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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교수 ②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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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감리교회(UMC) 한인총회 2014 총회에서 4월 30일(수) 오전 이원규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가 "21세기 세계 기독교 지형의 변화와 특징"과 "21세기 기독교 영성과 선교적 과제"라는 제목의 전체 강연을 연속으로 진행했다. 강연의 내용은 이 교수가 2012년 낸 저서인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21세기 기독교 영성>의 내용이 중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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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하는 이원규 교수

두 강의는 서로 연관된, 강의 1의 원인을 강의 2에서 자세히 풀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진행된 "21세기 세계 기독교 지형의 변화와 특징"라는 강연에서 세계의 기독교가 서구에서 3세계로 변화하고 있으며, 머리 종교의 몰락과 가슴 종교의 부흥을 소개했다. 두번째 강의에서는 머리 종교와 가슴 종교를 더욱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첫째 강연 소개에 이어 "21세기 기독교 영성과 선교적 과제"라는 제목의 두번째 강의내용도 소개한다.

21세기 기독교 영성과 선교적 과제

첫 강연에서 교세를 중심으로 한 세계 기독교 지형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기독교가 어떤 대륙에서는 성장하고 있지만 다른 대륙에서는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같은 대륙에서도 국가에 따라 그리고 같은 국가에서도 집단에 따라 기독교가 성장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 혹은 배경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교회의 선교와 성장 가능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비록 서구사회에서 종교의 세속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21세기에 기독교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제3세계와 미국의 일부 기독교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앙적으로 뜨겁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럽을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뜨거운 신앙적 열풍이 기독교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으며, '성령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21세기 영성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새로운 것일까. 과연 세계 기독교는 뜨거워지고 있는 것일까.

머리 종교의 몰락

처음 기독교 초대교회는 체계적인 신학이나 교리, 복잡한 의례나 조직 구조가 없었다. 함께 성령을 체험하고 은사를 경험하며 뜨겁게 신앙을 표출하는 것으로, 서로 소유를 나누고 더불어 사는 것으로, 자신의 확신과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의 종교는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표현하는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영성으로 충만한 가슴의 종교였다. 초대교회 가슴의 종교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4세기부터였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권력과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발적이고 활기있으며 무엇보다 가난한 자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부유하고 힘이 있고 유식한 자의 종교로 바뀌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의 변화를 하비 콕스는 '신앙시대'에서 '믿음의 시대'로의 변화라고 부른다. '신앙의 시대'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의 희망을 품고, 그가 시작한 운동을 활기차게 추진하는 것이라면, 믿음의 시대는 '예수에 거는 신앙(Faith in Jesus)'을 '예수에 관한 신조들(Tenets about Jesus)'로 대체하여 한 다발의 필수적인 믿음의 조목들에 집착하는 교권주의 시대라는 것이다. 하비 콕스에게 '신앙(faith)'은 신앙의 대상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를 투신하여 삶의 방향을 결단하는 처신이라면, '믿음(Belief)'은 단지 교리나 신조 따위를 참이라고 승인하는 머리 속의 지적 작용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기 기독교는 머리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처음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감성적 열정적 경험적 신앙의 차원이 사라지고, 성령이나 은사라는 것도 교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버렸다.

개신교의 종교개혁도 이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개신교 안에서도 18세기 영국 감리교처럼 뜨거운 신앙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보다 전형적인 신앙적 성향이나 신학적 입장은 매우 지성적인 것이었다. 카톨릭과는 달리 성서와 믿음과 은총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모든 것들은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머리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유럽 개신교에 보다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경건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서구 기독교가 이성과 지성의 종교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근대사상의 중심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있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뿌리는 19세기 전후 학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구 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로 자리잡게 된 것은 20세기 초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신학자들은 루돌프 볼트만, 디트리히 본회퍼, 폴 틸리히 등이다.

