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혁 “찬양사역은 테크닉 보다 성령의 역사를 갈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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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6-03-0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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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습니까?
우리 집안은 5대째 크리스찬 집안이다. 증조할머니는 신의주에서 외국선교사에게 처음 복음을 접하고 신실한 크리스찬이 되셨다. 작년 12월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목사였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되어 순탄한 길을 가시다가 가세가 기울어져 나만 서울에 남고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로 이사가야 되는 어려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혼자 서울에서 공부를 했으나 어려워 하루에 한 끼만 먹고 학비도 제대로 못내는 형편이 계속되자 싸움을 즐기는 문제아로 변해갔다. 내가 다녔던 휘문중에서 기타를 치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활이 어려운 것도 노래했으며 우는 것도 한숨도 노래를 했다. 대학교 때는 가수로 진출하라는 권유도 많았다. 이제 보니 그때 조상으로 받은 기도가 느껴졌다. 어느 선 이상을 넘지 않았다. 이때까지 내가 온 길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기도의 힘이다.
찬양사역자로서 첫길을 가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25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울에서 혼자 소망도 없이 10년을 사니 인간이 피폐해 졌다. 군대 휴가를 나와 귀대하기도 싫을 정도로 삶이 힘들고 고달팠다. 아버지가 담임하던 교회 골방에서 울부짖으며 기도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 “찬양하라”고 하는 음성이었다. 노래만 잘 한다고 찬양이 아니다. 삶이 변해야 진정한 찬양이다. 치유를 받을 곳을 찾아간 곳이 예수전도단이다. 4년간 전임 간사로 활동하며 화요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했다. 당시에 고형원 등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 이름이 온 땅에’, ’프뉴마‘ 등을 불렀다.
특히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당시 예수전도단의 홍성건 목사(현 예수전도단 동아시아 대표), 오대원 목사, 선교사, 함께 사역했던 모든 사역자들이 내게 영향을 주었다.
박종호씨와 처음으로 1987년 음반을 냈는데?
박종호 형제가 함께 노래하자고 해서 같이 듀엣을 하다 음반을 내자고 내가 제의했다. 도밍고와 존 덴버의 음반을 보고 힌트를 얻어 한국의 도밍고와 존 덴버가 되고 싶었는데 이것이 크게 히트했고 이어 1988년 친구 돈을 빌려 1집 음반 '어두워진 세상‘을 냈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렸다.
최근 찬양집회를 연 박종호씨가 교만한 간증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늘 넘어지고 쓰러진다. 처음에는 겸손하다가도 인기를 얻고 영광을 얻으면 변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해줘야 한다.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기억이 남는 집회가 있다면?
워싱톤에서 아는 분의 초청으로 집회를 했는데 600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에서 30명을 앞에 놓고 찬양을 했다. 나의 장점은 사람의 숫자에 관계없이 항상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이다. 찬양이란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 전화를 받았는데 자살하려던 여성이 교회 앞 공연 포스트를 보고 들어와 집회에 참가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으며 수많은 집회에서 전화하지 않은 비슷한 경우의 수많은 사람이 있겠구나 생각하니 내가 찬양을 해야 할 소망이 생겼다. 나는 무엇을 전달하려고 의도하기 보다는 오직 생명을 다해 노래한다.
월드비젼의 홍보대사는 언제부터 일하기 시작했나?
나도 결식아동이었다. 그래서 월드비젼의 어린 한 생명을 구하는 사역에 관심이 많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2004년 정식으로 홍보대사를 맡았다. 연예인으로서 김혜자, 정애리, 정영숙, 박상원 등이 있고 가수로서는 본인이 처음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꿈이 있다면?
CCM 첫 세대로서 음반 활동뿐만 아니라 방송인으로서 PD 협회상도 수상하고, 다솔 기획을 만들어 후배 양성을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큰 음반 사역을 했다. 청소년 수련 단체인 오병이어(김요한 목사), 주바라기(하재호 목사)는 청소년에게 영향력이 큰 단체다. 이 집회에 소리엘, 옹기장이, 위드 등과 함께 사역했다. 현재 YFC(십대 선교회)이사, 비젼 스튜디오 대표를 맡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꿈이 있다면 미국교회에서 미국인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과 기독교 TV를 운영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젊은 찬양 사역자들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은?
찬양 사역은 테크닉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는 아니다. 성령의 역사를 갈구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문화를 이기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돈과 비싼 장비 등을 이길 수 없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고 성령의 힘과 감동으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또한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회중들이 모르는 찬양을 찬양팀이 앞에서 신나게 자기들만 찬양하는 모습은 진정 찬양팀의 역할이 아니다. 찬양팀의 일은 회중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그들에게 맞는 찬양과 그들의 꿈과 그들의 갈등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맞추어 나가야 한다.
