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열전 / 퀸즈장로교회 장영춘 목사 부인 장미은 사모 > 뉴스

본문 바로가기


뉴스

사모열전 / 퀸즈장로교회 장영춘 목사 부인 장미은 사모

페이지 정보

정보ㆍ2006-03-10 00:00

본문

아멘넷은 사모열전 6번째 주인공으로 퀸즈장로교회 장영춘 목사의 부인 장미은 사모를 인터뷰했다. 2006/03/10 자가 장미은 사모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열린 빌리그래함 뉴욕전도대회이다. 결신의 시간때 한 청년을 위해 결신과 축복의 기도를 인도하던 장 사모의 모습은 기자의 눈에 우뚝 띄었고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손이 갔다.

0310a1.jpg

장미은 사모는 인터뷰를 통해 개척교회에서 뉴욕 최대의 교회중 하나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여성의 섬세한 시야로 간증해 주었다. 기자가 대화한 장은미 사모는 장영춘 목사 처럼 강하게 보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내유외강형의 기도의 어머니였다.

장 사모는 먼저 "다시 태어나도 목사님과 결혼하고 싶다. 목사님과 결혼한 것을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또 돈을 아끼기 위해 지하 아파트에서 십년간을 살다가 이사 가던 날 "층계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심지어 꿈인 것 같아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장영춘 목사는 미국뉴욕교협 제정 <2005 특별 지도자 상> 수상시 "지하 아파트에서 고생하며 기도로 후원한 아내에게 상을 바친다"고 수상소감을 밝혔었다.

한국 신용산교회에서 학생과 강도사로 처음 만난 장영춘, 장미은 부부는 최고의 목회자와 기도의 후원자로서 40여년을 살아왔다. 부부의 목회여정을 같이 해보자. 아래는 인터뷰 내용이다.

사모로서 어려운 점이 많았을텐데?

한국과 미국에서의 사모의 위치는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는 대접받는 위치라면 이민교회 사모들은 어쩔 수 없이 부엌에서도 일해야 하는 순간들이 온다. 뉴저지에서 뉴저지장로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커피를 타거나 다과를 준비할 사람이 없어 직접 일을 해야 했다. 화장실 청소도 했으며 교회를 나갈 때 모든 점검을 했다. 뿐만 아니라 뉴저지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는 워낙 가난해서 파타임으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모로서 일을 하다 보니 피곤하고 주일이 되면 사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힘이 들어 목사님과 다투는 일도 있었다. 미국교회를 빌려 사용했기 때문이 조금만 소흘하면 당장 미국목사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목회를 시작하는 사모들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퀸즈장로교회 개척한 이야기를 해주시죠

74년 2월 퀸즈장로교회를 개척하고도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설거지, 청소 등 여러가지를 앞장서서 해야 할 입장이었다. 목사님은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집으로 같이 와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교회로 부터 제대로 사례비를 받지도 못했을 당시 주일이면 2-30여명이 집으로 왔다. 그때면 냉면을 준비했다. 냉면은 돈도 많이 들지 않으며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천 그릇 이상의 냉면을 말았다.

대규모 교인들이 몰려오면 우리 식구가 보름 먹을 것을 한꺼번에 다 해치웠다. 장로교단 목사님들이 뉴욕에 오시면 우리 집에서 15분이 리빙룸에서 자곤 했다. 2 베드룸 이었는데 한방은 서재로 사용했고 한방은 나와 아이들과 모여서 지냈다.

장 목사님 수상식때 지하 아파트 이야기가 나오는데?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이사를 와서 플러싱 35 애브뉴와 파슨 블러바드 사이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아파트가 깨끗해 마음에 들었다. 아파트 로비에 위치한 우리 집은 슈퍼바이저가 살던 곳이었는데 비가 오던 날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변기와 욕조를 통해 역류가 되어 올라왔다. 비가 오는 밤이면 목사님의 잠이 깰까 봐 조심해서 화장실로 가서 혼자서 타올로 싼 막대기로 물이 올라오는 구멍을 찌르곤 했다. 베이사이드의 사옥으로 옮길 때인 83년까지 십년동안 그 아파트에서 살았다.

비가 올 때 혹시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마음을 조이며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남편이 교협회장을 할 때 우편물을 집에 가져다 놓으면 워낙 습기가 차서 봉투가 붙을 정도로 습기가 많았다. 지하실 특유의 케케한 냄새로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누가 지하실에 산다고 하면 오히려 스튜디오에 살라고 말린다. 그 아파트에서 목사님과 밤늦게 까지 기름종이 먹을 입혀 주보를 찍어내곤 했다.

0310a2.jpg

이사를 가시지 그랬습니까?

