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 “청중을 깨우는 10가지 설교 전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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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21-09-09 07:4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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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4년 동안 개혁주의 목회자들을 배출해 온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학장 김성국 목사)가 설교에 포커스를 맞춘 Th.M.(신학석사) 과정을 개설했다. “세상의 위기는 팬데믹이 아니라 강단의 위기가 진짜 위기”라며 설교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과정을 개설한다고 선포했다.
9월 8일부터 11월 29일까지 진행되는 가을학기 설교 신학석사 과정을 앞두고 강의를 맡은 류응렬 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가 뉴욕에 와 신학교 개강부흥회, 퀸즈장로교회 1일 부흥회 등을 인도했다.
뿐만 아니라 류응렬 목사는 9월 8일(수)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강단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주제로 공개강좌를 진행했는데, 근래 보기 힘든 많은 목회자, 졸업생과 신학생들이 모였다.
류응렬 목사는 오전에는 “종교개혁가에게 배우는 설교”를 주제로 칼빈과 루터의 설교를 소개하며, 설교를 통한 제2의 종교개혁을 기대했다. 이 부분은 2차 기사로 나눈다.
오후에는 “청중을 깨우는 설교 전달법”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통해 목회자들이 고백하는 설교의 부족함을 나누고, 청중을 깨우는 전달을 위한 10가지 질문을 통해 전달법을 나누었다.
그 내용은 1. 원고를 보는가 청중을 보는가? 2. 설교자의 얼굴이 설교를 담아내는가? 3. 대화하듯이 친밀하게 설교하는 것 4. 설교가 청중의 눈에 그려지는가? 5.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는가? 6. 목소리가 사람가운데 확신을 심어주는가? 7. 청중에게 들려지도록 준비하고 설교하는가? 8.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가슴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9. 주위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0. 청중을 깨우는 설교자로 훈련을 하고 있는가? 등이다.
류응렬 목사는 설교를 전공으로 하는 신학석사 과정 개설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신학교에 어떤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학교의 방향과 정신을 보여주는 것인데, 설교학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는 학교 정신이 있어서 고마운 심정”이라고 했다. 또 많은 목회자들과 학우들이 설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퀸즈장로교회는 한 교회가 아니라 뉴욕의 모판 같은 교회이고 이민교회 역사에 등뼈 같은 교회”라고 격려했다.
류응렬 목사의 “청중을 깨우는 설교 전달법” 강의는 퀸즈장로교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도 생중계됐다. 청중을 깨우는 전달을 위한 10가지 질문의 각 소주제별로 이전 아멘넷 요약내용을 제공하고, 또 영상 링크를 제공하여 독자가 관심있는 부분을 보충하며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동영상] 류응렬 목사 “청중을 깨우는 설교 전달법” 강의 전체영상(출처 퀸즈장로교회)
목회자들이 고백하는 설교의 부족한 부분 연구한 적이 있다. 연구결과 전달력에 대한 고민이 24.6%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자료준비 부족인데 오늘날은 인터넷의 발달로 예전보다 나아졌다. 그리고 적용부분이다. 저도 적용부분이 가장 어렵다.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설교가 잘못하면 잔소리 되고, 한 이야기를 또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어려움이다. 그리고 예화 부족을 고민한다. 반면 본문의 이해와 해석에 대한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청중을 깨우는 10가지 설교전달법을 나누겠다.
1. 원고를 보는가 청중을 보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2746
원고를 보고 읽는 설교자들이 있다. 제발 총신 동문 중에 그런 분이 없었으면 좋겠다. 설교의 설(說)은 말하는 것이다. 문(文) 즉 읽는 것이 아니다. 원고에 집중해서 읽는 설교자는 기본예의가 없는 것이다. 성도들을 위해 밥을 지었으면 밥을 잘 나누는 것이 설교자의 몫인데, 원고를 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뉴스의 앵커가 그렇게 한다면 아무도 그 뉴스를 보는 사람은 없고 채널을 돌릴 것이다. 내용보다 전달이 문제이다. 요즘은 그런 목회자는 거의 없다. 물론 그렇게 하면 반드시 안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 역사는 일어나고 가능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성도들의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도록 해야 한다. 밥을 지었으면 잘 먹도록 하는 것이 어머니의 심정이다. 그런 면에서 조금이라고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몫이다.
