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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흔한 오류 여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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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 202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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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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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ark Fletcher-Brown on Unsplash

 

나사렛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믿음은 지난 2천년 동안 무관심, 음모, 논쟁, 추측, 조롱, 그리고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런 믿음이 그의 성육신 이후(눅 1:41) 전 세계에 흩어진 신자들로부터 예배와 헌신 그리고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높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여전히 그 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오류가 남아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다양한 영적 손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 구세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골 1:15)이므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요 14:9). 또한 그 누구도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 세상에 그 어떤 질문이 이 보다 더 격렬하게 논쟁되었던가? 이 세상에 또한 그 어떤 질문이 이 질문처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또는 아예 무시당함으로 누군가를 지옥의 위험에 빠뜨리고 또는 정확하게 대답함으로 누군가를 영원한 천국을 얻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묘사했다(요 1:14). 도마는 예수님을 그의 “주” 그리고 “하나님”(요 20:28)으로 고백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 그리고 그는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자” (히 2:14)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했으며 신성한 이름을 받은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라고도 표현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이자 모든 뛰어난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빌 2:9-11).

 

이런 증언들 뿐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더 많은 증언들을 종합할 때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현실을 대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질 수 없는 특징, 또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분되는 신인(God-man)이다. 그는 실로 독특한 분인데 우리기 흔히 쓰는 그런 독특함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그와 비슷할 수 없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감스러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신인(神人)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역사를 망각한 채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동일한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그는 정말로 사람인가?

 

1세기 후반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라피온(Serapion, 190-203)을 통해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을 믿는 이단이 생겼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이 “영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겉으로 인간처럼 보였다는 주장을 했다(그리스어, dokeō = “…처럼 보이다”). 그 후 4세기에 들어서는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5-392년 경)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부분적으로 그의 견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아폴리나리스는 영원한 아들인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취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마음(mind)까지 입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성육신은 단순히 마음과 영혼이 없는 육체에 거했던 아들의 신성일 뿐이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17세기에 들어서자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요즘 들어서 그리스도가 가졌던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슬퍼했다. 그럼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셨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사람이고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 인간다움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단지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서술한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다(히 2:17). 이런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는 배고픔(마 4:2)과 갈증(요 19:28) 그리고 피곤함(요 4:6)과 같은 신체적 반응을 경험했다. 그는 울었고(요 11:35), 통곡했으며(눅 19:41), 한숨을 쉬었고(막 7:34) 또한 신음했다(막 8:12). B. B.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지금 나와 똑같은 인간을 앞에 놓고 만나고 있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는데에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나지안조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서신 101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가 입지도 않은 것을 입은 것처럼 하고 인간을 치유한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속이 필요한 영혼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영혼을 소유해야만 했다. 합리적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도 합리적인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을 입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다양한 오류와 관련해서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주 그리스도는 그의 영혼의 합리적 능력과 능력, 그의 이해력, 의지 및 애정으로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 … 오래 전 사람들이 헛되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던 것은 신성한 본성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신성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대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 분 안에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다 그렇듯이 그의 모든 도덕적 활동의 즉각적인 기초(principle)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행위는 진정한 인간적 행위였다. 그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했는데, 자라면서 힘이 강해졌고 또한 지혜도 더 자라났다. 지혜와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새롭고 더 큰 지식이 필요했다(눅 2:52). 이것은 그가 참된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의 유한함을 반영하는 유한한 마음과 영혼을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필수 조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순종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아니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온갖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구세주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복음서와 히브리서의 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든 단지 속임수(phantom)가 아니었다. 그의 피는 우리 몸이 잘리거나 찔릴 때 나오는 진짜 피였다. 핏방울과 같았던 그의 땀은 십자가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영혼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은 인간을 정복한 죄의 영향을 바라보며 느낀, 진정으로 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비극은 오로지 그가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서만 통해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는 우리의 본성을 취함으로 우리를 영원히 치유했다.

 

2. 그는 도움을 받았는가?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순종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다면(요 4:34; 5:19, 30; 6:29, 42, 57), 그를 도울 가능성이 가장 높은 두 존재는 누구일까? 축복받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다른 두 격이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와 성령님이시다.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주의 영이 주의 종인 메시아에게 안주하실 것이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42장 1절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바로 첫 번째 종의 노래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61:1도 참조하라)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종(그의 아들)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를 붙잡는다. 이사야서 세 번째 종의 노래를 읽게 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사 50:7).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실로 아름다운 삼위일체를 증거하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을 읽는다. 성육신(눅 1:31, 35), 세례(막 1:10), 광야의 유혹(막 1:12; 눅 4:14), 설교(눅 4:18), 기적(마 12:28), 죽음(히 9:14), 부활(롬1:4, 8:11), 그리고 승천과 영광 받으심(행 2:33, 시편 45:1-7)까지, 우리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으며 결코 그를 떠나거나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온전히 기뻐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내려주신 선물이다.

