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 10주년, 11개의 농촌병원 세운 김만식 목사 파워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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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ㆍ2006-01-16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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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006년 1월 15일 중국선교 10주년 기념감사예배를 드리는 김만식 중국선교사(58)를 인터뷰했다. 뉴욕 동부개혁신학교 출신인 김 선교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사 위로금으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원하여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1984년 미국으로 와 뉴욕 브루클린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며 돈을 많이 벌던 김만식 선교사는 콜링을 받고 신학교에 진학한다. 교회개척 대신 선교로 방향을 돌린 김 선교사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중국 농촌에 11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는 <해란강의 어부>라는 자전적 선교일지를 쓰기도 했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이다.
너무 나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장남인 나를 가르치면 동생을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다운데에서도 나를 고등학교를 보낸다. 그 때문에 3천평의 농지가 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발생한다. 어린 마음에 그 농지를 반드시 찾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쉽게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월남전에 자청해 나갔다. 월남전에 전사하면 200만원이 나왔는데 그 돈이면 6천평의 땅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빨리 죽기위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해병대에 지원했다. 당시 3가지의 기도가 있었는데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 가정에 가난이 없게 해 주실 것, 살아오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전도자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고 교회에서 보내주는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며 영적인 성장을 했다. 월남에서 많은 전우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결국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은 내 생명수당, 가족수당, 봉급 등으로 오히려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기도의 하나를 들어 주신 것이다.
1984년 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 브루클린에서 자동차 정비공장, 에어콘 수리 등을 하며 많은 돈을 벌며 풍요를 만끽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기도를 다 들어 주었는데 너는 언제 나와의 약속을 갚겠느냐"하는 콜링을 받았다. 얼마 후 청소하기 위해 주은 신문지에는 마감일이 당일인 신학교 광고가 눈에 크게 보였다. 그때 나는 기름 묻은 손으로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전혀 예측을 못한 사건이었다.
아내는 일부 목회자들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것이 선교지에 나간 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주인집 여자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민하고 있는 엘살바드로 출신 직원을 상담하면서 그가 20세기의 요셉처럼 보였다. 그 직원과의 대화를 통해 엘살바드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나라에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명의 선교사가 이때 탄생한 것이다. 공장에 지도를 그려 놓고 선교사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선교를 제대로 알고 선교지로 떠나기 위해 도미니카, 중국, 러시아 등에 단기선교를 계획하고 공장을 판돈으로 선교에 나섰다. 중국을 방문하고 230만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 언어와 문화가 같은 동족이 사는 곳이 선교지이라는 확신을 얻고 선교지를 중국으로 바꾸었다.
목사의 신분으로 중국을 갈수 없자 연변대학 한의과를 유학 가는 것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동포 여학생을 만나 그녀의 고향인 해란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도시의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 병원을 짓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선교지에 기독교병원을 짓는 다면 적극적인 후원이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교회는 일 년 예산으로 움직이는 체제라는 것을 몰랐다. 나의 제안에 많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보며 사기꾼으로 몰았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다가 여름에는 미국에서 그림 장사, 안마 등을 했고 겨울방학에는 한국에서 보험설계사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다했다. 그렇게 번 돈과 교회와 개인의 도움으로 하나 둘씩 11개의 병원을 세웠고 그것을 유지해 나갔다.
병원은 무료는 아니지만 실비만 받으므로 전혀 이윤을 남기지 않고 있다. 병원을 미국에서 온 목사가 세웠다고 하니 사람들은 기독교병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병원에서 은혜를 입으면 예수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처소교회와 연결되고 있다.
한 개의 병원이 잘 운영되자 위생국에서는 추가로 10개의 병원을 추가로 부탁해 왔다. 병원 한 개를 세우는 데는 소형은 3만 불, 대형은 8만 불 정도가 든다. 소형병원에는 의사와 간호사 2명, 대형병원에는 4명이상이 일해야 하므로 유지비도 만만치 않다. 11개의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달에 6천여불이 들어간다. 하지만 교회에 도움을 많이 받지는 못한다. 2004년 <해란강의 어부>라는 책이 나온 후 책의 판매대금이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
기도의 제목들이 있다. 첫째, 3번째 세워진 영광송월병원은 폐교된 학교를 이용하는데 학교가 팔려 다른 곳에 병원이 세워져야 하는데 기도가 필요하다. 둘째, 6번째 세워진 소망장재병원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용하는데 위생국에서 다른 병원의 규모로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
2004년 <해란강의 어부>라는 책이 나오고 '중국선교사 수기'라는 부제가 처음으로 달리자 중국선교사로 나온 3천명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2가지이다. 한 부류는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며 격려를 하고, 다른 부류는 의료장비도 제대로 없는 것이 무슨 병원이냐고 비하한다. 그럴 때면 내가 이정도로 세웠으니 당신이 협력해서 장비를 구입하라고 말해준다. 같이 협력을 못해줄망정 비하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중국의 한족은 조선족과 달라 한 가족만 전도하면 모든 친척도 믿게 된다. 중국은 현대화의 영향으로 당뇨병 환자가 나오고 있으며 과음으로 인해 위장병과 간병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술담배를 1년 동안 안하는 사람에게는 암소를 한 마리 주는 등 계몽에 힘쓰고 있다.