설교를 하다 잊으면 어떻게 하는가?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눈이 안 좋아 원고를 읽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큼 영성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원고를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은 아니지만 목자는 더 좋은 것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냥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다른 데를 보고 이야기 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보다 3배가 더 높다고 한다. 대화식과 원고를 보고하는 설교가 3배나 엄청난 효과가 있다. 앞에 100명이 앉아있으면 30명이 귀를 기울이는가 아니면 90명이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차이이다.
사람을 보면서 설교한다는 것은 선풍기 돌아가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듯이 한분 한분을 보면서 그분에게 주시는 말씀같이 설교한다. 우리 교회 예배당은 2,100석 규모이다, 2-3부 예배에는 1천명 이상이 나오는데 뒤의 사람의 얼굴이 잘 안보인다. 그런데 한 사람만 눈여겨보아도 다른 사람은 자기를 보는듯한 효과를 나타난다. 한사람 한사람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사람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해도 다른 사람은 나를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을 보면서 설교하려면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준비없이 불가능하다. 오늘 ‘하나님이 힘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는데 흔하게 하는 설교는 아니다. 갑작스러운 설교부탁에 설교준비를 어제밤새도록 준비한 것이 아니다. 설교내용을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기억한다.
목회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고민하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 의지하는 최선이 필요하다. 그것에 가장 적합한 본문이 있다면 아마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하나님께 완벽하게 의지한 다윗같은 삶이 아니겠는가? 다윗의 삶을 가지고 보니 말의 힘줄을 끓어버린 내용이 나온다. 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다. 말씀에 순종해서 하는 것이다. 그 다윗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힘줄을 강조하다 무너지는 모습이 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 만나고 자신의 힘줄을 끓어버리고 죄인중의 죄인이라는 고백을 한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힘줄이 바뀌게 된다. 주님이야 말로 힘줄을 다 끓어버리신 분이시다.
이런 식으로 흐름을 가지고 어떤 순서를 가지고 설교할 것인가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누는 것이지 원고를 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선을 다해 철저히 준비해야 청중을 보고 설교할 수 있다. 설교하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잊어버릴 정도이면 안하는 것이 낫다. 설교자가 기억안날 정도이면 무슨 수로 성도들을 기억나게 하겠는가? 그런것에서 자유함을 가지라. 그래도 기억에 한계가 있으니 작은 메모가지고 나와 흐름을 확인한다. 원고를 읽지 말라는 것을 율법처럼 받아들이면 안되고, 필요한 것을 받아 하나라도 적용하라. 필요하면 거울을 보고 연습하라. 그래야 원고를 놓고 사람에게 대화하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설교는 문(文)이 아니라 설(說)이다. 말을 하는 것이다. 문(文), 읽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일어나 지금까지 했던 일을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정리안하고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원고 안 쓰고도 기억난다.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지 머릿속에 그려나가며 설교준비를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10년 지나도 한번 원고를 안보아도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머릿속에 흐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설교 준비할 때 문(文)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설(說)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가능하다.
2. 설교자의 얼굴이 설교를 담아내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3293
말보다 강한 것이 얼굴이다. 면접관이 사람을 보고 선택하는 시간은 얼마이겠는가? 이전에는 6초인데 요즘은 4초라고 한다. 그 시간 동안 100%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안 바뀌고 나머지 시간은 제대로 택했는가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바뀌는 경우도 있겠지만 첫인상은 거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가? 내용과 목소리와 태도이다. 3가지의 순위는 어떻게 되겠는가?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무엇인가? 보험을 가입할 때 깨알 같은 글을 읽지 않고 친구가 추천하니 가입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열고 지갑을 푸는 것은 무엇인가? 겨울옷을 살 때 영하 20도에 견디는가 보고 사는 여인이 있는가? 사놓고 왜 필요한지 설명한다. 사놓고 증거를 가지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한다. 딱 보고 사는 것이다.
실제 보면, 내용을 가지고 마음을 여는 것은 7%이다. 목소리로 마음을 여는 경우는 38%이며, 태도 몸짓 모습을 보고 결정하는 경우가 55%이다.
