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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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09-09-18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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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희민 목사님의 강연에 대한 기사(보러가기)에 '롱기누스'라는 필명으로 아래의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겁니까? 이곳을 운영하시거나, 이곳에 방문하셔서 이 댓글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다들 그런 삶을 살고 계시나요? 저만 혼자 이 문제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가요? 저의 의지력이 약함을 탓할 수밖에 없을까요? 신비적인 은사집회에서 길길이 뛰기도 하고, 펑펑 울기도 하면 그렇게 될까요? 그런 변화는 한 순간, 혹은 단기간에 일어나나요?
수십년간, 아니 일평생 믿었는데, 저는 왜 이럴까요? 간증하시는 분들은 전부 변신 로보트처럼 한 순간에 존재자체가 달라진다는 식으로 말씀들 하시더군요. 질투나고, 부러워서 간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혐오감까지 느낍니다. 한국교회, 이민교회, 그리고 저 역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이것은 답이 없는 문제일까요?"
개인적으로 댓글을 읽고 큰 충격과 함께 도전이 들었습니다. 댓글이 올라온후 누지문서님이 이 댓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게시판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사는 것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방향입니다.
그래서 아멘넷에서는 이 댓글의 답을 찾는 것은 기독교를 위한 중보기도라고 보고 100명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댓글의 내용을 보여주며 직접 사람을 만나 답을 구하거나 이메일을 보내 질문을 하겠습니다. 또 이 기사에 대한 댓글중 선택도 하겠습니다.
모든 대답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때리며 만족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명의 중보기도를 통해 한명의 영혼이 변한다면 그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음은 댓글을 보여준후 들은 대답입니다. 대답은 추가됩니다.
1. 정광희 목사(큐가든성신교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것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것이 아니다. 우리를 죽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오신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힘과 내노력과 내의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종교로 만든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육체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 훈련해서 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는 안되니 내가 너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생명을 성령으로 살아가게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는 분들이 예배당안에 많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새언약의 주인으로 오셨다. 그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해주시겠다는 새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 언약으로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내가 율법의 요구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새신을 신고 성령이 지키게 해서 살게 하겠다는 것이 새언약이다. 우리는 그언약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탄은 항상 믿음으로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고 선하게 살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같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하려고 하니 안된다. 생명의 성령의 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로마서 8장 4절의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의 요구가 자동으로 이루어 진다. 성령을 따라가면 사랑해져 버리고 용서해져 버려야 한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이다.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려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야 한다.
2. 송병기 목사(목양장로교회, 뉴욕목사회 회장)
모든 만물이 다 여러 단계를 거쳐 변하고 성장하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시일에 변화되어 삶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숙되어지고 완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쉽게 변하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것이 무리하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죽는 날까지 사탄과 싸우며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속되는 사탄의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닌 성령님의 힘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오직 가치관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 존재의 이유를 알게됩니다. 그때 비로서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삶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알게 되며 이제부터는 나를 만드신 그분의 뜻대로 살으리라는 결심으로 마음과 행동이 바뀌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하루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가 일생을 지배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않고 계속적으로 넘어뜨리려 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탄과 싸움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힘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사탄의 세력에서 능히 이길수 있는 힘을 주셨으므로 그 권세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겨나가는 하루 하루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날마다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긴 여정이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삶이 쉽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모르게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힘만 의지하려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변화가 되었다고 해도 사탄은 그냥 두지않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탄의 계략에 넘어지고 또 쓰러집니다. 그럴때 좌절하거나 실망하면 안됩니다. 다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또 일어서야 합니다. 이길수 있는 힘은 오직 위로부터 오기때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면 안됩니다. 무능함을 질책하면 안됩니다. 나는 안된다.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주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있으면 일어설 수 없게 됩니다.
연약한 인생이기에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때 인간의 약함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끝나는 날까지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며 내힘이 아닌 예수님의 힘을 의지하고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길입니다.
섰다고 자고하면 쓰러집니다. 언제나 겸손히 내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오뚜기 인생으로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힘을 내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3. 김신호 (뉴저지초대교회 출석, 회계사, EPS 청지기 재정교실 설립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되는 삶은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 두 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것인데,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주로는 받아들이면서 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나타나는 종교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없으면 성장과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겠지요.
