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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현 목사 "한국교회 위해 순교한 R.J.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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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3-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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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위해 순교한 토마스

“1866년 9월 5일, 27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의 한 젊은이가 창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을 찌른 이에게 성경책 한 권을 건네며 받길 권하였다.” 이 사건은 로버트 토마스가 평양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한 장면이다. 과연 140여 년 전에 평양 대동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당시는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오로지 성경책을 전하기 위하여 미상선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입국한 토마스는 한국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 순교하였고, 그의 핏방울은 헛되지 않았고, 때가 되매 한국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후일에 그로부터 장사포에서 성경을 받은 홍신길 소년, 석호경에서 성경을 받은 김영섭, 김종권, 등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만경대에서 성경을 받은 최치량은 후일 강서와 평양교회 창립자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를 죽이려던 박춘권은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복음을 위하여 하시는 일은 다 이해할 수 없다. 당시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라고 탄식할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일을 통해 복음의 피가 흐르고 흘러 불신영혼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토마스의 생애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 레드너셔주 라이더에서 영국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 저매인은 1853년 14세에 크란도버리 컬리지에 입학하여 라틴어, 불어, 헬라어 등을 공부하였고, 다시 뉴컬리지 신학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사의 길을 준비하였다.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아버지에게 가급적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돈을 아껴 생활하므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복학하여 그 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2년간 공부하였다.

그가 어떻게 회심했는지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가 목회하였던 웨일즈 레드너셔 라이더 지역에는 부흥이 일어났고 있었으며, 우리의 주인공 토마스가 9세 미만이었는데, 그때 회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부흥에 대해서 교회사가 존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교회는 부흥하여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웨일즈어로 올리는 경배와 찬양은 라이더 전역에 퍼져 가고 있으며,”라고 하였다.

토마스의 성격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성실하게 의학공부를 마쳤지만, 이때에 인간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에 관심을 갖고 고민도 하였다. 그는 매우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므로 의사직을 포기하고 일단 잉글랜드 온들(Oundle)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사실 그가 의사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만남의 복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온들에서 그는 자신을 초청한 학교의 교장, 앨프레드 뉴스를 만나는데, 그는 온들 회중교회 담임목사였다. 본래 앨프레드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준비하였지만, 23세에 호머튼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선교사직을 포기하고 목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토마스는 바로 그를 통해 중국을 알게 되었고,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국선교에 헌신하게 한 인물은 중국선교를 하다가 잠시 귀국했던 록하트(Lockhart)였다. 그는 당시 20대 미혼으로 중국 마카오에서 의료선교를 하였던 분으로 1858년 영국에 돌아와 그 다음해 10월 뉴칼리지에서 설교하러 갔다가 토마스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토마스를 중국선교사로 헌신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분은 그가 런던에 있을 때 다녔던 웨스트민스터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사무엘 마틴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했으나 건강상 그 사명을 감당치 못해 보내는 선교사로서 해외에서 선교하는 이들을 힘껏 도왔던 것이다.

토마스가 중국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미 런던선교회(LMS)는 근대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를 인도에 첫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807년에 모리슨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토마스는 1861년 4월 25일, 런던선교회에 중국선교사로 가고자 지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런던선교회는 중국을 집중해서 복음으로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중국선교를 위한 열정의 글을 보면,

“저희 희망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부인하는 정신으로 사역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3년 전에 헌신한 이후로 신중하고 진지하게 기도해 왔으며, 이방인의 개종으로 우상 숭배가 몰락하는 선교사역을 진지하게 갈망하는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는 1863년 뉴컬리지를 졸업하고, 그해 5월 29일,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와 결혼했는데 토마스는 24세, 그의 부인은 26세였다. 그리고 이들은 주의 은혜로 평생 해로하며 행복하게 사길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6월 4일, 아버가번니(Abergavenny) 하노버교회 예배당에서 목사안수식과 선교사 파송식을 동시에 하였다. 그리고 7월 21일 아내와 함께 그라베센드에서 폴리마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했다.

중국선교사로 출발

그 배 안에는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 기독교병원 감독으로 임명받은 다젼 선교사 부부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을 받은 윌리암슨 선교사 부부가 동승하였다. 윌리암슨은 지난 1855년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마치고 이번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푸(오늘날 연태) 지부 총무로 파송을 받아 가는 도중이었다. 토마스 부부는 그 틈에 끼어 선교에 대한 벅찬 기대를 가지고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항해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면서 갔다.

긴 4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1863년 12월 초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본국의 런던선교회에 편지하길, 중국에 무사하게 도착했다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 부부는 기후와 문화, 음식, 언어 등 모든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견디었지만, 문제는 임신한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었다.

음식도 맞지 않고, 문화 적응도 힘들고, 다른 곳에서 남편만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본부가 있던 내륙도시 항구로 출장간 사이 이웃 미국 선교사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그녀는 충격을 받아 하혈하면서 유산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그만 1864년 3월 24일 소천하고 말았다. 이것은 토마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런던선교회에 보내는 토마스의 편지에 기록하길,

“이 사건으로 나는 완전히 실의에 빠졌습니다. 나는 완전히 상심하였습니다. 더 이상은 쓸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려고 하니 슬픔이 또다시 복받쳐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심기일전하여 재기하기 위해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교할 축복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으로 판단하고 1864년 12월 7일,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는 산동성 지푸(오늘날의 연태)에 있는 윌리암슨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특별한 묘안이 없었고, 자신의 생활을 하기 위해 지푸 세관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성령께서 다시 선교의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같이 지속적인 부흥을 주시어 일하게 하신다.