면접할 때 “들어오세요, 앉으세요”하면서 앉으면 6초 정도가 걸린다. 그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우리교회에 두 명 사역자를 모집하는데 60명의 목회자가 현재까지 지원했다. 그 60명 설교를 다 듣고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설교가 30분이면 3분을 들으면 거의 확실하고, 아니 20~10초만 들어도 거의 답이 나온다. 첫 목소리, 설교에 들어가는 모습, 태도 얼굴 눈빛만 보아도 웬만하면 다 된다. 학교에서 설교학 점수를 매길 때 처음에는 학생수가 많아 설교를 4분 시켰다가, 나중에 너무 많아 반을 나누고 8분을 시켰다. 4분 설교하면 다 듣는 것이 아니라 40초면 점수 매기고도 남는다. 첫 인상이 첫 모습이 중요하다. 태도가 중요하다.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강단에 서면 얼굴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표정이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다 묻어있다. 그 사람의 흰머리가 그 사람의 역사이다. 목회자가 강단에 선다면, 일주일 동안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고 연구하고 눈물을 쏟는 것을 가지고 나온다. 그러니 강단에 섰을 때 설교자의 모습이 중요하다. 설교자 얼굴이 과연 설교를 담아내고 있는가?
설교할 때 제스처를 사용한다. 저는 다니면서 설교하기에 자유롭지만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표정을 짓거나 몸짓을 할 때는 약하게 하면 뒤에서는 산만하게 보인다. 그래서 제스처를 할 때는 크게 하는 것이 좋다.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 진실한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은 평소의 삶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강단에서 얼굴이 중요하다고 화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먼저 나타나야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것이 “겸손하라. 당당하게” 라는 표현이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특히 청년에게 강조한다. 태도에서 겸손하지만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앞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우리교회 동영상으로 설교를 보면 전체 화면이 안 나와 못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앉아있다 중앙무대로 나오는 거리가 15보 정도이다. 걸어갈 때 성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걸어가는 것을 보면 힘이 막 생긴다고 한다. 제가 평소 걸음이라고 했지만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걷는다. 목회자가 힘없이 걷거나 처지면 성도들도 힘이 빠진다. 당당한 모습으로 가슴을 펴고 당당히 걸어 들어간다.
어떤 설교자는 강단에 서서 성경을 펴고, 원고를 정리하고, 머리를 만지고, 안경을 만지고, 코를 만지고 한다. 강단에 서면 준비된 모습으로 딱 서서 설교하는 것이다. 단 1초도 헛된 시간 보내지 말아야 한다. 클릭은 사람의 정신이 빠져 나가는 것이다. 설교를 듣다가 뭐 하나 클릭되면 다른 생각의 날개를 펼친다. 성도들에게 딱 주어진 25~30분이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강단에 서야 한다. 설교자는 얼굴을 바꾸려 하지 말고 삶을 바꾸어야 한다.
3. 대화하듯이 친밀하게 설교하는 것
https://youtu.be/nzn57ej61Fc?t=3837
강단에 서면 사나워지는 목사가 있다. 하지만 설교자는 목자이다. 양떼들을 먹이는 목자이다. 따스한 마음으로 서야 한다. 설교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다. 물론 설교자 혼자 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니 일방적 선포이기도 하지만, 대화하듯이 설교하는 것이다. 아버지도 자녀와 일방적이 아니라 대화하듯이 해야 효과가 있다. 수천 명 앞에 설교하더라도 한사람 앞에서 설교하듯이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잘 안되지만 그런 마음을 가자고 설교할 때 친밀하게 설교가 된다.
대화의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내는 최고의 힘은 친밀감이다. 목회자와 성도가 친밀하게 하나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보통 10-1000명 앞에서 설교해도 앞에서 대중을 향해 설교하다 보면 혼자서 때로는 독백조와 웅변조로 설교가 나올 때가 있는데 커뮤니케이션 상으로 보면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에게 하듯이 차분한 느낌으로 하는 설교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강조할수록 약한 소리로 분명한 어조로 한다. 막 크게 하면 머리가 아플 때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막 소리치는 분도 있는데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학적으로 전달력을 보면 좀 떨어질 수 있다.
