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홍 목사 “목사이기 이전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페이지 정보
교계ㆍ2006-09-01 00:00관련링크
본문
이 땅위에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있겠는가? 한 사람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기는 낯이 너무 뜨거워 스스로 나에게 돌을 던지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우리 한국인의 사회에는 조국이나 이민의 삶의 현장이나 할 것 없이,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전쟁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옹다옹 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이런 모든 원인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믿는 소위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서 왔고, 목사인 내 자신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형용사에 가리어진 현실
왜 우리 주위에서 전도가 안 되고 날마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수가 줄고 있을까?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먼저 목사들이 지나친 형용사를 사용하는데 있지 않은가 한다. 목사들이 형용사를 사용하는데 좀 더 조심성이 있었으면 한다. 지나친 과장법을 많이 씀으로 진실이 감춰지는 것이다.
목사들은 먼저 있는 대로를 보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좀 크게 보이면 어떻고 작게 보이면 어떤가! 땅이 한 곳이라도 꺼진단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고 말하며 살아야 한다. 혹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 목사인 것이다. 있는 대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내가 어릴 때 들었던 말인데 기독교인들은 말을 잘 한다고 했다. 이는 여러 대중 앞에 자주 서니 담력이 생길 수도 있고, 표현을 잘 하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말할 때 좋은 의미의 말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딘가 비꼬는 듯한 어투였음을 볼 때 지나친 형용사 사용이 화근이 된 것 같다.
내가 71년도에 미국에 왔으니 지금부터 35년 전 일이다. 내 친구가 공보부(그때는 그리 불렀음)에 다녔는데 그때 각 교단에서 신자수를 보고하는데 전체를 합치면 한국의 인구보다 더 많더라고 했다. 왜 언제부터 우리 목사들이 형용사를 그렇게 뻥튀기해서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신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는 성도들의 신앙과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기 교회 교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많다고 하면 좋아한다. 그래서 심지어 가짜 박사까지 등장했는데 가짜 박사도 제일 잘 믿는다고 하는 보수 교단이 제일 많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물고 뜯어 갈라지기도 제일 잘 한다.
목사이기 이전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이런 과정을 보면서 목사인 내 자신이 느끼기는 신학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배웠어도 눈이 가려진 것이다. 지금 내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만 해도 이름도 없는 신학교가 즐비하다. 거기서 무엇을 배워가지고 목사가 되는 것인지.... 그래서 먼저 신학교부터 정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단차원에서 신학교가 필요하다면 철저하게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 목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비행기 안수부터 이상한 목사과정이 있으니 이는 다 목사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목사이기 이전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려야 함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이 일꾼을 시키시려 모든 일에 실패를 시켜 목사의 길로 몰아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니 신학하고 좋은 학교에 못가니 신학교나 가라는 식의 발상이 문제인 것이다.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쓰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 자신도 만삭되어 낳지 못한 자 같은 부족한 것 많지만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을 살고 있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왜 교회들이 세상에서 많은 일도 하고, 사회에 크게 쓰임을 받았음에도 이렇게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교인수가 줄어드는 사건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참 가슴이 답답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기 한이 없다. 문제를 찾아보고 해결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욕을 먹기 자청하며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한국의 초대 교회들이 자리 잡아 놓은 바른 신앙의 터를 다시 찾아가자는 것이다. 성령 100주년을 맞아 이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많은 재정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쓰임 받지 못하면 소용없음을 알자. 바른 자리에 바르게 세우는 역사를 먼저 이루어 가자.
예수 바로 믿기 운동이 전개에 앞장서야
우리의 신앙이 오직 예수로 집약이 되지 않으면 주초가 언제나 흔들리게 되고 흔들리는 집은 잘못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언제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이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랐던가?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어떤 아픔이나 환란도 달게 받아 왔으며 이것이 바른 신앙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잘 먹고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인본주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는 절대로 혼합이나, 목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예수 바로 믿기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믿게 하려면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인데 그리하려면 목사가 형용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숫자의 개념을 철저하게 초월하고 알차게 목양하면 숫자는 저절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언제나 순서를 바꾸어 살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덤을 위해서 살고 있기에 문제다. 본질을 가지면 덤은 저절로 오는 것이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필요를 구하라 할 때 지혜를 구하므로 다른 것은 덤으로 다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사들이 이런 신앙만 가져도 달라진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요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이다.
