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 목사] 목회자 위상 회복을 위한 칼럼 (5) 은혜를 아는 자의 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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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2024-04-09 19: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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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어떤 목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무려 3시간정도를 한자리에 앉아 대화를 했는데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생각해 보니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아있는 말이 없다. 그냥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분과 했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내가 한 말은 약 10% 정도라면 그분의 말은 90%를 했다고 정의하고 싶다. 한마디로 거의 그분 혼자서 말을 했고 난 거의 들어주는 쪽에서 대화를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목사님의 말이 워낙 강하다 할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라 말에 토를 달고 말싸움을 하기도 뭐하고 또 말의 내용이 한마디로 다 부질없는 이야기들이었기에 그냥 듣는데 거의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한 목사를 만나면 속이 다 시원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만 했으니 시원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듣는 나는 어쩔 수 없어 들어주었을 뿐이지 내 입장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고 헤어질 때가 많았었다. 한마디로 그분의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들어줄 마음에 자세가 없었던 것이 당시의 나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상담학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상담의 기본은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일까 난 상처받은 목사님의 말을 들어 줌으로써 그분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쪽이 되었고, 들을 자세가 안 되었던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 쪽이 된 것이다.
목회를 하다 가끔 상처를 받았고, 분노가 솟을 때는 가정에서 폭발할 때가 많았다.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조차 제대로 못하고 억울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옆에 있는 만만한 아내에게 그냥 떠들어 댈 때가 많았었다. 아내가 내 말을 잘 들어 줄 때는 그래도 분노가 진정되는 듯 하지만 어떤 땐 내말에 토를 달고 내 약점을 지적할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나의 정당성을 불같이 토해낼 때가 많았었다.
내 억울함, 내 이론과 정당성 그리고 알고 있는 지식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보니 늘 스스로 자만에 빠져 혼자 위대하고 혼자 똑똑하고 또 상대적으로 주위에 목사들을 깎아내려서 나의 의로움을 정당화하려는 착각 속에 살 때가 많았었다.
목회에 어려움이 오고 고난의 골짜기를 걸으면서 나는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 지금도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 두 눈을 상실하고 소경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순간에도 나를 살리셨다는 것, 목회를 중단하고 목사직을 내려 놀 수밖에 없는 처절함이 엄습해 올 때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몰아칠 때도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던 나의 처지였던 것이 아니라 나를 끝까지 붙들고 계신 하나님 은혜라는 사실이 깨달았던 그때,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나를 살리신 그 은혜가 느껴질 때 난 할 말이 없었다.
맞다. 은혜를 아는 자라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나님 말씀이 들려지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삶인데 거기에 무슨 말을 더할까. 목사가 설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큰 특권을 부여받은 자인데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설교 외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을 수 있을까. 얼마나 목사가 말이 많았으면 “설교하지 말라”는 조롱거리 말이 생겼을까.
경청!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이해하고 이해받는 최고의 방법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세계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 데 그것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럼 성공의 태도가 뭘까? 바로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자는 할 말이 없다. 그냥 들어야 한다. 듣는 것이 단순히 어쩔 수 없어서 듣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배우기 위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듣는 자는 겸손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 많은 사람들을 보라. 말하는 그 속에는 전부 자신의 지식, 경험, 논리,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말만 한다. 아니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을 아예 차단해 버리고 자기 논리를 정당화시키려는 교만 때문에 목사들 위상은 아예 보이지 않는 것 아닌가.
목사는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전달하는 직책이고 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사람에게 전하는 직분이지 자기 논리나 지식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목사가 아니다. 즉 듣는 사람들이 목사다.
뉴욕교계가 올바로 서려면 서로 들어야 한다. 듣는 사람은 없고 모두 자기 말만 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자꾸 다툼이 생기는 것 아닐까. 더욱이 지도자가 되려면 들어야 하는 인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도자가 되면 더 말이 많다. 지금 뉴욕교계는 많은 목사님들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고 모순된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지도자 때문에 끊임없이 목사들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경청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남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 목사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목사는 열 마디 말을 한 마디 말로 줄여서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분쟁은 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슬기를 깨칠수록 감정을 억제한다. 어리석은 사람도 잠잠하면 지혜로워 보이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슬기로워 보인다.(공동번역 개정판 잠언17:27-28)
한준희 목사(뉴욕목사회 부회장)
(사진들은 코파일럿 AI를 사용하여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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