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기범 목사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3가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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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ㆍ2012-03-1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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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수도원 수도회(PAM, 원장 김창길 목사)는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나온 4호에는 소기범 목사가 쓴 "한국교회와 바울의 영성"라는 기고문이 나온다. 발행인의 허락을 받고 이 기고문을 소개한다.
지난해 한국총회에서 관상기도를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소 목사는 논점은 관상기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문제가 되는 세가지로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소개하고 있다.
소기범 목사는 PAM 신학자문위원이다. 시카코 신학교 조직신학으로 석사(MA)과정을 마친 후 ‘지크데리다의 철학으로 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유명모의 합리성 연구’로 철학박사(Ph,D)학위 취득하고 현재 미주장신대 영성신학 교수(NY)로 있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한국교회와 바울의 영성
한국교회에서 '기독교 영성'은 최근 하나의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책들과 워크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또한 이러한 모습을 견제하는 영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영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교회 성장을 위해 유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발견됩니다. 본 글에서는 한국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 영성의 오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영성의 예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예는 지난해 10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주요 교단총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교단은 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매체들이 주요 교단들의 총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하였습니다.
“예장합동 신학부는 관상기도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예장합신 신학연구위도 관상기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관상기도는 기본적으로 카톨릭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배우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뉴스앤조이 2011년 10월 6일)”
비록 여기에서 논점은 관상기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고 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카톨릭의 영향입니다. 이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의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입니다. 이제 각각의 요소들이 가진 양성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에 대해 바울의 영성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성의 목표
먼저 ‘신비주의’에 얽힌 오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영성의 목표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계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추구할 때,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서 이것을 통제하거나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기독교 안에는 성경의 계시를 모든 계시의 우월한 근거로 두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기독교 영성 또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계시에 우월성을 두는(심지어는 문자화된 계시인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로서는 영성이 가진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성이나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나 신비한 경험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성에 대한 첫 번째 오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오히려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영성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감정적인 확신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회자들을 찾아가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서 영성가들이 신비주의라는 이름 하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입니다. 영성가들은 스스로 대단한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이 신비 경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을 이러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책으로 남깁니다. 영성가들이 관심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변화되는 삶이지, 신비한 경험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성적 삶을 시작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곧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와 삶에 관심을 갖는 영성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만큼 신비란 경험을 많이 한 삶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삶을 이 경험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 신비경험이 가르쳐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것에 뒤따르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도 많은 신비체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것처럼 언급하는 삼충천에 올라간 사건도 그 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직접 말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다메섹 사건도 사도행전을 통해서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경험한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깨닫게 해주었는지를 전해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의 목표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영성의 목표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입어야 할 옷
두 번째, 한국교회는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이 입고 있는 옷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유는 영성훈련의 모습 가운데 뉴에이지의 명상이라든지, 불교의 수련과 유사한 소위 이교적 요소가 있어서 종교혼합주의 성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영성훈련에 나오는 명상과 수련방법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증진시켜주는 방법과 개념을 자신들이 살아가던 문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당시의 철학, 세계관, 통용되던 훈련들을 영성가들이 자신의 영성에 입어야 할 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영성의 목표와 방법을 잘 성명해주는 문화적인 개념과 훈련 방법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신학과 영성은 당시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영성훈련이 새로운 옷을 입고 기독교의 복음을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을 혼합주의라는 잣대로 보기 보다는 그 옷이 내용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자신의 복음과 영성을 설명하는 창조적인 영성가 였습니다. 바울의 비전은 당시 1세기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이 부활의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라는 것을 발견하고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가졌던 급진적이고 창조적인 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헬라문화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두 문화 속에 살아가는 정체성은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을 헬라의 새로운 옷으로 덧입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먼저 될 필요가 없다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생각을 한 사람이었고, 헬라 사상을 들여와 유대교와 복음을 재해석한 신학자 였습니다. 바울이 오로지 관심한 것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라는 복음이 어떻게 바르게 해석되고 삶에서 실천될 것인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입히기 위한 문화의 옷을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는 속의 내용에 관심하지 않고, 그 것을 감싸고 있는 옷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옷 안에 숨겨진 영성의 의미와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맞는 영성의 옷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영성과 은혜의 관계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영성이 카톨릭적이라는 비판을 자주합니다. 카톨릭 신학의 주입, 행위에 대한 강조에 개신교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 또한 무언가 행위와 관련되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카톨릭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행위보다는 믿음이 강조되는 개신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이 크다고 하지만 그들 또한 카톨릭을 개혁하기 위해 시작하였지 카톨릭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가들 이후에 나타난 카톨릭과 결별하려고만 하는 태도에서 개신교는 기독교 전통에 면면히 흐르는 영성전통을 소흘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값싼 은혜 만을 강조하고 삶과 신앙이 괴리되어 있는 기복적인 신앙의 모습니다.
