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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말로만 아닌 보여주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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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8-04-2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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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세의 원로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뉴저지목사회와 러브뉴저지가 공동주관하여 4월 17일(화) 오전 뉴저지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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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는 세미나를 통해 나이가 들어야 보이기 시작했다는 디모데 후서를 풀어나갔다. 디모데 후서 4장을 1시간 반도 안되는 시간에 강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연약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디모데 후서 말씀을 유언처럼 전한 것처럼, 홍정길 목사는 흔들리는 개신교의 위상과 세상의 도전속에서 고전분투를 하고 있는 후배 목사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의 목회를 나누고 싶어했다.    

 

그리고 세미나를 마치며 한 “주님,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이 목회현장에 있는 부끄러워하고 심약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유언의 말씀 앞에 우리가 섰습니다. 저는 얼마 안있다 주님께 가지만 여기 머리 숙인 주의 종들은 상당기간 주님께 순종하며 믿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디모데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교훈하시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종들을 인도해주시고 축복해주셔서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는 그날까지 승리의 길을 걷는 종들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 속에  팔순을 앞둔 노 목사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다음은 전편에 이어 이어지는 세미나 내용이다. 세미나를 통해 홍정길 목사는 온갖 좋은 단어는 다 있는데 실재가 없는 - 사랑의교회라고 하면서 매일 싸우는 사랑을 하며, 밤낮 갈라지는 연합교회를 지적했다. 목회초기 미워하는 교인들 때문에 어려웠던 경험을 나누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소개했다. 또 코람데오가 그냥 신학용어나 신앙의 슬로건이 되어 말을 전달하지만 도저히 그 긴장과 겸허함은 없는 경우를 경고했다. 제자훈련의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스승 없이 제자가 안 생긴다며 한국의 제자훈련도 옥한흠 목사가 있을 때는 됐지만 그 다음에는 스승이 없기에 안된다고 지적했다.

 

[세미나 기사 1] 홍정길 목사 “성도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 앞에 먼저 서라”

http://usaamen.net/bbs/board.php?bo_table=data&wr_id=8164

 

그리고 우리들이 가져야할 3가지 마음을 그 다음에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1.

 

첫째, 능력을 구하고 있다. 두나미스이다. 그런데 앞과 뒷 문장을 콘텍스트로 본다면 ‘담대하라’고 번역이 가능하다. 두려움에 대해 담대하라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주신 사건은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을 통해서이다. 디모데의 삶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너무 제한적이라 다 설명이 안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을 가진 다윗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을 때 어떻게 두려움 앞에서 담대한가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이 거인 골리앗의 앞에 두려움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이 나선다. 왕이 갑옷을 주었지만 어른의 갑옷을 입을 수도 없는 어린 소년이 갑옷을 던져버리고 그리고는 자기가 믿었던 하나님만 의지하고 늘 손에 붙잡은 막대기 하나하고 시냇가에서 주은 돌멩이 5개를 들고 앞으로 나간다. 그때 어린 소년은 너는 칼과 창으로 나오지만 나는 내가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늘 익숙하게 사용하던 물맷돌을 던졌다. 그 돌멩이는 토마호크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리고 골리앗이 쓰러질 만큼 강력하게 날아가 골리앗을 쓰러트린다. 담대하라. 우리는 그 사실을 앞에 두고 주님의 음성 앞에 선다.

 

요한복음 16장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환란이 끝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가 끝나는가 하지만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다른 문제가 밀려온다. 어제 끝나는 것 같지만, 이것만 되면 끝날 것 같지만 꼬리를 물고 파도처럼 환란이 이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환란이 끝나는 날이 있지만 그 때는 내 호흡이 멎을 때이다. 그전에는 절대로 환란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그 환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만 섬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실재였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말씀 말씀하면서 말씀의 실재는 없다. 온갖 좋은 단어는 다 있는데 실재가 없는 것이다. 사랑의교회라고 하면서 맨날 싸우는 사랑이다. 미국오니 밤낮 갈라지는 연합교회라는 말도 한다. 못된 소문으로 가득찬 성도교회도 있다. 말씀이라는 것은 그 말씀에 팩트가 있어야 말씀이다. 컵이라는 말은 실제 이 컵이라는 사물이 없으면 소리이다. 주께서 믿음의 사람을 통해 사랑을 정의하면서 크리스찬에게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꽹과리라고 하셨는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신학교 교수의 개념이나 온갖 멋진 말은 계속 양산해서 말만 새롭게 표현되지 개신교가 교회가 아무것도 바꾸어지지 않는다.