중간에 이사할 기회가 있었다. 권사 한분이 몇 백 명 교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너무 힘들게 산다고 다른 집을 주선했다. 당시 아파트는 전기료를 포함해서 220불로 매우 저렴했다. 결국 십년뒤 260불일때 이사를 나왔다. 권사님이 소개한 몇 블록 떨어진 3베드룸 아파트를 보니 너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계약을 하고 커튼도 사고 들뜬 마음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날 밤 나에게 우리가 그곳에 반드시 이사를 가야 겠냐고 물었다. 자체 교회도 없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곳에 이사를 가지 않으면 일 년에 6천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순간적으로 불만이었지만 남편 말에 무조건 순종했다.

언제 이사를 가시게 되었습니까?

드디어 83년 교회를 건축했다. 목사님은 한국집회에 다녀 온 후 유사성 장질부사에 결려 탈수로 병원에 입원했다. 20파운드의 몸무게가 빠졌다. 병원에서 병이 전염성이어서 퇴원해도 격리하여 생활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장로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사택구입을 주선했다. 그때야 지하 아파트에서 탈출하여 지금 살고 있는 사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곳은 공기도 너무 좋았다. 이사 가던 날 층계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심지어 꿈인것 같아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

교회를 개척할때와 지금과는 사모의 역할이 다를텐데?

사모로서 처음에는 물건을 사고 픽업, 설거지, 화장실 청소까지 다했으나 일꾼과 교인들이 늘어나자 사모의 할일들이 달라졌다. 요즘은 교회에서 설자리가 별로없다. 만약 부엌이라도 들어가면 교인들이 놀라서 못들어 간다. 그래서 필요하면 마무리만 도와주는 정도이다. 옛날에는 한 푼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헌츠포인트 시장에 가서 과일과 고기를 사서 토요일 밤사이에 주일식사를 준비했다.

바자회를 할때면 가장 힘든 일은 내가 앞장서서 하고 교인들은 가능하면 쉬운 일들을 하게 했다. 이렇게 바자를 준비하여 작년에는 10만 불을 모금했다. 키머니인 재료값도 헌금으로 받고 바자회를 통해 모인 돈으로 선교를 위해 사용한다. 작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타 지교회의 사택을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교회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설명해 주시죠?

퀸즈장로교회를 개척하고 어려운 순간들이 닥치면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 목사님이 떠나면 나도 3-5일 금식기도를 목숨을 걸고 했다. 5년까지는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후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기도의 생활을 많이 했다. 그때 방언의 은사를 얻었고 어려울 때면 더욱 깊이 기도하는 것을 배웠다. 미워하는 교인이 생기면 처음에는 저 상대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얼마나 그 성도를 위해 기도를 했나 회개기도를 했다. 울면서 기도를 하다보면 5분이 지난 것 같은데 몇 시간이 지나곤 했다. 교인들이 필림처럼 연속되어 떠오르면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되었다.

여성성도들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합심기도회를 열며 "아무리 어려워도 기도하면 돼"라고 되 새겼다. 교회를 건축하고 기도의 방이 생겨 여성 지도자와 같이 열심으로 기도를 했다. "문제없어, 될꺼야"라는 기도의 소리가 가득했다. 현재 수요일 주부성경학교를 인도하며, 장년성경공부(50-65세), 목사님이 안 계실 때 화요일 새가족 교육을 인도한다.

장 목사님은 다양한 사역을 하시는 바쁘신 분이신데?

처음에는 목사님의 친구 목사분이 워싱톤 디시에 와 부흥회를 하는데 "우리 목사님은 언제 부흥회를 다니게 되나"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세계를 다니며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 후 처음 목사님이 집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장로님들이 공항에 나올 정도였으나, 횟수가 잦아져서 이제는 오히려 교인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심통을 부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목사님이 "당신이 그렇게 되라고 기도했잖아"라고 말하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이후 목사님이 다니시지 못하도록 기도를 시작했는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말이 다르게 나오기 시작하고 결국 세계를 움직이는 목사님이 되시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사모로서 어떻게 목사님을 내조하셨습니까?

사모로서 목사님을 도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관계와 자녀와의 관계이다. 교인 앞에서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부부는 남들이 너무 금실이 좋은 것 같다고 할 정도이니 감사하다. 다시 태어나도 목사님과 결혼하고 싶다. 목사님과 결혼한 것을 감사한다. 남편을 사랑한다. 남편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다.

남편과 처음 결혼했을 때 남편의 몸은 몸무게가 110파운드 정도로 위가 약했다. 한국에서는 링거를 맞을 정도였는데 결혼하고 건강이 좋아 졌다. 나는 목사님의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금은 건강보조 음식이 유행하지만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나는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신문을 스크랩하고 건강 관련 책을 읽으며 적용을 많이 했다. 영지버섯 등을 다려서 목사님에게 드렸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의 건강하심에 놀란다.

