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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센트럴교회 2021 선교대회 "하나님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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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ㆍ 20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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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센트럴교회(김재열 목사)는 2021 선교대회를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제로 3월 11일(목) 저녁부터 주일까지 4일간 열었다. 대회는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저녁 8시와 오전 6시에 집회가 진행되며, 주일에는 오전 9시와 11시에 진행된다. 특히 토요일 오후 5시부터는 미션 콘서트가 열려 찬양, 간증, 교제, 질의응답 등이 진행된다. 

 

1년 전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예배외의 특별한 행사를 자제하고 있는 가운데, 센트럴교회가 강사들을 교회에 초청하여 현장 및 온라인으로 선교대회를 연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첫날 집회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설명됨으로 이유가 잘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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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한 정민영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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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주최한 뉴욕센트럴교회 김재열 목사
 

선교대회에는 정민영 선교사와 김재우 선교사, 그리고 선교지를 밝힐 수 없는 지역 선교사가 강사로 참여했다. 정민명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를 거쳐 국제 위클리프 대표를 역임하고, 은퇴후 선교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미주지역에 잘 알려진 선교리더이다. 김재우 선교사는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PROSKUNEO 미니스트리를 설립하고 다민족 선교를 하고 있으며 첫날 집회에서 다민족어로 찬양했으며, 금요일 아침에는 원주민 의상을 입고 메시지를 전했다.

 

1.

 

대회를 시작하며 목요일 저녁 정민영 선교사는 요한계시록 7:9~12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선교, 우리의 참여”라는 주제 말씀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큰 그림을 그렸다. 정 선교사가 메시지를 통해 그린 그림은 그동안 많은 성도들이 생각했던 회심의 색도, 구원의 색도, 복음의 색도 달랐다.

 

정민영 선교사는 흔히 선교대회를 개최하면서 지상대명령 구절인 마태복음 28장이나 사도행전 1장의 말씀을 근거해서 선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통해 선교를 나누었으며 “그동안 내가 이해했던 선교가 무엇이고, 메시지와 말씀에 근거해서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라고 도전했다.

 

김재열 목사는 정민영 목사의 메시지가 끝난 후 “굉장한 메시지이다. 성경전체에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었다. 선교는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구원하셨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자라서 우리의 도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목사로서 말씀을 들으며 목사의 설교는 매시간 이것을 전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알기를 원한다면 다시 이 영상을 보라”고 추천했다. 

 

다음은 정민영 선교사의 첫날 메시지 동영상 링크이다.

https://youtu.be/cS64ZVhOSLE

 

2.

 

성경에는 ‘선교’라는 단어가 없다. 선교라는 개념은 가득하지만 단어는 없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없지만 성경전체가 삼위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선교를 단순한 종교행위로 정의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선교개념을 바르고 깊게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흔히 선교대회를 개최하면, 지상대명령 구절인 마태복음 28장이나 사도행전 1:8 같은 성경구절을 근거해서 선교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굉장히 미시적으로 선교를 정의해서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선교를 그르치는 것으로, 교회가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해 왔던 시행착오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중세 암흑기에 선교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십자군전쟁 같은 것이다. 동일한 오류가 현재에도 선교라는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선교를 이해하려면 성경의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성경은 너무 방대한 책이다. 왜 하나님은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하드라마 같은 방대한 계시를 하셨을까? 왜 사영리나 전도지같이 간단하게 요약해서 전하시지 않으셨을까?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어마어마한 드라마를 통해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가? 대개 우리가 대하시리즈 책을 읽을 때 맨 끝에 가면 결론 부분이 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보게 된다. 

 

본문을 보면 세상과 역사의 끝에 마침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천군천사와 함께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하고 예배하는 장면이다. 여러분은 천국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에 그려진 결론과 여러분의 기대가 일치하는가?

 

3. 

 

본문이 그리고 있는 예배하는 모습, 예배의 중심성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특징을 잘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종교학이 다루는 종교는 사실 인간이 중심이다. 초자연적인 힘을 끌어당겨서 인간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인데, 기독교는 예배가 궁극적인 그림이라는 것은 우리 중심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중심임을 말해준다. 즉 기독교는 인본주의 종교가 아니라 신본주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세상의 인본주의 종교에는 예배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어보라. 처음 창조부터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있었고, 죄로 인해 망가졌으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재창조하는, 구원조차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선교라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큰 의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이 메시지의 첫 단추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원과 복음의 개념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구원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적인 개념이다. 복음도 인간중심으로 푸는 차원에서 머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복음을 정의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실 도피적이고 지독하게 미래지향적 종말적인 의미로 구원을 정의한다는 잘못이 있다. 