 

말씀이 실재가 아니면 사기이다. 말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기꾼이라고 한다. 누가 제일 잘 아는가? 자신들이 제일 잘 안다. 교회에 가면 온갖 좋은 소리를 다 하는데 부모들을 보면 전혀 아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팩트가 아니라며 교회를 떠난다. 이 문제가 해결 안되면 자식을 교회로부터 다 잃는다. 교회에 자비가 있는가? 교회에 긍휼이 있는가? 교회에 선함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친히 말씀하신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두려워하는가? 내가 해결도 못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그래서 목사님들이 먼저 세상의 어려운 문제나 환란에 대해 담대해야 한다. 그것이 실재가 되면 교인들이 놀랜다. 설교만으로는 안된다. 말로는 사람이 안 바뀐다. 보고 놀라는 것이다. 보여주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말로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보고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주셨다. 사도 바울 앞에서 너는 이겼다는 선언이 있었다. 그런데 다윗이 먼저 이겼다. 시냇가에서 돌멩이 5개 주어서 1개를 사용했다. 2개를 쓸 필요도 없다. 너는 이기느리라.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담대하면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 목사님들의 삶속에서 이 말씀을 붙잡고 세상을 향하여 승리하라. 많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몸부림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명령 앞에 담대하라. 나는 담대할 능력도 지혜도 경륜도 없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담대하라. 

 

2.

 

둘째, 나에게 붙여준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2개가 갈라졌는데, 태극기 집회과 촛불 집회에 가는 사람들로 교회들이 갈라져있다. 그런 입장도 주장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갈라지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정 입장에 섰기에 자기 입장에 서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동성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동성애는 싫지만 그러나 동성애자를 증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는 다르다. 또 살인과 테러 집단이라고 하면서 무슬림들을 증오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때에도 사랑의 모습이 우리 속에서 빠지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여주신 모습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글자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내속에서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가 아무리 좋은 주장과 아무리 멋진 이야기를 해도 그렇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다. 다윗의 생을 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며, 백전백승의 용장이며, 역사적으로 가장 부자였다. 돈이 많고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하면 다른 쪽이 발전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다윗은 문학가 중의 문학가였다. 또 다윗은 연주로 사람을 치유하는 수준이었다.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옆의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니 독불장군이고 괴팍해 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윗은 요나단과 역사상 가장 멋진 교제를 했다. 그보다 멋진 우정을 보신 적이 있는가?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 다윗은 요나단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이 많았던 요압도 끝까지 사랑한다. 다윗의 부탁을 듣지 않고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죽인 요압을 살아 생전에 끝까지 옆에 두고 살아간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이 되면서 죽임을 당했지만 다윗은 끝까지 사랑하려고 했다.

 

교회에서도 그렇다.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3년 동안 좀 힘들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여 하도 힘들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그랬는지 나중에 교회를 나갔다. 그런데 그 자리를 그보다 2배나 힘든 사람이 차지했다. 그래서 다음부터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지만 목자로 하나님이 세워주셨으니 내가 잘하지는 못해도 주의 말씀 따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고 다음 40년 동안 평화가 있었다. 은퇴할 때까지 정말 재미있게 목회를 했다.