나는 목사님이 집에서 청소기한번 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눈이 와도 집 마당의 눈도 내가 치웠다. 은행과 자녀 일등 모든 일을 내가 담당하여 목사님은 오직 많은 시간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내조했다. 학교다닐 때는 타이핑도 내가 해드렸다. 지금도 주보의 설교와 원고 등을 교정해 드린다.

장영춘 목사님을 소개해 주시죠.

장 목사님이 매너가 좀 더 부드러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목사님은 엄하신 면이 있다. 아이들에게도 엄하게 하신다. 하지만 항상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하게 말씀하신다. 목사님은 굉장히 자상한 면이 있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에게 항상 먼저 전화하시는 분도 목사님이시다. 여행가면 나는 집을 잊지만 목사님은 항상 집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해외여행때 아이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이다. 내 생일때면 목사님은 사랑하고 수고한다는 시를 적은 메세지를 보내 주신다.

말씀이 없어 어려워하는 교인들도 있지만 누가 어렵다하면 발 벗고 나서 도와주신다. 집회에 가서 사례비를 받아도 오히려 어려운 개척교회를 도와주고 오시는 분이다. 오랫동안 퀸즈장로교회에 있다 한국에 가신 이기선 교수는 교회를 떠나면서 목사님은 "사랑이 물같이 흐르시는 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엄하게 할 때도 있지만 자상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만드시는 분이다.

목사님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목사님과는 한국 신용산교회에서 만났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영화 벤허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학생이었으며 목사님은 강도사로 고등부를 지도하는 관계로 처음 만났다. 목사님은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지금처럼 학생들은 목사님을 어려워 했다. 매사에 철저하시고 말씀을 잘 가르쳐 학생들을 영적으로 키웠다. 당시 나와 배웠던 학생들 중에서 목회자가 많이 나왔다. 퀸즈장로교회도 목회자가 많이 나와 목사님의 능력을 잘 말해주고 있다.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셨습니까?

나는 불신자 집에서 태어났다. 고위 공무원 출신인 아버지는 처음에는 교회 나가는 것을 인정하다 지나치게 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자 핍박을 했다. 나는 대학에 가면서 집근처의 개척교회에 나갔다. 아버지는 나를 때리고 성경을 불태웠다. 그리고 교회에 찾아와 목사님에게 욕을 했다.

나는 68년 1월 미국으로 왔다. 이대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시험을 합격했다. 미네소타대학원에 특별교육을 공부하기 위해 왔다. 그곳에는 목사님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목사님과는 대학교 때부터 가까워져 서로 편지를 연락하는 사이였다. 미국에 오니 목사님은 중국음식점에서 파타임을 하며 약한 몸으로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학업을 포기했다. 결혼한 후 파타임으로 일하며 목사님의 학업을 도왔다. 2년 반 정도 연애하고 결혼 한 셈이다.

부모님은 내가 결혼했다는 편지를 보내자 인연을 끓자고 연락이 왔다. 아버님은 외할아버지를 모셨는데 불신자였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는 천국에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도 안수집사까지 되셨다가 재작년에 돌아 가셨다. 어머니도 권사이다.

0310a3.jpg

퀸즈장로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퀸즈장로교회는 성경중심적인 보수적인 교회이다. 매일 한 장씩 푸는 성경문답서, 성경쓰기등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이다. 목사님은 설교준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하루종일 설교준비에 바쁘다. 준비가 늦어지면 주일 새벽 1-2시 까지도 말씀을 준비 하시는 분이시다. 성도들에게 올바른 말씀을 먹여야 한다며 30년을 하루같이 보내신 분이다.

퀸즈장로교회는 뜨거운 면이 있는 교회이다. 합심기도가 뜨겁다. 또 목사님은 음악을 잘 모르지만 듣는 귀는 열리신 분이다. 그래서 찬양대는 미국에서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중시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 찬양대를 만드신 분이 목사님이다. 목사님은 한국에서 부터 주일학교에 관심이 컸다. 퀸즈장로교회의 주일학교는 영아부, 유아부, 유치부가 있을 정도로 세분화 되어 있다. 비용이 들어가지만 2세 교육에 관심이 크므로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후배 사모님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LA에서 행복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개척교회 사모님들을 초청하여 간증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간증이 끝나고 화장실에 가니 한 사모가 힘들어 자살하고 싶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위로를 얻었다고 안아주었다. 나는 다시 지난 과정을 다시 밟으라면 하지 못할것 같다. 지금까지 어떻게 해 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자다가도 교회소리만 나오면 벌떡 일어났다. 꿈도 교회 꿈만 꿀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노력한 지난날에 여한이 없다. 교회의 여러 문제들이 사모를 시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사모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도를 다하시는 사모이신데?