 

기독교 영성과 타종교와 구분하는 지점이 여기인데, 기독교 영성은  사실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지성이면 감천’인 그런 영성은 아니다.  사실은 기독교 영성은 방향성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중심으로 관점이 바뀌는 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회심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사고한다.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착시이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아는 엄청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회심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자기중심적 죄성을 믿음의 선배 어거스틴은 자기를 향하여 구부러진 삶, 자기중심성이라고 정의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죄성은 자기중심성이라고 말했다. 회심을 했다는 것은 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태양이신 하나님이 내 주변을 돌면서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자를 만났을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회심이다. 

 

구원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의하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한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주로 무엇으로 부터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것도 중요한 질문이다. 구원으로 영원히 죽을 나를 살리셨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을 우리는 잘 안했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 구원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라는 어마한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의도가 무엇인가를 질문을 해야 한다. 바로 그 질문과 선교와 맞닿아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질문에 대해 존 맥카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구원은 단순히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기 위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정도도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 말은 나를 만드신 그 주인되신 그분을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바라지만 예수님을 내가 부려먹을 하인 정도로 영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통 구원자라는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말로 맞는 말이다. 신약성경에 구원자라는 단어가 24번 나온다. 하지만 신약에 주(큐리오스)라는 단어는 747번 나온다. 성경의 관점은 예수님을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신 분 정도로 보지 않는다. 주 예수(my Lord)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개념이며 이를 놓치면 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왜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서 천국으로 데려가시려고 오셨다고 대답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사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께 창조주로서 ‘우리의 주’이시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개념과 구원론이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영성의 선생,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가? 물론 죄인을 구원하시고 회복하셨다. 망가진 상태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으니 망가진 상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기에 회복하여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보다는 회복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3:23-2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에도 구원의 개념과 하나님의 영광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를 인본주의 무당종교로 만든 것은 큰 죄이다. 중세 암흑기는 바로 그런 기간이었고 종교개혁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본주의적인 관점을 회복한 운동이었다. 500여년전 개혁자들이 성경전체의 큰 그림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성경전체가 창조주이신 그분의 관점에서 자기 계시이고 자기 목적이 계시되어 있는 책이다. 우리가 이용할 인본주의적인 방법론적인 책이 아니다. 신앙에 입문할 때 개혁자들이 정의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나오는 소요리문답 첫째 질문은 “사람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요?”이며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종교 소비자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그런 개념을 가진 때는 문제가 있는 시대이다. 현대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500여년 전에 개혁자들이 개혁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고 모든 시대의 교회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시대 몫의 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 사는 여러분들은 미 복음주의 교회가 변질한 것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1996년에 미 복음주의의 개혁을 추구한 사람들이 보스톤 캠브리지에서 선언을 통해 건강한 복음주의 신학을 정의할 때 종교개혁자들의 5가지 솔라가 우리 신앙의 근간임을 재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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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회중을 위해 박준영 목사가 동시통역을 진행했다.
 

4.

 

성경을 읽는 관점이 바뀔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희 가정이 선교적인 부르심에 응답해서 한국을 떠난 것이 1981년이다. 몇 년 전에 은퇴해서 한국에 돌아가 짐을 정리하는데 익숙한 젊은 시절에 읽던 성경이 나왔다. 폈더니 이사야 43장이 펴졌다. 그리고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부분이 빨간색으로 그어진 것을 보았다. 물론 은혜로운 구절이다. 밑줄을 그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어디로부터 구원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시절이었다.