개신교가 카톨릭과 무조건적으로 결별하면서 가장 크게 잃어버린 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1500년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영성전통입니다. 영성이 카톨릭적이다’는 말을 통해 우리는 카톨릭과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는 1500년의 영성전통을 모두 내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목욕물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경우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한 전통인 카톨릭에서 우리는 그들이 잊지 않고 발전시켜 온 영성전통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카톨릭에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두 전통 간에 가장 큰 이슈로 남아 있는 행위와 은혜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성에 대한 오해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이에 대한 답변을 줍니다.
바울의 영성은 행위와 은혜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논쟁이 일고 있는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소위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는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의 대표주자 톰 라이트(N.T. Wright)는 율법과 행위, 믿음과 은혜를 어느 것 하나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해석하는 학자입니다.
그에 따르면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옳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더 이상 믿음과 율법이 충돌하지 않고, 행위와 은혜가 긴장 관계에 있지 않은 바울에 대한 이해입니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내는 삶이고, 이 삶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행위와 은혜,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영성을 이해할 때에 이제 더 이상 ‘카톨릭적이다’ ‘개신교적이다’ 논쟁하기 보다, 각자의 전통속에 담겨 있는 보화들을 어떻게 서로 배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지난해 총회에서 몇몇 교단들이 보여준 영성에 대한 오해들은 한국교회가 가진 한계를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기복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한 관심 속에 삶의 변화에는 관심하지 않는 한국교회, 세상과 문화를 품지 않는 교회, 전통의 틀에 갇혀서 값싼 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영성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이에 뒤따르는 변화된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국교회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입니다.
참고 문헌
Calvin J Roetzel, The Letter of Paul (WJK, 2009)
E.P. Sajnders, Paul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James D. G. Dunn, Word Biblical Commentary 38AB Romans (Thomas Nelson, 1988)
Marcus Borg & Dominic Crossan, The First Paul Vision (Harper One, 2010)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Eerdmans, 1997)
_____________, Justification: God’ Plan and Paul’ Vision (IVP, 2009)
_____________, Paul in Fresh Perspective (Fortress, 2009)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지난해 한국총회에서 관상기도를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소 목사는 논점은 관상기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문제가 되는 세가지로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소개하고 있다.
소기범 목사는 PAM 신학자문위원이다. 시카코 신학교 조직신학으로 석사(MA)과정을 마친 후 ‘지크데리다의 철학으로 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유명모의 합리성 연구’로 철학박사(Ph,D)학위 취득하고 현재 미주장신대 영성신학 교수(NY)로 있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한국교회와 바울의 영성
한국교회에서 '기독교 영성'은 최근 하나의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책들과 워크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또한 이러한 모습을 견제하는 영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영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교회 성장을 위해 유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발견됩니다. 본 글에서는 한국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 영성의 오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영성의 예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예는 지난해 10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주요 교단총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교단은 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매체들이 주요 교단들의 총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하였습니다.