나는 중국선교에 있어 중국정부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실하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찾아 도와주며 기다리며 사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하교회는 반대이다. 지하교회를 세우고 다시없어지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낭비이다. 공산당이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도시에만 있는 병원에서의 의료혜택을 확대하여 의료 무방비상태인 농촌에 의료시설을 확충했다. 이런 사역은 공산당도 호응해 준다.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혜택을 먼저주고 교회를 세우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산당이 인정하는 복지시설을 먼저 세우고 그들과 인간관계를 먼저 맺는 것도 좋은 선교의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필요악'인 셈이다.
<해란강의 어부>는 원고지 800페이지로 만들어 졌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책을 쓰고 싶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중국선교현장이 너무 어려워 기도를 하다가 "내가 함께 하는데 무엇이 힘이 드느냐"라는 말씀을 듣고 지난 과거들이 너무나 뚜렷하게 떠오르게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몇 시간을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생각이 나면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책의 시작이다. 책을 완성하기 까지는 5년이 걸렸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지 결코 내가 쓴 것이 아니다.
<해란강의 어부>을 읽고 한 독지가가 서초동에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이 사무실을 기반으로 "열린 사랑 문서선교회"를 세우고 문서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서 발행하는 문서 선교지인 <빛과 사랑>을 통해 3개의 병원이 세워 졌다. 그래서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문서선교를 통해 선교사들에게 끈을 주는 사역을 하고 싶다. 책을 읽고 초청을 받아 동대문에 있는 한 교회에서 집회를 했는데 교회 장로가 귀한 말씀을 받았다고 큰 절을 했다. 맞절을 했지만 그것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중국에서 농장 사역을 시작한 동기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었다. 뉴욕에 있을 때부터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한 소년을 알게 되어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 방문하니 모두들 너누 어렵게 살고 있었다. 집도 어려웠지만 전화가 되지 않아 바깥정보에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나는 등록금을 절약하기 위해 일 년을 휴학하고 그 돈으로 소년의 집을 지어주고 마을에 전화가 들어오게 해주었다. 이에 감명 받은 마을 촌장이 3백만 평의 땅을 30년 동안 무료로 렌트해 주었다. 이곳에 소를 키워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김만식 선교사
한국전화: 011-9067-3169
미국전화: 201-567-3345
홈페이지: http://www.kms03.com
이메일: kimmansik03@hanmail.net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너무 나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장남인 나를 가르치면 동생을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다운데에서도 나를 고등학교를 보낸다. 그 때문에 3천평의 농지가 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발생한다. 어린 마음에 그 농지를 반드시 찾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쉽게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월남전에 자청해 나갔다. 월남전에 전사하면 200만원이 나왔는데 그 돈이면 6천평의 땅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빨리 죽기위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해병대에 지원했다. 당시 3가지의 기도가 있었는데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 가정에 가난이 없게 해 주실 것, 살아오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전도자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고 교회에서 보내주는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며 영적인 성장을 했다. 월남에서 많은 전우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결국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은 내 생명수당, 가족수당, 봉급 등으로 오히려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기도의 하나를 들어 주신 것이다.
1984년 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 브루클린에서 자동차 정비공장, 에어콘 수리 등을 하며 많은 돈을 벌며 풍요를 만끽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기도를 다 들어 주었는데 너는 언제 나와의 약속을 갚겠느냐"하는 콜링을 받았다. 얼마 후 청소하기 위해 주은 신문지에는 마감일이 당일인 신학교 광고가 눈에 크게 보였다. 그때 나는 기름 묻은 손으로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전혀 예측을 못한 사건이었다.
아내는 일부 목회자들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것이 선교지에 나간 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주인집 여자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민하고 있는 엘살바드로 출신 직원을 상담하면서 그가 20세기의 요셉처럼 보였다. 그 직원과의 대화를 통해 엘살바드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나라에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명의 선교사가 이때 탄생한 것이다. 공장에 지도를 그려 놓고 선교사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선교를 제대로 알고 선교지로 떠나기 위해 도미니카, 중국, 러시아 등에 단기선교를 계획하고 공장을 판돈으로 선교에 나섰다. 중국을 방문하고 230만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 언어와 문화가 같은 동족이 사는 곳이 선교지이라는 확신을 얻고 선교지를 중국으로 바꾸었다.