 

40여년의 세월이 지나 조금 철이 들어 43장을 볼 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보호하시고, 왜 나를 복 주신다는 것인가 라는 부분을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답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셨다.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에서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사야 43장을 새로운 시각으로 묵상하며 읽게 되었다. 성경에 풍부하게 나타나있는 철학이 질문하지만 대답은 하지 못하는 목적론적이며 존재론적인 질문이 있다. 성경은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왜 복을 주시고 왜 보호하시는지 분명하게 말씀한다. 7절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하며,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에는 심지어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고 인생의 본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 구체적로 무슨 의미인가? 영광이라는 개념이 무엇일가? 영광이라는 개념은 이해한다는 단어에서 나온 개념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분의 신분에 합당하게 예우하는 일이다. 그것이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호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신 말씀은 학력이 없어서 망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기에 망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초빙해서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했던 말씀이 이해되는 지점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여러분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기독교 영성의 선생 토저는 현대교회에게 끔찍한 질병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대한 무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백두대간에 거하는 산신령이 아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세상을 소유하시고, 온 세상을 회복하여 그분의 영광을 회복하실 분이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 그분은 필연적으로 선교의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야기 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을 편애하는 속 좁은 신이 아니고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필연적으로 그분은 만유가 회복되고 그래서 그분의 영광이  회복될 때까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만유의 주재이시다.

 

5.

 

첫날 메시지의 주제가 “하나님의 선교, 우리의 참여”이다. 사실 선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일이 아니다. 선교는 특정 교회의 일도, 특정 선교회의 일도, 특정 선교사의 일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고 그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초청하신 것이다. 그분이 꿈꾸시는 그 궁극적인 그림을 향하여 방대한 계시가 있는 것이다. 성경 일부에 선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그 하나님의 꿈에 대한 것이고, 교회는 바로 그 목적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우리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일치되는 일이 궁극적인 그림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과 우리는 동상이몽을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일수도 있다. 본문의 모습은 하나님의 꿈이 마침내 완성되고 구현되는 모습이다. 마치 수천 조각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과 같다. 성경을 처음 읽을 때는 방대한 계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 하시는가 헷갈리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읽는다면 퍼즐이 맞추어져 모양이 나온다. 본문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비전이 완성되어 맞추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합당한 인정을 받는 것이 영광이다. 선교는 하나님을 하나님되시게 하는 일이다. 그분에게 합당한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열심히 예배드리는 것도 귀하지만 이정도로는 안된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가 회복되어서 그분에게 합당한 예배가 드려지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 각 나라와 각 족속과 백성이 불쌍해서도 아니라, 그들을 원래 창조하신 의도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유의 주제에 합당한 예배는 아직은 드려진 적이 없다. 존 파이프는 선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중요한데,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라는 찬양이 있다. 물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귀한 것이지만 그 찬양도 그들이 불쌍해서 구원받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큰 그림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보혈을 흘리신 이유는 단지 몇몇 사람들을 천당가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지금 성경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그림을 향해서 보혈을 흘리신 것이다. 계시록 5장 9절에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보혈을 흘리신 이유가 나온다. 보혈은 몇몇 배타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특혜를 주기위해 흘리신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선교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보혈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기념하는 성만찬을 이야기를 할 때 읽는 고린도 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에서 바울은 성만찬을 기념하는 이야기를 하고 선교적인 결론을 내리는 이유가 그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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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아틀란타에서 다민족 선교를 하고 있는 김재우 선교사
 

6.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관점을 나누고 싶다. 선교라는 큰 그림을 그릴 때 많은 분들이 선교라는 버거운 의무를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성경을 바로 읽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율법적인 굴레로서의 선교를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동기는 사랑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지불하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뒤늦게 우리에게 종교적인 굴레를 씌우시려고 선교에 초청하셨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에 교회를 초청하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동행으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이다. 선교를 율법적인 의무의 굴레로 보지 말고 사랑의 시각으로 풀어야 한다.

 

사실 이 개념은 창세기부터 시작했다. 처음에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의 교제속으로 우리를 초청하셨다.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죄가 그것을 깼다. 선교는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깨어진 관계의 회복, 사랑의 관계의 회복으로 다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새로운 종교적인 속박으로 굴레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예배하는 자로 살 때 우리의 행복과 만족이 극대화 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 개념을 성경은 다양한 형태로 설명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렸는가? 아버지와 화해하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때 아버지도 행복하고 탕자도 그랬다. 진정한 자유는 그것에 있다. 아버지를 떠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떠나 독립선언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 품안에서 자유하듯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인간의 본분과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과 만족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겹쳐지는 개념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가 했을 때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버거운 종교적인 굴레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으로 회복되는 일이다. 이 영광스러운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여러분과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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