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노인 사랑 완도 땅꼬마 김정두 목사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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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05-11-2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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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마을 노인들의 벗 김정두 목사(52·완도선교교회·한국섬마을선교회 대표)가 부인 이영채사모와 함께 뉴욕을 방문해 여러 교회에서 간증설교를 했다. 낙원장로교회, 뉴욕평안교회, 뉴욕초대교회, 뉴비젼교회, 뉴욕참교회, 뉴저지등대침례교회, 뉴욕동양제일교회, 뉴욕제자교회, 뉴욕어린양교회등에서 섬마을 선교와 노인들을 위한 선교의 체험을 간증을 마치고 LA를 향했다.
2005년 11월 23일(수) 저녁 뉴욕어린양교회(김수태 목사)에서 열린 간증집회에서 김정두 목사는 이번이 9번째 방문이라며 내년 3월 15일 10번째 미국방문을 마치면 섬마을 선교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9차례 미국방문을 통하여 직접 운전하며 35개주 430여 교회를 찾아 간증집회를 열고 섬마을 선교사업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아래는 간증내용이다.
1982년 경기도 안양에서 교회를 개척한 김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던 중, 완도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완도선교교회를 개척하고 24년째 완도에 살고 있다. 김 목사는 교회개척 후 교회가 성장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한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하나님에게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시는 분이 아니라 더 잘되게 하리라는 믿음으로 극복해 낸다.
젊었을때 김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다 군대에 가게 되고 영사기를 돌리는 일을 맡게 된다. 그때 세상 영화가 상영되는 것이 싫어 전도용으로 직접 충무로에 나가 기독영화 테이프를 빌려 군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제대후 영사기를 구입하고 섬으로 가져갔다. 당시에는 시골에는 흑백 TV도 없었으며 반공영화라도 재미있게 보던 시절이었다.
태풍으로 뱃길이 막힌 섬마을 목사일행에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영화를 보여주자 감동받은 일행은 자신이 있는 섬으로 초청했다. 그 목사에게서 한국에는 3,201개의 섬이 있고 517개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성전에 나가 헌신하는 기도를 드렸다. 섬을 방문하여 영사기로 영화를 상영하니 그 반응이 놀라웠다. 영화가 끝나자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눈을 감게 한 후 오늘부터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전부 손을 들었다. 그 섬은 복음화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다른 섬교회에서 초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많아지고 사역을 체계적으로 할 필요를 느끼고 1983년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한국섬마을선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갔다. 그렇게 12년 동안 사역했다. 어느 섬을 방문하려고 가다가 배가 시동이 갑자기 꺼져 가까운 섬으로 견인하게 되었다. 노인 8분만 살고 있는 섬에서 한 할머니가 뛰어 나와 목사님이시냐고 반기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즐거워했다. 할머니는 딸이 있는 서울에 있는 동안 교회를 나가 믿음을 가지게 되고 섬으로 돌아온 후, 목사님이 섬으로 와 노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할머니와의 대화가 끝나자 놀랍게도 배의 시동이 걸리고 이 경험이 섬을 떠난 자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작은 섬의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193개의 섬이 70-90대의 노인만 살고 있었다.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큰 교회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투자가치가 없으며 소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하지만 김 목사는 기도하여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라는 응답을 받았다. 노인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자주 방문하자 그들의 마음도 열렸다. 사나운 바닷길을 헤치고 건너오는 김 목사 일행을 보고 노인들은 "하나님이 고맙다"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들어 갈수 없는 작은 섬에 사는 노인들을 위해 비디오를 사드리고 예배실황 테이프를 상영하게 해 드렸다.
노인들의 임종을 지키면서 노인을 돌볼 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1997년 무료 양로원을 짓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한국에 IMF가 터져 협조를 약속한 교회들의 협조들이 취소되었다. IMF전에는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는 대도시의 교회들과 연결하여 완도의 김과 미역을 보내 여전도회 등을 통해 판매하고 남은 수익으로 선교회를 운영했는데 IMF이후 전혀 요청이 없었다. 그때 미국에서 미역에 대한 요청전화를 많이 받고, 김 목사는 미국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99년 1월 한 콘테이너의 미역과 김을 보내고 아는 사람도 없이 무작정 LA로 왔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전에 같이 사역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분의 도움을 통해 사연이 방송되자 많은 교회에서 간증요청이 밀려들었다. 한 콘테이너를 한 달 만에 다 팔고 한 콘테이너를 더 가져다가 팔았다. 그 후 9번 더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올해 8월에는 300명의 노인이 거주할 수 있는 무료 양로원 "완도 평강의 집(원장 이영채)"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대지 4000평에 1200평의 2층 건물인 평강의 집은 40개의 작은 방과 10개의 큰방, 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올해 4월에는 "자랑스러운 완도사람"으로 수상되기도 했다.
