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말씀 컨퍼런스 “공동체의 헌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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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21-04-05 12: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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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모여 시작된 열린말씀 컨퍼런스가 “순행과 역행: 변화의 바람 앞에 선 교회”라는 주제로 3월 21일과 28일 각각 열렸다. 컨퍼런스는 팬데믹으로 인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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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퍼런스에서 4번의 강의가 진행됐다. 21일에는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가 “전승: 지킬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노진준 목사(순회 설교 사역)가 “회개: 버릴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28일에는 류인현 목사(뉴욕 뉴프론티어교회)가 “회복: 다시 찾을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정대성 목사(콜로라도 뉴라이프선교교회)가 “변화: 새로워질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1.
둘째 날, 류인현 목사가 “회복: 다시 찾을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며 교회가 회복해야 할 두 개의 ‘공’을 나누었는데 ‘공동체성’과 ‘공공성’이었다. 그 중 “교회 내에서 회복해야 공동체성” 부분에 대한 강의 내용을 살펴보자.
공공성은 교회 외에서 회복할 것이라면, 공동체성은 교회 안으로 회복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성의 회복의 기초는 ‘헌신’이라고 본다. 교회가 십자가 위에 세워진 언약공동체로 회복되어야 할 것은 헌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헌신이 언약의 핵심이다. 사랑의 언약이라는 것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거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결단이다. 이 결단은 주님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 지체들에게도 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중심에 십자가 복음의 가치가 있다면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처럼 사랑이 왜곡되고 헌신의 가치가 퇴색된 적이 또 있었을까 한다. 사랑은 하나의 감정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결혼문화도 소비주의적인 모습의 극단을 향해 달려간다. 포스트모던적인 이 시대는 지독한 자기 사랑과 돈의 문화임을 보고 있다. 헌신 없음, 자기만족 사랑, 자아 과잉, 자아 몰입의 시대를 보고 있다.
예수님은 말세가 되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도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세속적인 문화 한가운데 있는 21세기 에베소교회 같은 우리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한 몸이 된 교회공동체로서 지켜야 할 것은, 만약 잃었다면 다시 찾아야 할 가치는 언약적 사랑의 핵심인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헌신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오늘날, 헌신이라는 언약적 사랑의 소중한 가치를 교회가 회복되었으면 장말 좋겠다.
2.
강의의 패널 토론이 진행됐다. 컨퍼런스 참가자 중에 “공동체의 헌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헌금이나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이해한 헌신과 현대교회의 관행적인 헌신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정대성 목사(콜로라도 뉴라이프선교교회)는 “헌신을 형식화 하고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경계했다.
정대성 목사 “공동체적인 헌신은 전형적으로 규정된 것은 없다. 그런데 헌신이 무엇이냐 말하고 헌신에 대해 생각할 때 이미 헌신은 떠난다. 헌신한다는 개념이 마음이 들어올 때 헌신은 이미 퇴색되는 것이고, 헌신에 대한 대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목회 30년 동안 신실하게 헌신하는 분을 볼 때 그런 분들은 자신이 헌신한다고 생각안하니 더 헌신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헌신을 규정지으려 하고 형식을 만들려 하면 헌신이 또 다른 우상이 된다”고 했다.
또 “헌신은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안 비유도 전적으로 인생을 다 바쳐서 강도만난 사람을 회복되기까지 돌보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시간에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물질을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그 사마라인 헌신을 본받자고 한다면, 이미 사마리안 정신을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헌신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경계했다.
노진준 목사(순회 설교 사역)는 “헌신의 정의를 내리기 전에 그렇게 정의를 내리는 내 의도를 무엇인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라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을 생각해야 할 발언을 했다.
노진준 목사는 “헌신을 말할 때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돈이 선인가 악인가 중립인가? 어떤 답을 한다면 왜 그렇게 답하는지 자기에게 물어야 한다. 그것이 혹시 자기 합리화가 아닐까? 돈이 선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돈이 많거나, 돈은 악이라고 말하면 혹시 그것은 자기의 열등감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하지 않으면 헌신의 정의하려는 자체가 다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말하고 있다면 왜 헌신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한다. 나는 주님께 헌신하느냐고 묻는 질문조차도 결국은 주님을 수단으로 이용해서 자기의 성공을 말하려는 의도이거나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말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헌신의 정의를 내리기 전에 그렇게 정의를 내리는 내 의도를 무엇인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3.
패널들의 의견을 들은 류인현 목사가 이 부분을 마무리했다. 교회의 공동체성과 헌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것이 드러났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고민했던 것은 교회가 세상적으로 신뢰를 잃은 것은 결과물이라 보았을 때 문제는 안에 있는 것이니 교회 안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느낀 바로는 교회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헌신의 마음이 별로 없다. 교회 사이즈가 커져갈수록 그냥 교회 갔다 오는, 예배드리고 오는 개념에서 이해한다. 마치 어느 체육관에 소속된 멤버십처럼 교회에 소속된 소속감을 헌신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소속되었기에 내 공동체라고 한다면, 교회가 과연 그런 공동체인가 라는 질문을 제가 가지고 있다. 교회는 언약 공동체라는 헌신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시대는 그 개념이 없다. 없기에 공공성까지 아예 갈 수 없다. 안에서 부터 언약을 회복하고, 이런 공동체성을 초대교회처럼 회복해야 한다.
공공체성이 단어가 어렵다면 미션이라는 단어로 이용하자. 우리 안에서부터 언약이 회복되어야 미셔날하게 세상을 향해 선교적인 생명 공동체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안에서 시작도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사실 한 것이다. 신뢰를 회복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언약 공동체가 맞는지, 우리가 서로 헌신된 것이 맞는지 질문한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 모습이 가정과 흡사하다. 가정은 그래도 서로 헌신되어 있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이 서로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가족적인 언약적인 교회인가 하는 질문을 가장 먼저 들었다. 교회에서 너무 따로따로 지내는 것 아닌가? 각자도생하다가 주일에 한 번 모여 예배드리고 우리는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가장 뼈아픈 질문이었다. 다시 모이면 똑 같아 질 것 같다. 그래서 단지 모이는 것이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제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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