2006/03/05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우리 집안은 5대째 크리스찬 집안이다. 증조할머니는 신의주에서 외국선교사에게 처음 복음을 접하고 신실한 크리스찬이 되셨다. 작년 12월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목사였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되어 순탄한 길을 가시다가 가세가 기울어져 나만 서울에 남고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로 이사가야 되는 어려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혼자 서울에서 공부를 했으나 어려워 하루에 한 끼만 먹고 학비도 제대로 못내는 형편이 계속되자 싸움을 즐기는 문제아로 변해갔다. 내가 다녔던 휘문중에서 기타를 치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활이 어려운 것도 노래했으며 우는 것도 한숨도 노래를 했다. 대학교 때는 가수로 진출하라는 권유도 많았다. 이제 보니 그때 조상으로 받은 기도가 느껴졌다. 어느 선 이상을 넘지 않았다. 이때까지 내가 온 길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기도의 힘이다.
찬양사역자로서 첫길을 가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25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울에서 혼자 소망도 없이 10년을 사니 인간이 피폐해 졌다. 군대 휴가를 나와 귀대하기도 싫을 정도로 삶이 힘들고 고달팠다. 아버지가 담임하던 교회 골방에서 울부짖으며 기도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 “찬양하라”고 하는 음성이었다. 노래만 잘 한다고 찬양이 아니다. 삶이 변해야 진정한 찬양이다. 치유를 받을 곳을 찾아간 곳이 예수전도단이다. 4년간 전임 간사로 활동하며 화요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했다. 당시에 고형원 등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 이름이 온 땅에’, ’프뉴마‘ 등을 불렀다.
특히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당시 예수전도단의 홍성건 목사(현 예수전도단 동아시아 대표), 오대원 목사, 선교사, 함께 사역했던 모든 사역자들이 내게 영향을 주었다.
박종호씨와 처음으로 1987년 음반을 냈는데?
박종호 형제가 함께 노래하자고 해서 같이 듀엣을 하다 음반을 내자고 내가 제의했다. 도밍고와 존 덴버의 음반을 보고 힌트를 얻어 한국의 도밍고와 존 덴버가 되고 싶었는데 이것이 크게 히트했고 이어 1988년 친구 돈을 빌려 1집 음반 '어두워진 세상‘을 냈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렸다.
최근 찬양집회를 연 박종호씨가 교만한 간증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늘 넘어지고 쓰러진다. 처음에는 겸손하다가도 인기를 얻고 영광을 얻으면 변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해줘야 한다.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기억이 남는 집회가 있다면?
워싱톤에서 아는 분의 초청으로 집회를 했는데 600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에서 30명을 앞에 놓고 찬양을 했다. 나의 장점은 사람의 숫자에 관계없이 항상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이다. 찬양이란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 전화를 받았는데 자살하려던 여성이 교회 앞 공연 포스트를 보고 들어와 집회에 참가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으며 수많은 집회에서 전화하지 않은 비슷한 경우의 수많은 사람이 있겠구나 생각하니 내가 찬양을 해야 할 소망이 생겼다. 나는 무엇을 전달하려고 의도하기 보다는 오직 생명을 다해 노래한다.
월드비젼의 홍보대사는 언제부터 일하기 시작했나?
나도 결식아동이었다. 그래서 월드비젼의 어린 한 생명을 구하는 사역에 관심이 많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2004년 정식으로 홍보대사를 맡았다. 연예인으로서 김혜자, 정애리, 정영숙, 박상원 등이 있고 가수로서는 본인이 처음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꿈이 있다면?
CCM 첫 세대로서 음반 활동뿐만 아니라 방송인으로서 PD 협회상도 수상하고, 다솔 기획을 만들어 후배 양성을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큰 음반 사역을 했다. 청소년 수련 단체인 오병이어(김요한 목사), 주바라기(하재호 목사)는 청소년에게 영향력이 큰 단체다. 이 집회에 소리엘, 옹기장이, 위드 등과 함께 사역했다. 현재 YFC(십대 선교회)이사, 비젼 스튜디오 대표를 맡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꿈이 있다면 미국교회에서 미국인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과 기독교 TV를 운영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젊은 찬양 사역자들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은?
찬양 사역은 테크닉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는 아니다. 성령의 역사를 갈구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문화를 이기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돈과 비싼 장비 등을 이길 수 없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고 성령의 힘과 감동으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또한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회중들이 모르는 찬양을 찬양팀이 앞에서 신나게 자기들만 찬양하는 모습은 진정 찬양팀의 역할이 아니다. 찬양팀의 일은 회중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그들에게 맞는 찬양과 그들의 꿈과 그들의 갈등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맞추어 나가야 한다.
2006/03/05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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