자유주의 신학 대가들의 영향을 받고 급변하는 사회상황을 겪으면서 196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의 신학계에서는 자유주의 열풍이 불게 되었다. 그 흐름은 크게 4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세속신학이다. 세속신학은 세속사회에서 기독교는 세속적 사상과 가치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역사적 예수 연구이다. 이 연구는 예수를 열심히 추종하던 사람들의 예수운동이 처음부터 '예수의 비전'을 바라보는 대신에 '그 비전을 지녔던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예수의 이야기(the story)'가 아니라 '이야기꾼(the storyteller)'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구원과 진리의 범위를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다루는 종교신학인데 여기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원주의 신학이다. 다원주의 신학은 궁극적인 신적 존재에 대한 인간의 구원적인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급진신학 혹은 행동신학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진보신학이다. 이 신학의 주제는 자유, 해방, 정의, 평등과 같은 개념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약자와 억눌린 자들을 위한 복음의 메세지를 강조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미국의 흑인신학과 여성신학등이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독교는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성에 근거한 머리의 종교 성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카톨릭과 개신교 주류 교파의 신학, 그리고 그 신학의 훈련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려 온 기독교가 20세기를 마감하며 위기를 맞고 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하던 머리의 종교, 자유주의 신학의 토대위에 세워졌던 지성의 종교, 이성의 종교가 점차 기독교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그대신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기독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일부 미국 기독교도 이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이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기독교가 머리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신학자들의 명제는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성서적, 신앙적 개념은 과감하게 버리거나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번역 모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에서는 저쪽 세상에 관한 것을 이쪽 세상의 말로 번역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으로, 초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종교적 신앙을 윤리적 개념으로 번역하든가, 심리학이나 정치적 혹은 이데올르기적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의 문제는 자기 소멸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대적 세계관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 언어도 포기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머리 종교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지성적인 현대인에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전통 기독교 신앙은 상품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상품을 바꾸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 탄생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신앙을 거부하거나, 자연적이고 내재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현대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월적 신앙을 맞바꾸는 것에 대하여 버거는 '밑지는 거래'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대인의 합리적인 세계관에 맞추기위해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신앙 요소를 하나둘씩 포기하면서, 기독교는 내세울 것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원래 종교의 근원적인 본질은 '성스러움'으로, 여기에는 초월적 초자연적 신비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성스러움은 머리로 그려지는 합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지는 경험적인 느낌이다. 따라서 유럽 기독교와 미국 주류 교파 쇠퇴의 결정적인 요인은 기독교의 경험차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특히 과학이 발달되고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를 받는 서구 사회에서, 교회 그리고 신학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기위해서는 종교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보면서 종교의 본질인 성스러움의 차원을 기독교에서 제거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독교의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을 제거했을때,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종교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초자연, 초월, 성스러움이 없는 그래서 신비스럽지도 않고 경이롭지도 않은 종교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으며, 사람에게 무슨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결국 이성의 시대에는 머리의 종교가 적합한 것이라는 판단은 틀린 것이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많은 가슴 종교 교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성적인 현대인을 끌어들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비스러움을 상실한 종교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몰락하고 있는 서구 기독교의 머리 종교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점차 세계 기독교의 대세로 잡아가고 있는 비서구 그리고 미국의 가슴종교이다.

