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선교회 예도해 목사 부부의 소명과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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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6-03-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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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목사회(황경일 목사)는 2006년 3월 13일(월) 빛과소금교회(정순원목사)에서 열리는 임실행위원회가 끝난 후 로뎀선교회 대표 예도해 목사를 초청하여 간증과 사역을 듣는 시간을 가진다. 불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예배당에서 담배를 피우던 불한당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도전적인 사역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변신하는 간증은 사람들이 심금을 울린다.
교통사고로 지체 부자유자인 예도해 목사는 상주복음교회 담임목사이다. 기자는 불편한 목을 움직이는 예 목사를 만나고 누구나 질문했을 듯한 "뉴욕의 로뎀의집 짓기"를 질문했다. 하지만 "구름이 가면 나도 가고(도서출판영성네트워크/200쪽)"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단지 뉴욕에도 예 목사의 비전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
화가이기도 한 저자의 삽화도 곁들여진 이 책은 예배당에서 담배를 피우던 반항아 예도해에서 오직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무모할만큼 헌신하는 예도해 목사의 간증이 담겨있다. 아래는 간증의 요약이다.
우리 어머니는 불교신자였다. 처갓집도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서울 3곳에서 장사를 하는 잘나가던 사업자였다. 그러다보니 가정에는 무관심해 졌다. 그런 나를 보는 것을 힘들어 하던 아내는 교회에 나갔다. 충격이었다. 온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나의 폭언과 구타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내는 굴복하지 않고 나를 전도하려 했다.
1987년 교통사고가 났다. 척추를 상해 온몸의 통증과 마비로 삶의 의욕이 없어 졌다. 집안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내가 교회나간 탓으로 돌려지고 아내는 집밖으로 내쫓겼다. 아내는 조그만 미장원에 딸린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작은 누나와 매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큰 돈 150만원을 주면 교회에 3개월을 다니기로 했다. 매형은 3개월 동안 포일순복음교회에 가서 새벽예배, 수요예배, 주일예배를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혼자 교회에 다니기가 힘들어 아내를 데려왔다. 1989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당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하지만 목사님은 야단치기 보다는 웃으며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느 강력한 힘이 나를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무의식적으로 강대상 앞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회개하며 펑펑 울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입으로는 방언이 나왔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전혀 느낄수 없었던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
새벽 통성기도에서 "너는 전세계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다. 성경책을 읽으며 회개의 기도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다. 노방전도를 하고 싶었지만 교통사고로 어눌해진 말로 하기가 힘들어 간절히 기도하자 혀가 부드럽게 느껴지면서 평안해졌다. 그 이후 열심히 전도를 다녔다.
주위에서 신학교에 가라고 했지만 몸에 장애가 있었으며 공부할 돈도 없는 처지였다. 당시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웠다. 돈을 벌려고 해도 하나님은 돈 버는 일을 하는 것을 막으시고 교회에 남게 하셨다. 이때의 연단을 통해 평생을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일을 하기 위해 나간 남대문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교회당에서 기도를 하며 목회자의 길로 가라는 콜링을 받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도 찬성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전 재산인 셋방 보증금 200백만 원을 가지고 불이 들어오도록 특수 제작한 전도복과 십자가를 만들었다.
살 방이 없어 기도를 하는 도중에 목회를 하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김형탁 목사의 소개로 1992년 경북 다인면 짓다만 시골교회에 내려가게 되었다. 성도 한명도 없이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서 벙어리가 말하는 역사가 일어나자 교인이 15명으로 늘어났다. 개척한지 2주년이 되던 해에는 돈 한 푼 없이 수백 명이 넘는 노인들을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열기로 했다. 유명한 국악단체도 불렀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CBS "새롭게 하소서" 출연을 하게 되고 사연을 들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천여 명이 모인 잔치를 무사히 치르는 오명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95년 12월 연락을 받고 찾아간 농가에는 한 할머니가 추위에 방치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병원으로 모신지 3일 만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도 돌아가셨다. 기도를 하는 가운데 양로원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교회 집사의 친구가 내놓은 7천여 평의 땅을 양로원 부지로 샀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건물을 지을 돈을 기도하는 가운데 LA목회자 세미나에 참가한 후 뉴저지에 있는 작은 누님댁에 있다가 현지 목사님들을 만나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게 되었다. 집회하는 교회의 헌금으로 건축비용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00년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 살려주신 감사의 기도를 하는 가운데 "농어촌 목회자를 위한 집을 지으라"라는 말씀을 들었다. 전세금 1,800만원을 가지고 로뎀의 집공사를 시작했다. 어쩌면 생각없고 대책없는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에 옮겼다.