목사의 신분으로 중국을 갈수 없자 연변대학 한의과를 유학 가는 것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동포 여학생을 만나 그녀의 고향인 해란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도시의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 병원을 짓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선교지에 기독교병원을 짓는 다면 적극적인 후원이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교회는 일 년 예산으로 움직이는 체제라는 것을 몰랐다. 나의 제안에 많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보며 사기꾼으로 몰았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다가 여름에는 미국에서 그림 장사, 안마 등을 했고 겨울방학에는 한국에서 보험설계사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다했다. 그렇게 번 돈과 교회와 개인의 도움으로 하나 둘씩 11개의 병원을 세웠고 그것을 유지해 나갔다.
병원은 무료는 아니지만 실비만 받으므로 전혀 이윤을 남기지 않고 있다. 병원을 미국에서 온 목사가 세웠다고 하니 사람들은 기독교병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병원에서 은혜를 입으면 예수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처소교회와 연결되고 있다.
한 개의 병원이 잘 운영되자 위생국에서는 추가로 10개의 병원을 추가로 부탁해 왔다. 병원 한 개를 세우는 데는 소형은 3만 불, 대형은 8만 불 정도가 든다. 소형병원에는 의사와 간호사 2명, 대형병원에는 4명이상이 일해야 하므로 유지비도 만만치 않다. 11개의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달에 6천여불이 들어간다. 하지만 교회에 도움을 많이 받지는 못한다. 2004년 <해란강의 어부>라는 책이 나온 후 책의 판매대금이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
기도의 제목들이 있다. 첫째, 3번째 세워진 영광송월병원은 폐교된 학교를 이용하는데 학교가 팔려 다른 곳에 병원이 세워져야 하는데 기도가 필요하다. 둘째, 6번째 세워진 소망장재병원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용하는데 위생국에서 다른 병원의 규모로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
2004년 <해란강의 어부>라는 책이 나오고 '중국선교사 수기'라는 부제가 처음으로 달리자 중국선교사로 나온 3천명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2가지이다. 한 부류는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며 격려를 하고, 다른 부류는 의료장비도 제대로 없는 것이 무슨 병원이냐고 비하한다. 그럴 때면 내가 이정도로 세웠으니 당신이 협력해서 장비를 구입하라고 말해준다. 같이 협력을 못해줄망정 비하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중국의 한족은 조선족과 달라 한 가족만 전도하면 모든 친척도 믿게 된다. 중국은 현대화의 영향으로 당뇨병 환자가 나오고 있으며 과음으로 인해 위장병과 간병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술담배를 1년 동안 안하는 사람에게는 암소를 한 마리 주는 등 계몽에 힘쓰고 있다.
나는 중국선교에 있어 중국정부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실하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찾아 도와주며 기다리며 사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하교회는 반대이다. 지하교회를 세우고 다시없어지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낭비이다. 공산당이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도시에만 있는 병원에서의 의료혜택을 확대하여 의료 무방비상태인 농촌에 의료시설을 확충했다. 이런 사역은 공산당도 호응해 준다.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혜택을 먼저주고 교회를 세우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산당이 인정하는 복지시설을 먼저 세우고 그들과 인간관계를 먼저 맺는 것도 좋은 선교의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필요악'인 셈이다.
<해란강의 어부>는 원고지 800페이지로 만들어 졌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책을 쓰고 싶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중국선교현장이 너무 어려워 기도를 하다가 "내가 함께 하는데 무엇이 힘이 드느냐"라는 말씀을 듣고 지난 과거들이 너무나 뚜렷하게 떠오르게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몇 시간을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생각이 나면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책의 시작이다. 책을 완성하기 까지는 5년이 걸렸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지 결코 내가 쓴 것이 아니다.
<해란강의 어부>을 읽고 한 독지가가 서초동에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이 사무실을 기반으로 "열린 사랑 문서선교회"를 세우고 문서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서 발행하는 문서 선교지인 <빛과 사랑>을 통해 3개의 병원이 세워 졌다. 그래서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문서선교를 통해 선교사들에게 끈을 주는 사역을 하고 싶다. 책을 읽고 초청을 받아 동대문에 있는 한 교회에서 집회를 했는데 교회 장로가 귀한 말씀을 받았다고 큰 절을 했다. 맞절을 했지만 그것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중국에서 농장 사역을 시작한 동기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었다. 뉴욕에 있을 때부터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한 소년을 알게 되어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 방문하니 모두들 너누 어렵게 살고 있었다. 집도 어려웠지만 전화가 되지 않아 바깥정보에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나는 등록금을 절약하기 위해 일 년을 휴학하고 그 돈으로 소년의 집을 지어주고 마을에 전화가 들어오게 해주었다. 이에 감명 받은 마을 촌장이 3백만 평의 땅을 30년 동안 무료로 렌트해 주었다. 이곳에 소를 키워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김만식 선교사
한국전화: 011-9067-3169
미국전화: 201-567-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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