가슴종교의 부흥과 기독교 영성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기독교의 흐름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 가운데 하나는 개신교안에서의 복음주의의 부활이다.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역사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개는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이후 미국에서 꽃을 피운 정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뜨거운 신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다음을 강조하는 커다란 개신교 운동을 지칭한다. 권위있고 믿을만한 것으로서의 성서,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업에 대한 믿음, 중생에 의해서만 가능한 구원, 도덕적 행위로 나타나는 영적으로 변화된 삶, 성경읽기와 기도와 같은 개인적 경건, 복음과 선교에 대한 열정. 미국의 복음주의는 18세기 대각성운동 기간 동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여러가지 다른 운동을 수반했는데 뉴잉글랜드 청교도운동, 유럽의 경건주의, 부흥에 초점을 둔 장로교 운동, 침례교의 반체제적 민주주의 정신, 영국의 조지 휫필드의 칼뱅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감리교 운동 등이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복음주의가 주류 기독교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복음주의와 개신교는 거의 동일어가 되었다. 복음주의는 많은 교파적 다양성을 가졌지만, 도덕적 악으로 부터 자유로운 삶에 의해 증거되는 회심 경험을 강조하고, 부흥과 선교를 열심히 촉진하며, 교회를 성서의 권위에 근거하여 세워지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보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시 미국 개신교인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적이었던 반면에 자유주의자는 소수였고, 그밖에 전통주의자로 불리는 성공회, 루터교, 카톨릭 신도들이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선교를 활발하게 수행했고 따라서 3세계에 전파된 개신교는 대부분 복음주의에 입각한 신앙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주류 개신교 교파들에 확산되었으며 복음주의는 위축되었다. 1900년 세계 전체 개신교인의 70%에 달했던 복음주의 개신교인은 1970년 44%로 낮아졌다. 그러나 이후 자유주의 머리종교가 퇴조의 길로 접어들면서, 특히 3세계의 복음주의 열풍에 힘입어 2000년에는 복음주의자가 전체 개신교인의 61%로 늘어났고, 2025년에는 그 비율이 7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복음주의의 부활과 함께 기독교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성령운동의 열풍이다. 원래 성령운동의 기원은 1세기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부터 그런 신앙적 성향은 교회에서 사라져갔다. 오랫동안 잊혀지고 무시되었던 성령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에서였다. 물론 이 운동은 복음주의 전통안에서 있었다. 복음주의의 한 극단이 근본주의라면 다른 극단이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운동 역시 자유주의 신학에 밀려 한동안 주변적 신앙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지난 몇 십년 사이에 놀랍게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성령운동은 감정적, 비합리적, 신비적, 초자연적인 것에 중심을 둔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적, 경이, 성령의 은사, 방언, 신앙 치유, 축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성령운동은 단일한 형태의 신앙운동이 아니다. 도날드 밀러는 성령운동을 다섯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전통적인 성령운동으로 그 기원을 20세기 미국에서의 성령운동적 부흥운동에 두며, 오늘날 '하나님의 성회'같은 비주류 개신교 교파가 이에 속한다. 둘째는 3세계에서 발견되는 토착적인 성령운동 교파들로 자생적이지만 때로는 정령신앙 혹은 주술신앙과 혼합되어 있기도 하다. 셋째는 신성령운동으로 여러 독립교회에서 나타나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형태이다. 넷째는 카리스마 운동으로 불리는 은사와 갱신을 추구하는 신앙운동이며, 다섯째는 개인이나 작은 집단에서 은사를 표현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성령운동이 분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성령운동 교인이 1900년 세계 전체 기독교인의 0.2%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28%로 급증했고, 2025년에는 33%에 이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머리 문화권인 유럽에서는 성령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반면 1970-2000년 사이 대륙 기독교인 가운데 성령운동 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아프리카에서는 15%에서 38%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5%에서 30%로, 아시아에서는 10%에서 44%로 크게 성장했다. 이렇게 3세계 기독교의 대세는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구중에서는 예외적으로 미국에서 성령운동이 확산되어 신자 비율이 1970년 11%에서 2000년 27%로 크게 늘어났고, 2025년에는 32%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성령운동의 열풍이 불고 있다. 하비 콕스는 오늘날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단언하고 있다. 신앙의 시대, 믿음의 시대에 이어 새롭게 도래한 세번째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른다. 성령운동은 가슴의 종교이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 명제나 교리적 신조가 아니라 성스러움에 대한 경험이며, 그 경험의 뜨거운 표현이다.

오늘날 가슴 종교로서 성령운동은 몇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령운동의 사람들은 성서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성령의 직접적 체험에 더 많이 의존한다. 그들은 감정을 강하게 나타내는 예배의 황홀경적인 찬양을 환영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교리적인 규제를 싫어하며, 사람이 만든 신조와 생명이 없는 의례를 배격한다. 문자적인 교리나 신조보다는 삶의 실천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제도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성령운동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 공동체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다면 머리의 종교보다 가슴의 종교가 기독교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도날드 밀러는 미국 독립교회 가운데 지난 몇십년간 급성장하면서 새로운 교회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교회들을 심도있게 연구한 결과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그 교회들은 무엇보다 감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머리로 믿는 것 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신앙이 중요시된다. 종교적 회심과 경험을 강조한다.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교인들 사이에 관계가 친밀하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기쁨이 충만한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을 하며, 특히 가족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소그룹 모임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천한다. 평신도를 사역의 파트너로 삼아 함께 교회를 섬긴다. 교회안에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배격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보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밀러는 미국의 주류 전통교파에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교회의 쇠퇴원인이라고 본다. 반면에 그는 독립교회들에서 무엇을 발견했는데 첫째는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 즉 성스러움의 경험이었고, 둘째는 사람들의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문화적 표현이었다. 우선 그동안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성에 밀려버렸던 성스러움의 재발견,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경험과 표출이 그 교회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세련된 신학이나 문화적으로 합리화된 가르침 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원초적인 종교적 경험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신앙운동을 그는 일종의 기독교 갱신운동이라고 본다. 또 밀러가 발견한 하나의 요소는 문화적 적합성이다. 그 교회들은 시설과 프로그램이 현대적이고, 교회의 조직과 운영 역시 포스트모던적이라서 중앙집권화가 아닌 분권화, 위계서열이 아닌 수평적 인간관계, 타율성보다는 자율성,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의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 신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진보적이라고 해서 밀러는 이 교회들의 특징을 '포스트모던 원시주의'라고 부른다.