나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기도하다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기도한다. 지금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도이다. 나와 목사님만 보는 교적부가 있다. 교적부에 레이블을 붙여 심방보고서를 통해 기도의 제목과 진행을 기록한다. 사순절 기간이면 금식을 하며 교적부를 넘기며 기도를 한다. 그리고 타지 출장을 가면은 비행기 안에서 교적부를 보며 기도를 한다. 전 교인을 위해 기도하는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래서 혹시 얼굴을 모르는 성도는 있을 지언정 모든 교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목사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 만약 목사님도 사람이니 실수도 할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종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또 만약 헌신한 목사님이 잘못되면 누가 충성을 하겠냐고 떼를 쓰기도 한다. 그렇게 매일 30분 이상을 기도한다.

특별한 은퇴계획이 있으십니까?

은퇴하면 선교에 관심이 많다. 목사님에게 선교지 훈련을 시켜 달라는 요청이 많은데 요즈음은 시간이 없어 불가능 하다. 앞으로 은퇴하면 선교지에 신경을 많이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교와 신문사일로 오히려 더 바빠 질수도 있을 것이다. 목사님은 성도들이 사준 골프채가 있지만 갈 시간이 없어 한 번도 못쳤다.

아드님도 목회자인데?

아들 녀석은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림도 없다. 젊은 세대들은 우리처럼 목숨을 바쳐 기도와 목회를 하지 않는다. 새로 오는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열심히 했다. 아들은 웨스트민스트신학교, 골든 코넬신학교를 거쳐 현재 트리니티 신학교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교수로 활동할 예정이다.

한인이민교회에 대해 한 말씀?

첫째 이민교회는 프로그램으로 부흥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저것 좋다는 프로그램을 닥치는 대로 교회에 맞추다 보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먼저 훈련을 받고 담임하는 교회에 적당한지 보아야 한다. 둘째 선교도 중요 하지만 2세 교육도 중요하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도 같이 교인이 감소하는 추세이다. 성인에 비해 학생부 인원이 작다. 주일학교 교육을 철저히 시키지 못하면 이민교회는 다음 세대에 문을 닫을 것이다. 2세들을 철저한 말씀과 신앙교육을 통해 신앙의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 셋째 숫자상의 선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선교지를 답사하고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액수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말씀 해주시죠?

사모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 목회에 간섭을 해서도 안된다. 당회의 결정을 물어 보지도 말아야 한다. 사모는 설치면 안된다. 사모는 항상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뒤에서 일해야 한다. 사모의 아이디어가 좋다고 해도 결국 나중에 보니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 경우가 많다. 나도 처음에는 실수를 했다. 그러자 "당신이 당회장이 되라"는 목사님의 꾸중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쓰기 위해서는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뉴스 목록

Total 107건 1 페이지
뉴스 목록
기사제목 기사작성일
하나임교회 이학권 목사 인터뷰 “내 목회의 마지막 교회” 2006-04-15
오준철 목사 세미나 "전도와 함께 목회통합시스템이 필요" 2006-04-02
조정칠 목사 "목자의 1% 정신" 2006-03-30
곽선희 목사 "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2006-03-28
최영기 목사 “믿음이 자라는 5가지 원칙” 2006-03-24
"어? 성경이 읽어지네" 주인공 이애실 사모 인터뷰 2006-03-26
가정교회를 처음 시작한 최영기 목사 파워인터뷰 댓글(1) 2006-03-24
주목받는 목회자, 뉴저지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 2006-03-22
볼리비아 윤도근 선교사 초청 선교보고 및 감사예배 2006-03-20
뉴브런스윅신학교 소개 / 1784년 설립 북미 최초 신학교 2006-03-16
로뎀선교회 예도해 목사 부부의 소명과 간증 2006-03-13
사모열전 / 퀸즈장로교회 장영춘 목사 부인 장미은 사모 2006-03-10
석정문 목사, 건강한 교회를 위한 그린오숀 전략 세미나 2006-02-07
최인혁 “찬양사역은 테크닉 보다 성령의 역사를 갈구해야” 2006-03-04
조정칠 목사 "목자는 양을 알아야 한다" 2006-02-23
효성교회 이영미 사모 “믿음으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 2006-02-19
가정교회는 과연 새시대의 목회 패러다임인가? 2006-02-15
19년 장로후 50세에 목사안수 받은 김요셉 목사 “나는 D학점 목회자” 2006-02-11
박병열 목사 “불행한 가정 때문에 상담학을 전공한 결과” 2006-02-11
정석기 목사, 61번째 저서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2006-02-11
조미경 콘서트,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2006-02-10
김영길 총장 “졸업후 세상에 기여하고 싶으면 한동대에 오라” 2006-02-08
염재용 목사 "칠무(七無)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니 기적 일어나" 2006-02-07
한세원 목사와 장혜순 사모 부부 "나의 약함을 자랑하련다" 2006-02-06
목회개발원 원장 전용복 목사 초청 중보기도학교 2006-01-31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