사람이 본질을 떠나면 언제나 마음이 어두워져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쏟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크게 보이려 자신까지 팔아버린, 신앙이라기보다 인격까지 팽개치는 주인공이 된다. 목사이면 목사면 된다. 거기에 박사까지 붙일 필요는 없다. 설교할 때도 보면 갈매기 세 개를 붙이는 옷을 입어야 직성이 풀린다. 설교 때 까운을 입으려면 목사 까운을 입어야 한다. 박사까운은 학위를 수여 할 때든지 받을 때 입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형용사가 강하게 암시된다.
우리가 바른 자리를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기에, 가짜가 우리 자리를 차지하기에 결과는 지탄을 받게 되어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점점 싸구려 천덕꾸러기가 되어서 좋지 않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결국은 선교의 문이 점점 좁아지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어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종교로 간다.
교회의 문제는 목사의 책임이라는 자세로...
기독교가 이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묻혀버리거나 효과가 없이 되어버렸다. 남이 알아주기를 위해 하는 일은 아니지만, 일하고 욕까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각 교파가 다르니 일은 많이 해도 분산되어 하기에 흔적이 없어진다.
우리 기독교는 그 사회를 바르게 이끌고 가는 사회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사회에 끌려가는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교파주의나 개인주의에 너무 익숙해 있다. 그러니 연합이 안 되고 힘을 바르게 발휘하지 못해서 나약한 모습을 늘 보이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사회에서 따돌림이나 받는 형편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변명도 말고, 그렇다고 코가 빠져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처한 곳에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기 최선을 다해 바르게 진실하게 책임을 다하면 언제인가 제 자리로 돌아 올 것이다. 또 기독교가 다시 한국 사회의 견인차가 되어서 앞서 가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며 자만에 잠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와 같은 상황 말이다. 우리에게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선을 다 하면 놀라운 결과가 의외로 빨리 우리 앞에 올 것이다.
왜 우리가 알면서도 현실을 피하며 자신의 함정을 늘 파고 살았을까? 이는 지나친 수의 개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또 지나친 비교의 결과이다. 나는 나이다. 내가 아무개가 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경쟁을 하고 더 나아가 속여야 하기에 과대한 형용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른 교파보다 우리 교파가 커야 한다든가, 다른 교회보다 자기의 교회가 더 커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결과를 우리는 맞았다.
목사부터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무슨 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헤아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이지 결과나 숫자를 보시지 않는다. 우리의 재능에 따라서 결과를 헤아리는 것이다. 많은 것이 왜 나쁘겠는가? 좋지만 나에게 맞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우리 목사들은 알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일반 성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다. 지나친 기대나 숫자에 목을 매지 말자. 거기서 오는 압력 때문에 목사가 더욱더 숫자에 예민하고 과장법을 구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책임은 목사들에게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본 자리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열심히 기도하자.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며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계산 될 것을 생각하며 살자. 누가 우리에게 무어라 하든지 개의치 말고 자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자.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 하실 것이다. 지나친 허영을 버리자.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욕심에 왜 빠졌는가? 허영 때문이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영역을 알려하면 무서운 결과가 기다린다.
형용사 없이 있는 대로 보이고 살자
지나친 욕심은 자신을 멸망시킨다. 현실에 충성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높여 주신다. 그때 우리에게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여시고 지혜도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하여 책임을 지실 것이다. 믿음은 바른 자리에서 자기의 몫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이다. 욕심과 허영 속에서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다음을 준비하신다. 그래서 오늘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다. 오늘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큰 내일을 흉내 내다가 더 낮은 자리로 떨어지는 경우를 늘 본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시고 목사로 세울 때 가지신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따라서 순종하면 언젠가 하나님은 우리를 현대 용어로 표현하여 업그레이드 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또 필요하면 메가에서 기가로 올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알고 일하면 승리하게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자책하며 주저앉을 필요도 없다.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충성된 일꾼이 되자. 지나친 형용사를 이제부터 사용하지 말고 있는 대로 보고 말하며 살자. 작은 자가 큰 척 할 필요도 없고 큰 자가 작은 척 할 필요도 없다. 있는 대로 보이고 살자. 그래야 우선 내 마음이 편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할 것이다. 더 이상 다른 것에 쫒기는 삶을 살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잘 보이려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일은 더욱더 하지 말자. 하루를 마치면 덧없는 기쁨 때문에 잠을 잘 자고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자. 그럴 때 좋은 내일이 기다릴 것이며, 저절로 교회는 발전하고 사회는 우리를 존경하며 복음이 힘차게 증거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뭐라고 말씀하실 것인가만 생각하며 일하자. 사람의 종이 스스로 되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감사하며 살자. 이때 우리 앞에는 놀라운 복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기쁨으로 일하자.