강단에 있을 때 최고의 친밀감은 역시 목자의 심정이다. 예수님을 품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제가 중국에 처음 선교사 부름 받고 교수로 들어갔다. 중국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길거리 국수를 사먹는데 먼지가 많아 국물을 마시면 밑에 모래 같은 것이 가라앉아 있을 정도이다. 그때는 그것이 맛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 모든 것이 허용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어려움도 당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식으니 어느 순간 사랑만 베풀 것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같이 가지고 대해야 이들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의 날카로운 칼로 사람을 대하니 사랑이 하루아침에 죽었다.
예수님이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오셨는데, 만약 정의로 다가오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이다. 정의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심판이 아니라 죽으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죽으시고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시고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섬기시는 모습이 눈물겹다. 목자는 이런 것이다.
설명하는 목회자 되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목자라는 것은 품고 사랑하는 것밖에 없지 정의의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사용하게 되면 사랑은 순식간에 죽는다. 정의를 가지고 오셨더라면 누구도 주님 앞에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 마음으로 강단에 서기를 바란다.
집회를 다니다 보면 많은 목회자들이 장로들과 당회와의 갈등으로 고민한다. 그때마다 부탁한다. “저 한분이 변화되면 우리교회 모든 분이 정말 변화될 수 있겠구나. 예수님이 나를 그래도 사랑하셔서 나를 믿으시기에 저분을 맡겨주셨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라고 한다. 그렇게 제가 가르친 것을 제가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저의 교회 당회원들과 관계가 너무 좋다. 당회 할 때마다 얼굴을 박수치고 웃고 한다. 당회원들이 무엇을 하자고 하면 성경적으로 왔다갔다 할 정도가 아니면 다 알아서 하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우리교회에 누군지 모르는 마음에 부담스러운 한 분이 있는데 미워하지는 않으며 기도하고 있다.
강단에 그런 마음이 있어야 약이 나온다. 아니면 자칫 잘못하면 설교자에게 독이 나올 수 있다. 저 사람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치는 설교”라고 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식을 치는 부모는 없다.
4. 설교가 청중의 눈에 그려지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4678
설교자의 머릿속에 그려져야 청중에게도 머릿속에 그려지도록 만들어 낸다. 뉴스를 보면 남부지방에 100미리 비가 왔다고 하면 대부분은 100미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데 강의 물이 넘쳐 가슴까지 차고 소가 떠내려가는 것을 화면으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화면을 바라본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눈으로 보여주는 설교, 그것이 성도들의 눈과 귀를 열 수 있는 설교이다. 예수님이 설교할 때 비유로 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신다고 할 정도로 비유설교를 하셨다. 비유설교는 스토리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 누가 이웃인가를 물으며 딴지를 거는 율법사들이 온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자에게 가서 도와주는 것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아니하신다. 제사장 이야기, 레위인 이야기,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시고 “네가 생각하기에 누가 이웃인가? 선을 베푼 사람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천국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로 구원받는 자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면 끝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은 뭐와 같다고 계속 설명을 이야기로 꾸려 나가신다.
그래서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이야기식으로 구성되고 본문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은 설교라 볼 수 있다. 이것을 위해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조직신학 같은 내용인데, 이것을 눈으로 보여지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설교자들이 해야 할 몫이다. 이런 경우는 본문을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도 괜찮고, 좋은 예화를 가져와 설명하는 것도 괜찮고, 본문을 이야기로 잘 구성해 내는 것들도 다 필요할 것이다.
제가 많이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태양과 달의 관계 이야기이다. 청중의 눈에 그려지도록 하려면, 구름하나 없는 달처럼 깨끗하게 보여지도록 하려면 다듬고 또 다듬어서 청중들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언어가 힘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5.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4893
지금은 언어가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시대가 되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하버드대 리뷰 편집장까지 한 사람이다. 정확한 표현, 간결한 표현, 가장 알맞은 단어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4력을 굉장히 많이 강조했다. 영력, 실력, 체력, 언력이다.
영력은 당연한 것이고 목회자에게 영성이 최고이다. 그리고 실력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신학책 한권을 읽을 때마다 일반 문학책 하나를 읽도록 추천한다. 그래서 실력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체력도 중요하다. 기도는 매일 3시간 하는데 운동을 안 하는 목사는 안된다. 주의 영이 거하는 성전은 관리를 안하고 산에만 가서 기도한다고 나무뿌리 뽑는다면 안된다. 그렇다면 기도를 줄이고 운동을 해야 한다. 성전을 가꾸어야 한다.
