탄의 의미를 현재의 자리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교육이 이뤄지면 좋겠다. 의례적인 이웃 돕기 활동을 넘어서야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장식들을 제거해 보라. 아이들이 때로는 교회 어른들이 문제 제기를 할 것이다. 그때 그 질문을 성탄의 의미를 나누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가 아닌 ‘왜’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빠진 마스(축제)부터 돌아보자.

 

김동문 (목사, 본지 중동지역 모니터)

ⓒ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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