한재홍 목사
뉴욕신광교회 담임목사,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증경회장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우리 한국인의 사회에는 조국이나 이민의 삶의 현장이나 할 것 없이,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전쟁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옹다옹 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이런 모든 원인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믿는 소위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서 왔고, 목사인 내 자신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형용사에 가리어진 현실
왜 우리 주위에서 전도가 안 되고 날마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수가 줄고 있을까?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먼저 목사들이 지나친 형용사를 사용하는데 있지 않은가 한다. 목사들이 형용사를 사용하는데 좀 더 조심성이 있었으면 한다. 지나친 과장법을 많이 씀으로 진실이 감춰지는 것이다.
목사들은 먼저 있는 대로를 보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좀 크게 보이면 어떻고 작게 보이면 어떤가! 땅이 한 곳이라도 꺼진단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고 말하며 살아야 한다. 혹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 목사인 것이다. 있는 대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내가 어릴 때 들었던 말인데 기독교인들은 말을 잘 한다고 했다. 이는 여러 대중 앞에 자주 서니 담력이 생길 수도 있고, 표현을 잘 하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말할 때 좋은 의미의 말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딘가 비꼬는 듯한 어투였음을 볼 때 지나친 형용사 사용이 화근이 된 것 같다.
내가 71년도에 미국에 왔으니 지금부터 35년 전 일이다. 내 친구가 공보부(그때는 그리 불렀음)에 다녔는데 그때 각 교단에서 신자수를 보고하는데 전체를 합치면 한국의 인구보다 더 많더라고 했다. 왜 언제부터 우리 목사들이 형용사를 그렇게 뻥튀기해서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신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는 성도들의 신앙과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기 교회 교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많다고 하면 좋아한다. 그래서 심지어 가짜 박사까지 등장했는데 가짜 박사도 제일 잘 믿는다고 하는 보수 교단이 제일 많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물고 뜯어 갈라지기도 제일 잘 한다.
목사이기 이전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이런 과정을 보면서 목사인 내 자신이 느끼기는 신학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배웠어도 눈이 가려진 것이다. 지금 내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만 해도 이름도 없는 신학교가 즐비하다. 거기서 무엇을 배워가지고 목사가 되는 것인지.... 그래서 먼저 신학교부터 정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단차원에서 신학교가 필요하다면 철저하게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 목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비행기 안수부터 이상한 목사과정이 있으니 이는 다 목사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목사이기 이전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려야 함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이 일꾼을 시키시려 모든 일에 실패를 시켜 목사의 길로 몰아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니 신학하고 좋은 학교에 못가니 신학교나 가라는 식의 발상이 문제인 것이다.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쓰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 자신도 만삭되어 낳지 못한 자 같은 부족한 것 많지만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을 살고 있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왜 교회들이 세상에서 많은 일도 하고, 사회에 크게 쓰임을 받았음에도 이렇게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교인수가 줄어드는 사건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참 가슴이 답답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기 한이 없다. 문제를 찾아보고 해결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욕을 먹기 자청하며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한국의 초대 교회들이 자리 잡아 놓은 바른 신앙의 터를 다시 찾아가자는 것이다. 성령 100주년을 맞아 이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많은 재정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쓰임 받지 못하면 소용없음을 알자. 바른 자리에 바르게 세우는 역사를 먼저 이루어 가자.
예수 바로 믿기 운동이 전개에 앞장서야
우리의 신앙이 오직 예수로 집약이 되지 않으면 주초가 언제나 흔들리게 되고 흔들리는 집은 잘못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언제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이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랐던가?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어떤 아픔이나 환란도 달게 받아 왔으며 이것이 바른 신앙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잘 먹고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인본주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는 절대로 혼합이나, 목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예수 바로 믿기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믿게 하려면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인데 그리하려면 목사가 형용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숫자의 개념을 철저하게 초월하고 알차게 목양하면 숫자는 저절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언제나 순서를 바꾸어 살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덤을 위해서 살고 있기에 문제다. 본질을 가지면 덤은 저절로 오는 것이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필요를 구하라 할 때 지혜를 구하므로 다른 것은 덤으로 다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사들이 이런 신앙만 가져도 달라진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요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이다.
사람이 본질을 떠나면 언제나 마음이 어두워져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쏟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크게 보이려 자신까지 팔아버린, 신앙이라기보다 인격까지 팽개치는 주인공이 된다. 목사이면 목사면 된다. 거기에 박사까지 붙일 필요는 없다. 설교할 때도 보면 갈매기 세 개를 붙이는 옷을 입어야 직성이 풀린다. 설교 때 까운을 입으려면 목사 까운을 입어야 한다. 박사까운은 학위를 수여 할 때든지 받을 때 입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형용사가 강하게 암시된다.