 

교회와 당회 운영을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게 형제들이 모여서 오순도순 지냈다. 단지 처음 3년이 어려웠다. 교인들이 나를 향해서 기대가 있다가 홍정길은 멍청하다고 인정한 다음부터 시비를 안건다. 그래서 목사들은 교회를 옮기면 처음 3년을 조심해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 목사가 어떤 분인가 모르기에 부족하면 요구를 한다. 그런데 그 요구가 안되고 나중에 우리 목사는 이런 분이라고 포기하면 그때부터 평화가 있다. 그것만인가? 끝까지 사울을 용서하고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다. 증오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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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큰 질병중의 하나가 증오이다. 증오하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못되게 하는 것은 그 분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증오가 있다는 것는 누구보다 먼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증오를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한번 기도해 놓고 기도했다고 그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계속 기도하라. 정말 미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사랑이 되어진다. 그 사람은 안 바뀌어도 내가 바뀌면 그만큼 승리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주변에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권면한다. 지금 교회 안에서 미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라. 미움의 독을 품고 있는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이다.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면 나한테 저렇게 고통을 주겠는가 하면서 기도하라. 내가 달라지면 저들이 달라진다. 하나님은 변화를 나로부터 주시는 것이지 그 사람부터 주신다면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그 사람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이 또 온다. 그런데 내가 변화하면 그것은 이긴 것이다.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또 와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주신 영혼들을 사랑하는 목회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이 믿음의 진정한 유산으로 목회현장에서 가져야 할 마음을 1장에 기록했다.

 

3.

 

셋째는 나를 향해서 셀프 콘트롤 하라는 것이다. 이전 성경에는 ‘절제’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헌신하는 마음’ 또는 ‘조심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은 대부분 자기 마음을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조심하는 원칙을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성경 전체에서 다윗만큼 한사람의 생애를 다 기록한 사람은 없다. 주로 사람들의 겉모습을 기록하는데 다윗은 내면까지 기록된 사람이다. 시편 100여 편을 통해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내면이 보인다. 성경을 통해 다윗 인생이 통째로 설명되어 진다. 그런데 그 위대한 다윗이 그 위대한 성공과 축복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살았던 원리는 그가 3번이나 자기 생애를 회고하면서 나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기에 베들레헴 들녘에서 부르셔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라고 한 부분이다. 자기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그때를 마지막 임종 때에도 주변과 자식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선 그 첫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우리는 조금만 잘해 칭찬을 받으면 그 칭찬으로 살지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그 첫 번째 만나주심의 감격을 놓친다. 내가 무슨 소득을 가지면 그 소득을 보다가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영광스러운 날을 놓치고 산다.

 

그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감격을 계속 가지면 그 앞에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믿음의 롤모델중 한 분인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다메섹 도상 이야기를 계속 반복한다. 조금만 크면 당신이 시작해주었지만 내가 오늘 스스로 이만큼 컸다고 말한다. 빌하이벨스 목사도 그런 사람에게 건방을 떨지 말라고 지적을 했다. 미국 대교회 목사들이 대개 그런 증상이 있다. 한국은 더하다.

 

다윗은 자기 성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그 앞에 항상 서 있으려고 자기를 다짐한 믿음의 사람이다. 이것이 다윗이 무너지지 않고 인생에 실패와 여러 번 죽을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오직 주의 목전에서만 주를 위하여 싸운다고 한다. ‘코람데오’라는 것이 그냥 신학용어가 되어서는 안된다. 코람데오라는 말을 전달해놓고 도저히 그 긴장과 겸허함은 없는 채 오히려 그것이 신앙의 슬로건이 되어서 자기흠양처럼 말을 하고 실제적으로 내면은 그러지 못한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어디서 단어하나 배워 코람데오라는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계속 말하는 사람치고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영혼들에 향해서는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 속에 독침이 있어서 안된다. 혹시 있다면 독침을 뽑아 버려라. 그리고 나를 향해서 하나님 앞에 조심하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한평생 목회자로 사는 가장 중요한 첫째 메시지이다, 

 

4.

 

디모데 후서 2장에 가서는 네가 일하는 방법은 이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네 자리를 살피라는 것이다. 은혜 안에 있을 때만 네가 강하다는 것이다. 은혜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못하다. 은혜 안에 있으면 그분의 보호와 은총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를 보아야 한다.