 

성경을 보다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냥 자신이 가진 신적 본성에 의존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될 때 진정한 종으로 오신 성육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셨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를 맞추고 준비시키셨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명령하는 것을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명령하라.”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순종하는데 필요한 (성령님의) 은사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못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자신만이 구세주라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참된 종교적인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3. 예수님도 죄를 지었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도 분명 유혹을 받았었기에 혹시나 죄를 짓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잘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첫째,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진 두 가지 의지(will)의 관계에 관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각각 다른 두 본성에 적합한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이다.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신앙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두 가지 자연적 의지는 불경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상충되는 게 아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인간적인 의지는 주저하거나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성하고 전능한 의지에 종속된다.”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는 결코 그의 신적 의지에 어긋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이 공유하는 신성한 의지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되지만 결코 신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에 종속될 수는 없다.

 

이것은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즉 그리스도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 일치는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묵상하면 할수록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관여하지 않고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적 본성은 추상적인 의미로 볼 때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추상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행동하는 인간이지 단지 행동하는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됨(personhood)은 사실상 신인이기에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W.G.T. 쉐드(W.G.T. Shedd)는 이렇게 말했다. “로고스가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사람으로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이 본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 행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으신다면, 그건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우리가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된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는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죄의 가능성조차도 없었다(히 4:15). 그가 받은 유혹의 현실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진짜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언이기도 하다.

 

4. 그는 진짜 사람인가?

 

많은 신자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진짜 인간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광 가운데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지금도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인간인지를 물으면 약간 혼란스러워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예수님이 승천 후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한테 지금 굳이 인간성(humanity)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오웬은 말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이성적인 영혼 뿐 아니라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사항이다.” 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존재함은 우리가 믿는 종교의 기본 항목이다. 뛰어난 네덜란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다시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그런 육신이 되었다! 보좌에 앉아계신 지금조차도 그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오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이제 와서 “신성화”되지 않았다(즉, 신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본성이 “하늘에서 신적인 본성과 결함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본성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의 인간적 본성은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전달되는 어떤 신성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항상 참된 인간적인 본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간됨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인간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한때 약함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히 4:15) 약점 때문에 허덕이는 우리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지금도 제사장이다. 신부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권능으로 할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다.

 

5. 그는 완전한 하나님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예수님, 놀라운 분이죠.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임명하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 250-336년 경)는 아들이자 로고스인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부인한 가장 유명한 이단자일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수 없다며 그의 참된 신성을 부인했다.

 

나사렛 예수의 완벽한 신성의 증거, 즉 아버지와 나누고 있는 동질성(동일한 본질)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편을 들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정말로 교회에 혼란을 주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예 : 빌 2:5-11, 히 1:1-14, 골 1:15-20 참조).

 

요한복음의 프롤로그는 교회가 예수가 참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시작하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프롤로그 후반부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라는 놀라운 요점을 말하는데 이 진리는 아마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이 믿는 가장 믿을 수 없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1절의 “계셨다(was)”는 14절의“되셨다(became)”와 대조되어야 한다. 말씀(로고스)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되신 게” 아니다. 이전에는 그 말씀이 단지 “계셨을” 뿐이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도 이 진리를 확인하고 뒷받침한다(요 3:13; 6:62; 8:57–58; 17:5; 20:28).

 

나중에 요한은 이사야가 “만군의 주인되신 왕”(사 6:5)을 보았을 때를 언급한다. 이사야 6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후, 그는 이사야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주는 법이 없다고 쓰여있다(사 42:8).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스스로 속았을 뿐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요청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서 묘사하는데 바로 예수님과 구약의 야훼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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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병행이 가르쳐주는 건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로 다름 아닌 야훼, 그분이라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아버지 그리고 성령님과 동등한 바로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모든 신성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 위엄이 있는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또 변함없이 강력한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가 거룩하고 또 거룩하신가? 아들도 그렇다. 신성한 본성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그는 단지 영광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무한하고 변함없이 영광스럽다.

 

6.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언어(theotokos)는 무엇인가? 이 진술 속에 들어있는 진실이 단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오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육신이 되었을 때(요 1:14) 그는 보통 인간(human person)이 아닌 단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만을 취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인격 아래에 존재한다.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자 같은 아들이며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칼케돈 공의회).

 

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인간 본성이 이랬다” 또는 “그의 신적 본성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적 또는 신적 본성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것을 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로마서 1:3). 주체는 인간, 아들이고 그는 인간적 본성(예: 먹는 것, 눅 24:43) 또는 신적 본성(예: 세상을 유지함, 히 1:3)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마리아는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낳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칼케돈 신조(AD 451)의 가르침이자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정통성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이유이다. “여러분은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아들이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피로서 교회를 얻으셨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죄인인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위한 보상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창 22:17)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메시아이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믿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마 16:16). 이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도 같은 영광을 볼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신인(神人)이시다.

 

원제: Christ Confusion: Six Common Errors About Jesus by Mark Jones 

출처: www.desiringgod.org

 

마크 존스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 벤쿠버에 위치한 Faith Vancouver Presbyterian Church (PCA)의 담임목사이다. 대표 저서로 'If I Could Speak: Letters from the Womb'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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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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