둘째 원인은 첫 번째와 연결이 되는데,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며 그분의 뜻이 내게 이뤄지도록 항상 주인의 뜻을 물으며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는데, 내가 주인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하며 예수님은 필요할 때만 와서 도와주시는 분으로 대접한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의 시간, 재능, 돈을 사용할 때 내가 주인입니까, 아니면 예수께서 주인입니까? 내가 결정합니까, 아니면 주님께 그분의 뜻을 보여 주시도록 기도하며 순종합니까? 저도 매일 갈등하며 살지만, 주님이 주인되어 모든 삶을 다스리시면 삶이 단순해지고, 염려가 없어지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을 닮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4. 김명희 선교사 (뉴욕 할렘사역 선교사)
롱기누스님의 고민은 참 아름다운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고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런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껍데기 뿐인 신앙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28년전 불신자였던 상태에서 갑자기 부흥회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획기적인 변화를 체험했던 자였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심의 삶에서 갑자기 예수님 중심의 삶의 방향으로 변화 된 것은 있었으나, 내 자신이 갑자기 예수의 형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뜨거웠으나 속은 설익은 전병의 모습이었지요.(그러니 변신 로보트라는 것은 사람전체가 순간에 바뀐 것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기독교 교리에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업적으로 누구든지 그 공로를 믿으면 죄가 사하여지고 즉각적으로 구원이 임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성화는 일생을 두고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며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 공평하지요.
저의 경우에는 뜨거움이 있어도 잘 변하지 않는 제 자신에 대해 고민하다가, 근래에 좋은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기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씀묵상과 회개기도인데, 이 회개기도가 물론 행동에 대한 회개도 해야하지만, 우리의 자세에 대한 회개를 많이 해야겠다는 거지요.
인간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있는데, 의식의 부분은 10%라면 무의식의 부분은 90%라고 할 수가 있다더군요. 그래서 제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나의 의식은 감사를 할 수가 있는데, 나의 무의식은 그러지 못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10%의 의식이 감사를 한다고 내 전체가 주님께 감사를 하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이 무의식의 창고에 차있는 어둠을 빼어내야 겠다는거예요. 이 무의식의 창고에는 어렸을 적 부터의 상처로 온 쓴뿌리들, 잘못된 개념들, 공포의 경험, 수치감, 죄의식 등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차 있어 우리를 많은 부분 좌우 합니다.
이 창고가 어두울수록 우리는 빛의 행동을 하기 어려운 거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자세가 이 창고에 많이 연루된 것 같고, 나쁜 자세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회개기도를 할 때 무의식의 창고가 밝아져 온다고 생각해서 그리해보니 실지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물론 그 행동에 대해 회개를 하여도 또 다음에 거짓말을 쉽게 하게 되는데, 매일 이 경향성(자세)에 대해 뿌리가 뽑힐 때 까지 회개기도하면 무의식에 근거한 그 뿌리가 뽑힌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내개인의 약한면들, 또한 가계에서 오는 내력, 그리고 옛적부터 오는 국가적인 약한면들을 리스트를 만들어 회개기도하니, 내영혼이 많이 가벼워지고 빛들로 차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약한 부분이 비판이 되거나 상처가 될때, 그 사람의 그 면이 원죄를 가진 내속에도 있다는 것의 전제하에 내죄인양 대속의 중보기도할 때, 내 무의식에 있는 어둠도 함께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에서 절대 싸움이 없어지고, 우리가 같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아름다운 일이 계속되리라 믿습니다.
또 한가지는 말씀묵상입니다. 말씀묵상에서 진정한 생명감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말씀을 씹어봐야 그 나오는 즙으로 실감있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베풀어 놓으신 풍성한 삶에 대한 축복은 그 지평이 말 할 수 없이 큽니다. 오직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 2009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겁니까? 이곳을 운영하시거나, 이곳에 방문하셔서 이 댓글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다들 그런 삶을 살고 계시나요? 저만 혼자 이 문제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가요? 저의 의지력이 약함을 탓할 수밖에 없을까요? 신비적인 은사집회에서 길길이 뛰기도 하고, 펑펑 울기도 하면 그렇게 될까요? 그런 변화는 한 순간, 혹은 단기간에 일어나나요?