 

둘째, 충성된 사람을 찾아서 복음을 부탁하라고 한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무슨 뜻인가?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기셨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충성했던 그 충성을 가지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양 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순종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그 그리스도를 충성되이 자기가 섬겼다. 그 충성됨을 바통 터치했으니 너도 충성된 사람을 찾아서 복음을 부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충성된 사람이 다른 충성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바통 터치의 루트가 충성이다. 돈 많은 사람이 아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이다. 역사는 충성된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지 머리 좋은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충성은 세미나에서 못 배운다. 충성은 본으로만 전수가 가능하다.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에 있다. 제자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는 말을 아무도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좋은 것이다. 너희가 이 말씀대로 충성하라”고 하지만 자기는 상관없이 산다. 제자훈련이 그랬다. 스승이 없는 제자훈련이 어떻게 되겠는가? 제자가 어디서 나오는가? 스승 없이 제자가 안 생긴다. 스승 없는 제자훈련이 지난날 미국의 제자훈련이었다. 한국의 제자훈련도 거의 똑 같다. 옥한흠 목사가 있을 때는 됐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안된다. 스승이 없는데 되겠는가?

 

그러면 어디까지 충성된 사람인가. 얼마나 많은 교인들을 양육했는가 하는 것 보다 있었던 사람들이 충성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1천년 전에 누가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는지, 누가 가장 큰 교회 목회했는지, 누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인지 모른다. 하지만 거름뱅이 몇명 데리고 다닌 프렌시스는 안다. 앞으로 100년 후에 한국교회는 100년 전에 어느 목사가 있었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몇 사람 데리고 충성된 증인으로 살았던 그루터기는 한국교회를 살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의 도약대가 될 줄 믿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충성된 사람을 통해 이루신다.

 

5.

 

그러면 그분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디모데 후서 3장을 보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고 말한다. 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한다. 이 복음 안에 들어있는 이 4가지의 목적으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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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다고 말로만 끝이다. 그렇게 한국교회가 반쪽만 가르쳤다. 제자훈련도 말만 온전케 된다고만 했다. 그런데 안되었으면 가짜이다. 약은 원리 때문에 약이 아니라 먹어서 병이 완치되는 증거가 생겨야 약이다. 증거가 없는 약은 가짜이다. 우리들은 온전케 된다고만 말만했지 된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온전한 사람이 되면 온전한 일을 한다. 지금까지 일해 오면서 재미있던 원리중 하나는 좋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장소이다. 손해 보는 곳에는 돈보다 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 온다. 그리고 손해 보는 곳은 귀신같이 나쁜 사람은 안 온다. 신기하다. 손해를 보지만 그 가치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들, 그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 물론 좋은 사람들이 모여도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은 그 실수와 실패를 도약대로 삼아 더 업그레이드된다. 그런데 나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좋은 일을 한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것 가지고 더 나쁜 악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온전케 된 사람은 온전한 일을 기필코 해 낸다. 그래서 내 목회의 목표가 여기라고 말한다. 

 

6.

 

그리고 디모데 후서 4장에서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고 하신다. 내가 그 상급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다.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홍 목사는 상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없다. 절대로 없다. 홍 목사는 다시 태어나면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물어보기도 하는데 다시 태어나기 싫다고 대답한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살았는데 다시 살아도 자신이 없는데 안하겠다고 대답한다. 어쩌다가 은혜로 여기까지 떠밀려 살았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된 것인데 어떻게 내가 다시 선택한다 말인가? 인생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살기 싫다고 한다.

 

그런데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상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누구보다 잘안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은 것은 자격이 있어서 받았는가? 자격이 있어 구원받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놓으시고 그 구원의 은혜가운데 살다가 그 은혜도 감당을 못하는데 상을 주신다는 것, 그런데 주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시니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못하니 그 앞에 나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똑 같이 상을 주시는 것을 믿어야 믿음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다윗도 사도바울도 베드로도 상급을 바라보고 달렸다. 자기들도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은 똑 같을 것이다. 그런데 자격없는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기에 비록 자격이 없지만 약속하신 상을 바라보며 전력질주하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 주변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초점이 된다. 상을 주님 앞에서 기대하라. 이 세상에서 목회하면서 보상을 바라보는 자는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상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달리면 내 형편에 맞도록 충성하는 나를 향해 상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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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응렬 목사 “뉴노멀 시대의 5가지 새로운 방향” 2021-02-23
김정호 목사 “코로나 먹구름 속 ‘실버 라이닝’”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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