강연자(이원규 교수)가 이 교회들에게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이다. 밀러가 분석했던 교회들은 영성이 뛰어난 교회들이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들은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한데 그것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우선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서로 가족과 같은 친밀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들은 사회의 소외된 자를 돌보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다. 독립교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영성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도덕성과 공동체성은 교인의 신앙을 뜨겁게 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전도를 쉽게 만든다. 결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교회와 교인의 영적 성장인 것이다.

분명히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 변화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으로 성스러움을 판단하는 기독교에서, 감성으로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기독교로의 전환이다.

직면한 도전과 선교적 과제

21세기에 세계 기독교는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신학적 문제가 있다. 서구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신학적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함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못하고, 결과적으로 선교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학의 위기'의 문제라면, 지구 남쪽에서는 때로 혼합주의적이고 반지성적인 정령신앙을 바로 잡지 못하는 신학의 부재가 문제일 수 있다. 지구 북쪽 기독교는 너무 정교하고 합리적인 머리의 신학 때문에 문제라면, 지구 남쪽의 기독교는 신학 자체가 없어 너무 허술하고 비합리적인 주술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3세계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도전의 하나는 어떻게 정규 신학훈련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을 것이며, 기독교를 주술화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는 무엇보다 양적으로 쇠퇴의 길을 가고 있어 교세회복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그동안 포기하거나 잃어버렸던 신앙의 영적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성스러움의 회복이며, 경험과 관계 종교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강연자는 1987년 "종교의 세속화: 사회학적 관점"이라는 저서에서 미래 종교의 성향을 세가지로 예상한 바 있다. 첫째로 미래 종교는 복음적이고 영적인 종교일것으로 예견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개인적 자유가 방종에 가깝도록 방만해져 가는 현대적 성향은 도덕성과 영성의 회복을 강조하는 종교집단의 발흥을 촉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주의의 메마름과 현대문화의 공허함이 자유주의 문화에 동조하라는 압력을 약화시킬 것이며, 이에 따라 보수적인 경건성에 대한 요구가 증대될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복음운동과 성령운동이 부활하며, 뜨거운 종교성이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될것으로 예측했다.

둘째로 구속적 성향의 종교가 설득력을 갖게 될것이라고 예견했다. 과학의 발달과 부의 확대, 그리고 개인주의 가치관은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 근대화는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하고 존재에 대한 불안을 조성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은 자유를 약속하지만 오히려 인간을 물질과 기술의 굴레에 가두어 놓을 수 있다. 이러한 현대성의 모순에서부터의 해방은 새로운 자유를 약속하는 구속종교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셋째 미래 종교는 신비적 성향을 띨수 있다고 예견했다. 경외와 신비가 고갈되어 가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경이와 신비를 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으며, 사람들은 합리성과 지성을 내세우는 지식의 정보가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든다고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 초자연, 신비, 경외에 대한 느낌은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인간의 지적 능력 그리고 현대성이라는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미래의 종교가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리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성경대로 사는 삶이 중요하다. 이성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느끼는 열정이 중요하다. 신앙에 관한 한 지적능력(지성)이 아니라 영적 능력(영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영성의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영성은 3세계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크게 성장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뜨겁다는 것이다. 영적이고 구속적이고 신비적인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세워나가는 교회들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선교의 출발점은 교회가 먼저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맺는 말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하며 합리성과 이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쇠퇴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서구의 많은 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21세기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오히려 성장하고 있으며, 그 성향도 뜨거워 지고 있다. 세계 기독교 지형은 변하고 있는데 서구교회가 몰락하면서 기독교 중심은 3세계로 옮겨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 백인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또 다른 변화는 이성과 지성을 강조해 온 기독교는 서서히 물러가고, 감성과 영성에 기초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토대를 둔 서구 주류교파 교회가 몰락하는 대신에 복음주의, 성령운동 교회가 제3세계와 미국에서 부흥하고 있다. 뜨거운 신앙운동이 유럽을 제외하고 세계 도처에 퍼져나가고 있다.

21세기 기독교는 영적이고 감성적인 종교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영성은 미래 기독교의 중심적인 성향으로 발전 할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20세기 머리의 종교에서 21세기 가슴의 종교로 바뀌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뜨거운 신앙의 열풍은 오랫동안 사라지고 잊혔던 초대교회 성령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성스러움이 전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21세기 기독교 영성의 시대를 새롭게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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