한국방문

토마스는 통역관 시절, 외국인과의 교제를 통해 중국어, 몽골어, 러시아어를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사람, 한국에서 온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천주교 신자로서 사업관계로 지푸에 온 것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 상황을 전달 받았고, 당시 쇄국정책으로 한국에는 입국하지 못한다는 것과 천주교 박해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한국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역을 준비하여 첫 번째 한국방문을 시도 하였다.

이때 윌리암슨은 한문성경을 후원하여 주었고, 중국인 우문태의 배를 타고 김자평과 최일선의 안내로 1865년 9월 4일, 지푸를 출발,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 근처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때 토마스는 한문성경만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으나, 단지 한 가지 배운 사실은 한국의 박해상황의 경험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종교서적을 구입하는 사람은 참수 혹은 최소한 벌금과 투옥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배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에 종이 뭉치 하나를 던지고 남해를 행해 달아났다. 그 종이 뭉치 속에는 종이 한 묶음과 16권의 금서와 서양달력이 있었다.”

한국적 상황을 인식하고 철수한 토마스는 다음 기회를 엿봐야 했다. 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었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많은 상품을 실고 두 번째로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이때 토마스는 이 배의 안내원으로 부탁을 받았고, 토마스는 윌리암슨로 부터 많은 성경을 후원받아 함께 승선하였다. 그리고 셔어먼호는 1866년 8월 대동강 입국에 진입하였다. 평안도 감사는 문청관을 보내 입항한 이유를 물었다. 당연 통상문제였기에 감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상선은 이를 묵살하고 평양시 대동강 하구 보산까지 들어갔다. 마침 여름 장마철이라 대동강은 폭우로 홍수가 나고 만조가 되어 배는 포리에 정박하였을 때,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 500권을 배포하였고, 계속 배는 만경대까지 입항하였다. 이곳은 평양성에서 10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여기서도 토마스는 열심히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순교

그런데 함께 동승했던 중국인 이현익이 관원들에게 붙잡혀 선원들은 총을 난사하였고, 평양성 관군들은 이에 대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현익이 구출되었지만, 셔어먼호와 관군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사태를 평양감사 박규수는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조정에서 고종은 셔어먼호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배는 퇴조가 되어 진흙에 걸려 오갈 수 없도록 좌초된 상황이었다.

관군은 불화살을 셔어먼호에 날리고, 배는 불타기 시작하였으며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배에서 뛰쳐나오는 선원들은 관군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거나 창으로, 칼로 살해당했으며, 토마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토마스는 1866년 9월 5일, 27세 약관의 나이에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자신의 고귀한 육체를 주의 복음을 위해 아름답게 순교의 제물로 드렸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두어 달 후에 메도스회사가 미국 전권공사인 벌링게임에게 편지하길,

“교역차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문자들을 모두 죽인 조선 정부의 행동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볼 때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릎쓰고 각하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비록 그가 선교의 꿈을 모두 펼치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으니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고, 그때 20세였던 이신행은 한 권을 얻었고, 그녀는 평양 최초의 여교인이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은 오랫동안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당시 토마스는 수많은 성경을 배포하였는데, 정부에서 그 모든 성경을 몰수하라는 명령으로 성경을 소지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리든지, 강에 던지든지 하였다.

그러나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 벽지로 사용하였다.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개조, 마포삼열과 한석진을 투숙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의 전도로 최치량은 평양 최초의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선교하러 올 때, 토마스의 성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고 한다. 이미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토마스를 통해 준비시켜 주셨던 게다.

우리 주님은 토마스의 순교를 받으시고,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의 순교로 인해 한국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섭리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이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죽는 이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지금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훗날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게 되리라.

한국의 초기 역사를 보라.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무리한 선교여행을 마치고 부산에서 천연두에 감염되어 소천 하므로 호주장로교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캐나다 독립선교사인 윌리암 맥켄지의 소천으로 캐나다 장로교선교부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린 자식을 땅에 묻고, 부인과 자신이 순교함으로 이 땅에 복음이 힘차게 전파되었고, 오늘날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그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토마스는 비록 평양 대동강 쑥섬에서 관원의 창에 맞아 순교함으로 젊은 나이에 주님 품으로 갔지만, 그는 첫째, 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의사였으나 복음을 위해 과감히 의사직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에서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으나 다시금 본래의 사명을 깨닫고 한국에 복음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이는 그의 도전적인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리라. 분명히 성령님이 그의 영혼가운데 부흥을 일으키어 그가 다시 영적 힘을 얻어 성경을 가지고 한국을 행해 출발했던 것이리라.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지라도 주의 영이 함께 하면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을 배운다.

둘째,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성경을 들고 첫 번째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면서 전도하였다. 물론 이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거부하고, 성경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이 복음을 위해 다시 방문을 한 게다. 두 번째 평양에 방문하였을 때도 그는 부지런히 윌리암슨이 후원한 성경을 열정적으로 나눠주었다. 그때 성경을 받은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런 열정은 희생으로 표출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성경을 받은 이들이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되었다는 점은 기독교 역사의 역설이라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그는 희생을 각오한 사람이었다. 당시 한국에 입국하는 데 있어 위험하였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입국한 것은 그의 희생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주의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더 숭고하고 거룩한 것이 어디 있을까? 당시 한국 정황으로 볼 때, 입국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자진해서 그 길을 선택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주님의 희생의 십자가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였고, 자신을 내어 주어서라도 무지한 한국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심이 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린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에 지금의 우리 연약함을 보며 한없이 부끄럽다.

조경현(세움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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