언력이 중요하다. 제가 시를 좋아하다보니 제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지난주 주보 목회칼럼에 시를 하나 써 올렸는데 누구나 글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열 마디 할 것을 다섯 마디로 하는 언어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2백번 탈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 특징이 하나있다. 하드볼드체라고 하는데 말이 딱딱하고 간결하다. 김소월의 ‘진달래’가 얼마나 쉽고 1분 만에 쓸 수 있는 시 같이 보이는데 3년 만에 탈고한 시라고 한다.
허사를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 언어 중에 필요 없는 언어가 많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것입니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신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 찾아 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것입니다”를 뒤에 넣어야 안정된 것처럼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중 웃음)
말로 직접 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털썩 주저 않으셨습니다. 마침 사마리안 여인이 나오죠. 예수님이 묻습니다. ‘나에게 물 좀 주십시오.’ 깜짝 놀라는 여인, ‘당신이 유대인인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안의 관계를 아시죠. 적대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물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생수를 구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더 깜짝 놀란 여인이 묻습니다” 이런 식으로 금방 일어나고 있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장 그대로 보여주는 것, 설교는 글이 아니라 말이다.
긴 문장을 피하고 짧게 하라. 제가 설교가 다 부족하지만 제일 부족한 것은 긴 문장이다. 글 쓰는 것이 워낙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짧은 표현보다는 긴 표현이 자꾸 나온다. 물론 원고를 작성할 때는 짧게 하는 편인데, 설교를 하다보면 길게 나타날 때가 있다. 말이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준비가 덜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간결하지 않고 말이 길어진다. 글 쓰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6. 목소리가 사람가운데 확신을 심어주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5419
사람의 표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목소리이다. 똑 같은 목소리라도 목소리에 친근감이 느껴지고 그것에서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 목소리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가? 제가 목회하는 곳에서 식당에 가면 가끔 혹시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하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교인도 아니고 한 번도 저를 본 적이 없지만 라디오에 나오는 설교 목소리가 음식을 주문하는 목소리와 같다고 하면서 묻는 것이다. 제가 한 번은 TV방송에서 출연했는데 만난지 20년이 넘어가는 고향 친구가 밥을 먹다가 류응렬 목소리인데 하고 TV를 보니 제가 나와 있었다고 한다. 목소리의 힘이 이 정도로 큰 것이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내 목소리는 본래 그렇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친밀한 목소리를 위해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는 평소에 탄산음료 같은 것을 줄이고 차를 많이 마신다. 지키기 어려운 일이지만 토요일 같은 경우는 시간을 충분이 가지시고 쉬면서 주일에는 가장 깔끔한 모습으로 강대상에 선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더라도 주일에 설 때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같이 최고의 모습으로, 교인들에게 가장 깔끔한 목소리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주일이면 설교를 3~4번을 하는데 설교 중간에 목에 좋은 음료를 마시고, 목에 좋은 캔디를 먹기도 한다. 목소리를 잘 보호해서 가능하면 친근감 있는 목소리로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녹음해서 자신이 설교한 것을 들어보라. 저는 금요일 정도 설교준비가 되면 녹음을 한다. 30분 설교를 녹음하면 18분 정도 걸린다. 그러면 운동으로 뛰면서 들어본다. 제 목소리가 친근하게 들리는가, 발음이 정확한가, 성도들이 눈에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가를 확인한다.
7. 청중에게 들려지도록 준비하고 설교하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5836
들려지는 설교가 중요하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설교하는데 완악한 양떼들이 왜 이렇게 설교를 안 듣는가 불평하기 전에 본인을 돌아보아야 한다. 설교는 청중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것이다. 전달의 축은 무조건 청중이다. 본문은 저자의 입장이 중요하다. 저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전달 부분에서는 청중이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들을 수 있는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성육신적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언어표현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해돈 로빈슨 교수는 저서에서 “서재에서 준비할 때 임하지 않는 성령을 강단에서 기대하지 말라”라고 했다. 설교준비를 잘못하지만 말할 때는 괜찮다고 하는 분도 있는데, 말이라는 것은 무조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꼭 필요한 말과 꼭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서 경제적으로 본문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다.