우리가 바른 자리를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기에, 가짜가 우리 자리를 차지하기에 결과는 지탄을 받게 되어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점점 싸구려 천덕꾸러기가 되어서 좋지 않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결국은 선교의 문이 점점 좁아지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어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종교로 간다.
교회의 문제는 목사의 책임이라는 자세로...
기독교가 이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묻혀버리거나 효과가 없이 되어버렸다. 남이 알아주기를 위해 하는 일은 아니지만, 일하고 욕까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각 교파가 다르니 일은 많이 해도 분산되어 하기에 흔적이 없어진다.
우리 기독교는 그 사회를 바르게 이끌고 가는 사회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사회에 끌려가는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교파주의나 개인주의에 너무 익숙해 있다. 그러니 연합이 안 되고 힘을 바르게 발휘하지 못해서 나약한 모습을 늘 보이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사회에서 따돌림이나 받는 형편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변명도 말고, 그렇다고 코가 빠져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처한 곳에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기 최선을 다해 바르게 진실하게 책임을 다하면 언제인가 제 자리로 돌아 올 것이다. 또 기독교가 다시 한국 사회의 견인차가 되어서 앞서 가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며 자만에 잠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와 같은 상황 말이다. 우리에게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선을 다 하면 놀라운 결과가 의외로 빨리 우리 앞에 올 것이다.
왜 우리가 알면서도 현실을 피하며 자신의 함정을 늘 파고 살았을까? 이는 지나친 수의 개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또 지나친 비교의 결과이다. 나는 나이다. 내가 아무개가 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경쟁을 하고 더 나아가 속여야 하기에 과대한 형용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른 교파보다 우리 교파가 커야 한다든가, 다른 교회보다 자기의 교회가 더 커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결과를 우리는 맞았다.
목사부터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무슨 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헤아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이지 결과나 숫자를 보시지 않는다. 우리의 재능에 따라서 결과를 헤아리는 것이다. 많은 것이 왜 나쁘겠는가? 좋지만 나에게 맞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우리 목사들은 알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일반 성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다. 지나친 기대나 숫자에 목을 매지 말자. 거기서 오는 압력 때문에 목사가 더욱더 숫자에 예민하고 과장법을 구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책임은 목사들에게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본 자리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열심히 기도하자.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며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계산 될 것을 생각하며 살자. 누가 우리에게 무어라 하든지 개의치 말고 자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자.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 하실 것이다. 지나친 허영을 버리자.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욕심에 왜 빠졌는가? 허영 때문이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영역을 알려하면 무서운 결과가 기다린다.
형용사 없이 있는 대로 보이고 살자
지나친 욕심은 자신을 멸망시킨다. 현실에 충성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높여 주신다. 그때 우리에게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여시고 지혜도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하여 책임을 지실 것이다. 믿음은 바른 자리에서 자기의 몫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이다. 욕심과 허영 속에서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다음을 준비하신다. 그래서 오늘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다. 오늘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큰 내일을 흉내 내다가 더 낮은 자리로 떨어지는 경우를 늘 본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시고 목사로 세울 때 가지신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따라서 순종하면 언젠가 하나님은 우리를 현대 용어로 표현하여 업그레이드 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또 필요하면 메가에서 기가로 올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알고 일하면 승리하게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자책하며 주저앉을 필요도 없다.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충성된 일꾼이 되자. 지나친 형용사를 이제부터 사용하지 말고 있는 대로 보고 말하며 살자. 작은 자가 큰 척 할 필요도 없고 큰 자가 작은 척 할 필요도 없다. 있는 대로 보이고 살자. 그래야 우선 내 마음이 편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할 것이다. 더 이상 다른 것에 쫒기는 삶을 살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잘 보이려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일은 더욱더 하지 말자. 하루를 마치면 덧없는 기쁨 때문에 잠을 잘 자고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자. 그럴 때 좋은 내일이 기다릴 것이며, 저절로 교회는 발전하고 사회는 우리를 존경하며 복음이 힘차게 증거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뭐라고 말씀하실 것인가만 생각하며 일하자. 사람의 종이 스스로 되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감사하며 살자. 이때 우리 앞에는 놀라운 복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기쁨으로 일하자.
한재홍 목사
뉴욕신광교회 담임목사,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증경회장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