로뎀의집 후원자를 찾습니다
예도해 목사는 뉴욕에 이어 3월 15일부터 24일까지는 아틀란타에서 간증집회를 연다. 또 시애틀과 LA를 방문하여 간증집회를 가진다. 예도해 목사는 미국 동부에 비해 비교적 로뎀의 사역이 알려지지 않은 서부의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집회문의 917-699-6036). 또 로뎀의집을 지을 땅을 후원해 줄 후원자를 찾고 있다.
한국 농어촌 은퇴 목회자, 홀사모님 들을 위한 전액 무료 안식관인 로뎀의집은 예도해 목사가 펼치는 초교파적인 복지 사역으로 의성 로뎀의집(10채), 순창 로뎀의집(11채) 그리고 제주 로뎀의집(8채 +8채 건립중)이 있다. 로뎀의집은 평생동안 복음 사역을 위해 힘쓰다가 은퇴 후에 노후대책이 막막한 은퇴 목회자, 여전도사, 홀사모를 위해 무료로 입주하며 한 달에 20만원의 생활비도 지원하는 무료 안식관이다. 로뎀의집을 운영하기 위해 고정적인 지출로 한 달에 7백여만 원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농어촌 은퇴 목회자, 홀사모님들의 사정이 심각하다. 하지만 실정에 비해 한국교회들의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 옥한흠목사가 3채의 집을 기증했다. 한 집을 짓는데는 2,000만원(제주도 2,400만원)이 들어간다. 로뎀선교회의 목표는 100채의 집을 짓는 것과 로뎀의집에 있다가 불편한 사람을 돌볼 로뎀요양원 건립이다.
뉴욕에서는 로뎀선교회 로뎀의집 짓기 후원을 위한 미주후원회(회장 노기송 목사)가 후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매달 10불 이상 후원하는 ‘천사후원’과 매달 50불 이상 후원하는 후원이사로 참여할 수 있다.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교통사고로 지체 부자유자인 예도해 목사는 상주복음교회 담임목사이다. 기자는 불편한 목을 움직이는 예 목사를 만나고 누구나 질문했을 듯한 "뉴욕의 로뎀의집 짓기"를 질문했다. 하지만 "구름이 가면 나도 가고(도서출판영성네트워크/200쪽)"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단지 뉴욕에도 예 목사의 비전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
화가이기도 한 저자의 삽화도 곁들여진 이 책은 예배당에서 담배를 피우던 반항아 예도해에서 오직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무모할만큼 헌신하는 예도해 목사의 간증이 담겨있다. 아래는 간증의 요약이다.
우리 어머니는 불교신자였다. 처갓집도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서울 3곳에서 장사를 하는 잘나가던 사업자였다. 그러다보니 가정에는 무관심해 졌다. 그런 나를 보는 것을 힘들어 하던 아내는 교회에 나갔다. 충격이었다. 온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나의 폭언과 구타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내는 굴복하지 않고 나를 전도하려 했다.
1987년 교통사고가 났다. 척추를 상해 온몸의 통증과 마비로 삶의 의욕이 없어 졌다. 집안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내가 교회나간 탓으로 돌려지고 아내는 집밖으로 내쫓겼다. 아내는 조그만 미장원에 딸린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작은 누나와 매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큰 돈 150만원을 주면 교회에 3개월을 다니기로 했다. 매형은 3개월 동안 포일순복음교회에 가서 새벽예배, 수요예배, 주일예배를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혼자 교회에 다니기가 힘들어 아내를 데려왔다. 1989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당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하지만 목사님은 야단치기 보다는 웃으며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느 강력한 힘이 나를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무의식적으로 강대상 앞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회개하며 펑펑 울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입으로는 방언이 나왔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전혀 느낄수 없었던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
새벽 통성기도에서 "너는 전세계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다. 성경책을 읽으며 회개의 기도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다. 노방전도를 하고 싶었지만 교통사고로 어눌해진 말로 하기가 힘들어 간절히 기도하자 혀가 부드럽게 느껴지면서 평안해졌다. 그 이후 열심히 전도를 다녔다.