“예장합동 신학부는 관상기도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예장합신 신학연구위도 관상기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관상기도는 기본적으로 카톨릭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배우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뉴스앤조이 2011년 10월 6일)”
비록 여기에서 논점은 관상기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고 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카톨릭의 영향입니다. 이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의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입니다. 이제 각각의 요소들이 가진 양성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에 대해 바울의 영성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성의 목표
먼저 ‘신비주의’에 얽힌 오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영성의 목표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계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추구할 때,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서 이것을 통제하거나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기독교 안에는 성경의 계시를 모든 계시의 우월한 근거로 두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기독교 영성 또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계시에 우월성을 두는(심지어는 문자화된 계시인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로서는 영성이 가진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성이나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나 신비한 경험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성에 대한 첫 번째 오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오히려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영성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감정적인 확신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회자들을 찾아가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서 영성가들이 신비주의라는 이름 하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입니다. 영성가들은 스스로 대단한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이 신비 경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을 이러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책으로 남깁니다. 영성가들이 관심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변화되는 삶이지, 신비한 경험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성적 삶을 시작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곧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와 삶에 관심을 갖는 영성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만큼 신비란 경험을 많이 한 삶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삶을 이 경험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 신비경험이 가르쳐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것에 뒤따르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도 많은 신비체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것처럼 언급하는 삼충천에 올라간 사건도 그 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직접 말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다메섹 사건도 사도행전을 통해서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경험한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깨닫게 해주었는지를 전해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의 목표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영성의 목표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입어야 할 옷
두 번째, 한국교회는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이 입고 있는 옷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유는 영성훈련의 모습 가운데 뉴에이지의 명상이라든지, 불교의 수련과 유사한 소위 이교적 요소가 있어서 종교혼합주의 성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영성훈련에 나오는 명상과 수련방법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증진시켜주는 방법과 개념을 자신들이 살아가던 문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당시의 철학, 세계관, 통용되던 훈련들을 영성가들이 자신의 영성에 입어야 할 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영성의 목표와 방법을 잘 성명해주는 문화적인 개념과 훈련 방법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신학과 영성은 당시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영성훈련이 새로운 옷을 입고 기독교의 복음을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을 혼합주의라는 잣대로 보기 보다는 그 옷이 내용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자신의 복음과 영성을 설명하는 창조적인 영성가 였습니다. 바울의 비전은 당시 1세기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이 부활의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라는 것을 발견하고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가졌던 급진적이고 창조적인 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헬라문화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두 문화 속에 살아가는 정체성은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을 헬라의 새로운 옷으로 덧입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먼저 될 필요가 없다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생각을 한 사람이었고, 헬라 사상을 들여와 유대교와 복음을 재해석한 신학자 였습니다. 바울이 오로지 관심한 것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라는 복음이 어떻게 바르게 해석되고 삶에서 실천될 것인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입히기 위한 문화의 옷을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는 속의 내용에 관심하지 않고, 그 것을 감싸고 있는 옷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옷 안에 숨겨진 영성의 의미와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맞는 영성의 옷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영성과 은혜의 관계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영성이 카톨릭적이라는 비판을 자주합니다. 카톨릭 신학의 주입, 행위에 대한 강조에 개신교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 또한 무언가 행위와 관련되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카톨릭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행위보다는 믿음이 강조되는 개신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이 크다고 하지만 그들 또한 카톨릭을 개혁하기 위해 시작하였지 카톨릭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가들 이후에 나타난 카톨릭과 결별하려고만 하는 태도에서 개신교는 기독교 전통에 면면히 흐르는 영성전통을 소흘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값싼 은혜 만을 강조하고 삶과 신앙이 괴리되어 있는 기복적인 신앙의 모습니다.
개신교가 카톨릭과 무조건적으로 결별하면서 가장 크게 잃어버린 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1500년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영성전통입니다. 영성이 카톨릭적이다’는 말을 통해 우리는 카톨릭과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는 1500년의 영성전통을 모두 내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목욕물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경우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한 전통인 카톨릭에서 우리는 그들이 잊지 않고 발전시켜 온 영성전통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카톨릭에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두 전통 간에 가장 큰 이슈로 남아 있는 행위와 은혜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성에 대한 오해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이에 대한 답변을 줍니다.
바울의 영성은 행위와 은혜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논쟁이 일고 있는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소위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는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의 대표주자 톰 라이트(N.T. Wright)는 율법과 행위, 믿음과 은혜를 어느 것 하나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해석하는 학자입니다.
그에 따르면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옳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더 이상 믿음과 율법이 충돌하지 않고, 행위와 은혜가 긴장 관계에 있지 않은 바울에 대한 이해입니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내는 삶이고, 이 삶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행위와 은혜,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영성을 이해할 때에 이제 더 이상 ‘카톨릭적이다’ ‘개신교적이다’ 논쟁하기 보다, 각자의 전통속에 담겨 있는 보화들을 어떻게 서로 배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지난해 총회에서 몇몇 교단들이 보여준 영성에 대한 오해들은 한국교회가 가진 한계를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기복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한 관심 속에 삶의 변화에는 관심하지 않는 한국교회, 세상과 문화를 품지 않는 교회, 전통의 틀에 갇혀서 값싼 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영성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이에 뒤따르는 변화된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국교회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입니다.
참고 문헌
Calvin J Roetzel, The Letter of Paul (WJK, 2009)
E.P. Sajnders, Paul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James D. G. Dunn, Word Biblical Commentary 38AB Romans (Thomas Nelson, 1988)
Marcus Borg & Dominic Crossan, The First Paul Vision (Harper One, 2010)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Eerdmans, 1997)
_____________, Justification: God’ Plan and Paul’ Vision (IVP, 2009)
_____________, Paul in Fresh Perspective (Fort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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