준비되지 않는 성령을 강단에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저도 설교를 하다보면 탁~하고 클릭되는 부분이 있을 때가 있다. 그런데 “아 이것이다” 하고 클릭되는 5번 중에 4번은 감정적으로 순간 나온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기도하면서 준비되지 않는 것은 가급적 안하는 것이 좋다. 성령님이 인도할 때도 있지만 자기의 감정으로 순간 나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라는 말이 아니라 충분히 준비하라는 말이다.
설교가 들려지도록 하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문제로 내 것으로 들려지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 만일 목사님 모임이 아니라 집사들의 모임에 와서 설교를 부탁받았다면 아마 다른 본문을 택했을 것이다. 청중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분들에게 진짜 필요한 이야기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목회자는 고민해야 한다.
8.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가슴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6359
아무리 전달법이 중요하고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도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가슴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만 못하다. 하나님의 가슴을 품고 강단에 서야 한다. 목자의 심정으로 강단에 서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미소 지으며 웃으면서 설교하라.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감격과 기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강단에 서기 전에는 특별히 사모님들은 남편 목사님들을 잘 대해주라. 주일 아침에 교회에 오다 말다툼이라도 하고 나면 그날 설교를 힘들 때가 많다.
9. 주위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https://youtu.be/nzn57ej61Fc?t=6504
전달에서 중요한 것은 훈련이다. 주위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는 보통 목요일에 기도하고 설교준비를 하고, 금요일까지 설교원고를 완성을 한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반드시 아내앞에서 설교원고를 읽는다. 만약 바빠서 금요일에 못 읽으면 토요일에 읽는다. 아내보다 더 조언해 줄 사람은 없다. 아내가 설교원고를 듣고 혹시라도 한마디를 하면 10의 9는 묻지도 않고 고친다. 아내가 듣고도 쉽지 않는데 어떻게 성도들이 이해하겠는가? 설교자 본인은 설교를 준비했기에 설교내용을 훤히 꿰고 있지만 듣는 사람은 다르다. 아내가 말하면 무조건 듣는 것이다. 그리고 1부 예배를 마치고 나면 꼭 다시 묻는다. 때로는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제가 놓쳐버리는 것도 있다. 혹시 아내가 듣고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면 10의 9는 묻지 않고 고친다.
하지만 설교가 끝나고 나면 그때는 사모님들은 남편에게 칭찬만 하라.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지적하면 은혜가 다 날라간다. 하지만 설교하기 전에는 필요하면 고쳐주시고 남편은 무조건 들으시라.
전에 학교에 있으며 학생들의 설교를 평가할 때 고쳐야 할 것 5개와 칭찬하는 것 2-3개를 평가했다. 그러다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칭찬하는 것 5개와 고치는 것은 1-2개로 평가했다. 목회자들이 원하면 설교에 평을 해서 보낸다. 고쳐야 할 것을 많이 이야기 했더니 목회자들도 시험을 받고 기죽어서 못하겠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는 칭찬 5개와 고칠 것 하나 정도를 전해준다. 칭찬보다 더 큰 약이 없다. 잘못한 것은 하나 고치고 다음에 하나 또 고치면 된다.
10. 청중을 깨우는 설교자로 훈련을 하고 있는가?
https://youtu.be/nzn57ej61Fc?t=7182
좋은 설교자를 모방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모델이 될만한 설교자들이 있다. 한국교회로 보면 이찬수 목사의 설교는 임팩트와 전달력이 있다. 그런가하면 이동원 목사 같은 경우는 서론 본론 결론, 본문제시, 예화 적용이 아주 탁월하게 교과서처럼 잘한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 대가의 설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대가의 경우 본문 해석은 실수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달은 다 뛰어나다.
지금은 무너져있지만 빌 하이벨스 목사는 1주일에 35시간을 설교준비 한 사람이다. 조엘 오스틴은 설교해서는 안 될 비기독교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고 있지만 목요일에 하루 종일 설교를 준비하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설교내용을 암송한다. 그래서 설교원고를 한 자도 안보고 설교한다. 고 옥한흠 목사는 1주일에 30~35시간을 설교준비하신 분이다.
저는 1주일에 15시간 정도 설교준비를 한다. 이전에는 주일설교 외에 토요일과 수요일에도 설교를 하고 많이 했는데, 지금은 주일설교와 그 외 2편 정도 설교준비를 한다. 주일설교 외의 설교는 간단하게 정리정돈해서 설교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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