주위에서 신학교에 가라고 했지만 몸에 장애가 있었으며 공부할 돈도 없는 처지였다. 당시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웠다. 돈을 벌려고 해도 하나님은 돈 버는 일을 하는 것을 막으시고 교회에 남게 하셨다. 이때의 연단을 통해 평생을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일을 하기 위해 나간 남대문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교회당에서 기도를 하며 목회자의 길로 가라는 콜링을 받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도 찬성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전 재산인 셋방 보증금 200백만 원을 가지고 불이 들어오도록 특수 제작한 전도복과 십자가를 만들었다.
살 방이 없어 기도를 하는 도중에 목회를 하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김형탁 목사의 소개로 1992년 경북 다인면 짓다만 시골교회에 내려가게 되었다. 성도 한명도 없이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서 벙어리가 말하는 역사가 일어나자 교인이 15명으로 늘어났다. 개척한지 2주년이 되던 해에는 돈 한 푼 없이 수백 명이 넘는 노인들을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열기로 했다. 유명한 국악단체도 불렀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CBS "새롭게 하소서" 출연을 하게 되고 사연을 들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천여 명이 모인 잔치를 무사히 치르는 오명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95년 12월 연락을 받고 찾아간 농가에는 한 할머니가 추위에 방치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병원으로 모신지 3일 만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도 돌아가셨다. 기도를 하는 가운데 양로원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교회 집사의 친구가 내놓은 7천여 평의 땅을 양로원 부지로 샀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건물을 지을 돈을 기도하는 가운데 LA목회자 세미나에 참가한 후 뉴저지에 있는 작은 누님댁에 있다가 현지 목사님들을 만나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게 되었다. 집회하는 교회의 헌금으로 건축비용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00년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 살려주신 감사의 기도를 하는 가운데 "농어촌 목회자를 위한 집을 지으라"라는 말씀을 들었다. 전세금 1,800만원을 가지고 로뎀의 집공사를 시작했다. 어쩌면 생각없고 대책없는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에 옮겼다.
로뎀의집 후원자를 찾습니다
예도해 목사는 뉴욕에 이어 3월 15일부터 24일까지는 아틀란타에서 간증집회를 연다. 또 시애틀과 LA를 방문하여 간증집회를 가진다. 예도해 목사는 미국 동부에 비해 비교적 로뎀의 사역이 알려지지 않은 서부의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집회문의 917-699-6036). 또 로뎀의집을 지을 땅을 후원해 줄 후원자를 찾고 있다.
한국 농어촌 은퇴 목회자, 홀사모님 들을 위한 전액 무료 안식관인 로뎀의집은 예도해 목사가 펼치는 초교파적인 복지 사역으로 의성 로뎀의집(10채), 순창 로뎀의집(11채) 그리고 제주 로뎀의집(8채 +8채 건립중)이 있다. 로뎀의집은 평생동안 복음 사역을 위해 힘쓰다가 은퇴 후에 노후대책이 막막한 은퇴 목회자, 여전도사, 홀사모를 위해 무료로 입주하며 한 달에 20만원의 생활비도 지원하는 무료 안식관이다. 로뎀의집을 운영하기 위해 고정적인 지출로 한 달에 7백여만 원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농어촌 은퇴 목회자, 홀사모님들의 사정이 심각하다. 하지만 실정에 비해 한국교회들의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 옥한흠목사가 3채의 집을 기증했다. 한 집을 짓는데는 2,000만원(제주도 2,400만원)이 들어간다. 로뎀선교회의 목표는 100채의 집을 짓는 것과 로뎀의집에 있다가 불편한 사람을 돌볼 로뎀요양원 건립이다.
뉴욕에서는 로뎀선교회 로뎀의집 짓기 후원을 위한 미주후원회(회장 노기송 목사)가 후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매달 10불 이상 후원하는 ‘천사후원’과 매달 50불 이상 후원하는 후원이사로 참여할 수 있다.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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