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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 목사 “져주고도 이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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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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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에 미국 법정에서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뉴욕 교계 단체장 선거에 모 후보의 인신공격성 불온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였고, 그 불법성 전단지의 내용이 입후보자가 당선되는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로 인해 회장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을 내가 주관했다고 하여 나를 법정에 고소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통을 받았고 2여년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었다. 울기도 많이 했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도 많이 했다. 목회에 전념해야 할 그때, 난 터무니없는 고소 사건에 말려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하지만 내가 더 고통을 당한 것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시각이 부족해서이었을까? 내 마음에는 큰 상처가 심어졌고 그것이 목회를 하는데 분노로 나타날 때가 있었는가 하면, 가정에서도 애들에게나 사모에게 그 분노를 쏟아낼 때가 많았던 것이 내가 더 고통스러워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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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나를 고소했던 분도 이제 노년이 되었고 나 역시 은퇴를 앞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을 되새겨 보면 정말 나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다 주었고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그 사건이었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첫째는 목사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렇게 법정 투쟁까지 해가면서 싸웠던 그 사건이 무슨 결과를 가져다주었는가?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가? 승자도 패자도 없이 그저 마음에 상처만 남기고 복수의 칼을 갈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싸움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정당했고 내가 의로웠기에 고소를 한 저 악한 인간을 그대로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의는 승리한다하며 의로움을 세우기 위해 투쟁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저쪽이 분명 악한 일을 도모한 사람인데, 저쪽에서는 내가 악한 일을 도모한 인간으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고소를 한 것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누가 의로웠고 누가 불의한 사람이었나? 제3자가 볼 때는 양쪽이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서도 양쪽이 다 회개해야 할 형편없는 소인배이었다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미련한 목사들이 자화상이고 그것도 세상법정에 고소까지 했다는 것은 스스로 목사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시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둘째로 내가 배운 교훈은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때 “내가 미안했습니다”, “내가 오판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라면 2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머리 숙였다고 과연 내가 진 것일까? 나 하나 머리 숙이고 들어갔었다면 고소한 그분도 살고, 나도 사는 하나님 말씀의 법칙을 왜 몰랐든가 후회가 된다. 

 

난 그 사건을 통해 사람관계는 이기고 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지나면 지난날 내가 이겼다고 자부했던 것이 사실 진 것이고, 거꾸로 내가 졌다고 슬퍼했던 그것이 오히려 이긴 것으로 나타난다는 이 비밀을 나는 알았다.   

 

사람이라는 것이 잔인하게도 백번 잘해 주어도 한 번의 실수만 기억하고 99번의 잘한 일을 매도해 버리고, 99번 잘못하여 늘 원수처럼 지낸 사람일지라도 한 번의 결정적인 도움이 원수가 친구로 변한다는 것도 배웠다.

 

요즘 교계가 참 말이 많다. 밖에서 보면 목사들이 싸우는 것으로 밖에 달리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목사인 내가 봐도 싸움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자기들은 의롭고, 저쪽이 불법이라고 서로 손가락질 한다. 누가 옳은 것인가? 서로 ‘내가 잘못 판단했소’, ‘미안하오’라고 하며 불법인지 합법인지 따지기 보다 먼저 용서하고 이해하고 손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꼭 불법이다 합법이다 가려져야 정상화가 되는 것일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서 용서하라고 하는 목사들이 왜 용서는 못하는 것일까? 

 

싸움이란 정면에서 승패를 가르는 방법도 있지만 싸우지 않고도 승패를 가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방법을 통해서 배우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 전해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난한 동생 집에는 애들이 6남매이다. 그런데 돈이 없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성장했다. 그래서 늘 못난 집안이고 부족한 가정임을 안다. 반면 형의 집은 부잣집이다. 애들이 좋은 학교를 나오고 공부도 많이 했으며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런데 형 집은 매일 싸운다. 부부끼리 싸우고 자식들과 싸우고 도대체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다. 반면 가난한 동생 집에는 늘 웃음소리가 들리고 한 번도 큰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형이 동생 집을 찾아가 물었다. “어째서 너희 집은 싸움이 없느냐?” 동생이 한마디 한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고 배우지 못해서 뭐 잘못이 있으면 서로 잘못했다고 하죠. ‘내가 부족해서 그랬어’, ‘아니야 내가 생각이 모자라서 그랬어’ 그렇게 서로 잘못했다고 하니 싸울 일이 없죠”라고 대답했다.

 

목사들이 져주고 양보하고 손해 보면 어떤가? 그렇게 살겠다고 목사가 되지 않았는가! 목사들이 너무 똑똑해서, 너무 의로워서 심판의 칼을 들고 있어 무서움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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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지문서님의 댓글

누지문서

" 아멘 "
 
몇 주전에  아멘넷 기사중 댓글을 다신 허윤준 목사님의 댓글에
"하나님의 심정" 을 느끼는 댓글 내용이라고 답글을 달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한준희 목사님의 원글  내용에서도 동일한 심정을 느낍니다.

" 목사들이 져주고 양보하고 손해 보면 어떤가? 그렇게 살겠다고 목사가 되지 않았는가! 목사들이 너무 똑똑해서, 너무 의로워서 심판의 칼을 들고 있어 무서움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4월 말이면 현재 근무하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사람입니다.
기록을 뒤져보니 2009년 부터 2017년까지 아멘넷 칼럼을 통해 많은 칼럼을 올렸더군요.

이제 은퇴를 목전에 두고 지난날의 제 칼럼을 뒤져 보니 똑똑하고 의로운
심판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꼭 목사님들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모습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즈음 지난날을 뒤돌아 보는 시간이 많이 늘었는데 제가 깨닫는
심정을 그대로 올려주셔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남겨진 목회 기간 동안에도 뉴욕 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목사님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PS ; 이 댓글은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의견이며 " 뉴욕 한인 교역자 연합회 "를 폄하하는 글은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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