양로원이 법인화 되면 국가에서 비용의 80%를 보조하기 때문에 운영하기가 쉽다. 그런데 법인이 운영상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자금력이 있으며, 후원의 능력이 있는 단체에게만 허락해 준다. 그래서 법인설립기금으로 약 16만 달러가 필요해 다시 미국을 찾았다.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된다. 모든 노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세상이 복음화 될 수가 있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2005년 11월 23일(수) 저녁 뉴욕어린양교회(김수태 목사)에서 열린 간증집회에서 김정두 목사는 이번이 9번째 방문이라며 내년 3월 15일 10번째 미국방문을 마치면 섬마을 선교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9차례 미국방문을 통하여 직접 운전하며 35개주 430여 교회를 찾아 간증집회를 열고 섬마을 선교사업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아래는 간증내용이다.
1982년 경기도 안양에서 교회를 개척한 김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던 중, 완도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완도선교교회를 개척하고 24년째 완도에 살고 있다. 김 목사는 교회개척 후 교회가 성장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한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하나님에게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시는 분이 아니라 더 잘되게 하리라는 믿음으로 극복해 낸다.
젊었을때 김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다 군대에 가게 되고 영사기를 돌리는 일을 맡게 된다. 그때 세상 영화가 상영되는 것이 싫어 전도용으로 직접 충무로에 나가 기독영화 테이프를 빌려 군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제대후 영사기를 구입하고 섬으로 가져갔다. 당시에는 시골에는 흑백 TV도 없었으며 반공영화라도 재미있게 보던 시절이었다.
태풍으로 뱃길이 막힌 섬마을 목사일행에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영화를 보여주자 감동받은 일행은 자신이 있는 섬으로 초청했다. 그 목사에게서 한국에는 3,201개의 섬이 있고 517개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성전에 나가 헌신하는 기도를 드렸다. 섬을 방문하여 영사기로 영화를 상영하니 그 반응이 놀라웠다. 영화가 끝나자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눈을 감게 한 후 오늘부터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전부 손을 들었다. 그 섬은 복음화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다른 섬교회에서 초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많아지고 사역을 체계적으로 할 필요를 느끼고 1983년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한국섬마을선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갔다. 그렇게 12년 동안 사역했다. 어느 섬을 방문하려고 가다가 배가 시동이 갑자기 꺼져 가까운 섬으로 견인하게 되었다. 노인 8분만 살고 있는 섬에서 한 할머니가 뛰어 나와 목사님이시냐고 반기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즐거워했다. 할머니는 딸이 있는 서울에 있는 동안 교회를 나가 믿음을 가지게 되고 섬으로 돌아온 후, 목사님이 섬으로 와 노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할머니와의 대화가 끝나자 놀랍게도 배의 시동이 걸리고 이 경험이 섬을 떠난 자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작은 섬의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193개의 섬이 70-90대의 노인만 살고 있었다.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큰 교회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투자가치가 없으며 소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하지만 김 목사는 기도하여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라는 응답을 받았다. 노인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자주 방문하자 그들의 마음도 열렸다. 사나운 바닷길을 헤치고 건너오는 김 목사 일행을 보고 노인들은 "하나님이 고맙다"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들어 갈수 없는 작은 섬에 사는 노인들을 위해 비디오를 사드리고 예배실황 테이프를 상영하게 해 드렸다.
노인들의 임종을 지키면서 노인을 돌볼 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1997년 무료 양로원을 짓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한국에 IMF가 터져 협조를 약속한 교회들의 협조들이 취소되었다. IMF전에는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는 대도시의 교회들과 연결하여 완도의 김과 미역을 보내 여전도회 등을 통해 판매하고 남은 수익으로 선교회를 운영했는데 IMF이후 전혀 요청이 없었다. 그때 미국에서 미역에 대한 요청전화를 많이 받고, 김 목사는 미국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99년 1월 한 콘테이너의 미역과 김을 보내고 아는 사람도 없이 무작정 LA로 왔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전에 같이 사역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분의 도움을 통해 사연이 방송되자 많은 교회에서 간증요청이 밀려들었다. 한 콘테이너를 한 달 만에 다 팔고 한 콘테이너를 더 가져다가 팔았다. 그 후 9번 더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올해 8월에는 300명의 노인이 거주할 수 있는 무료 양로원 "완도 평강의 집(원장 이영채)"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대지 4000평에 1200평의 2층 건물인 평강의 집은 40개의 작은 방과 10개의 큰방, 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올해 4월에는 "자랑스러운 완도사람"으로 수상되기도 했다.
양로원이 법인화 되면 국가에서 비용의 80%를 보조하기 때문에 운영하기가 쉽다. 그런데 법인이 운영상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자금력이 있으며, 후원의 능력이 있는 단체에게만 허락해 준다. 그래서 법인설립기금으로 약 16만 달러가 필요해 다시 미국을 찾았다.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된다. 모든 노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세상이 복음화 될 수가 있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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