수십년간, 아니 일평생 믿었는데, 저는 왜 이럴까요? 간증하시는 분들은 전부 변신 로보트처럼 한 순간에 존재자체가 달라진다는 식으로 말씀들 하시더군요. 질투나고, 부러워서 간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혐오감까지 느낍니다. 한국교회, 이민교회, 그리고 저 역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이것은 답이 없는 문제일까요?"
개인적으로 댓글을 읽고 큰 충격과 함께 도전이 들었습니다. 댓글이 올라온후 누지문서님이 이 댓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게시판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사는 것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방향입니다.
그래서 아멘넷에서는 이 댓글의 답을 찾는 것은 기독교를 위한 중보기도라고 보고 100명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댓글의 내용을 보여주며 직접 사람을 만나 답을 구하거나 이메일을 보내 질문을 하겠습니다. 또 이 기사에 대한 댓글중 선택도 하겠습니다.
모든 대답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때리며 만족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명의 중보기도를 통해 한명의 영혼이 변한다면 그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음은 댓글을 보여준후 들은 대답입니다. 대답은 추가됩니다.
1. 정광희 목사(큐가든성신교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것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것이 아니다. 우리를 죽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오신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힘과 내노력과 내의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종교로 만든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육체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 훈련해서 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는 안되니 내가 너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생명을 성령으로 살아가게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는 분들이 예배당안에 많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새언약의 주인으로 오셨다. 그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해주시겠다는 새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 언약으로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내가 율법의 요구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새신을 신고 성령이 지키게 해서 살게 하겠다는 것이 새언약이다. 우리는 그언약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탄은 항상 믿음으로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고 선하게 살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같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하려고 하니 안된다. 생명의 성령의 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로마서 8장 4절의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의 요구가 자동으로 이루어 진다. 성령을 따라가면 사랑해져 버리고 용서해져 버려야 한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이다. 정말 변화된 크리스찬의 삶을 살려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야 한다.
2. 송병기 목사(목양장로교회, 뉴욕목사회 회장)
모든 만물이 다 여러 단계를 거쳐 변하고 성장하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시일에 변화되어 삶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숙되어지고 완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쉽게 변하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것이 무리하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죽는 날까지 사탄과 싸우며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속되는 사탄의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닌 성령님의 힘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오직 가치관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 존재의 이유를 알게됩니다. 그때 비로서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삶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알게 되며 이제부터는 나를 만드신 그분의 뜻대로 살으리라는 결심으로 마음과 행동이 바뀌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하루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가 일생을 지배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않고 계속적으로 넘어뜨리려 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탄과 싸움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힘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사탄의 세력에서 능히 이길수 있는 힘을 주셨으므로 그 권세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겨나가는 하루 하루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날마다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긴 여정이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삶이 쉽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모르게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힘만 의지하려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변화가 되었다고 해도 사탄은 그냥 두지않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탄의 계략에 넘어지고 또 쓰러집니다. 그럴때 좌절하거나 실망하면 안됩니다. 다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또 일어서야 합니다. 이길수 있는 힘은 오직 위로부터 오기때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면 안됩니다. 무능함을 질책하면 안됩니다. 나는 안된다.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주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있으면 일어설 수 없게 됩니다.
연약한 인생이기에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때 인간의 약함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끝나는 날까지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며 내힘이 아닌 예수님의 힘을 의지하고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길입니다.
섰다고 자고하면 쓰러집니다. 언제나 겸손히 내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오뚜기 인생으로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힘을 내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3. 김신호 (뉴저지초대교회 출석, 회계사, EPS 청지기 재정교실 설립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되는 삶은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 두 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것인데,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주로는 받아들이면서 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나타나는 종교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없으면 성장과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겠지요.
둘째 원인은 첫 번째와 연결이 되는데,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며 그분의 뜻이 내게 이뤄지도록 항상 주인의 뜻을 물으며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는데, 내가 주인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하며 예수님은 필요할 때만 와서 도와주시는 분으로 대접한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의 시간, 재능, 돈을 사용할 때 내가 주인입니까, 아니면 예수께서 주인입니까? 내가 결정합니까, 아니면 주님께 그분의 뜻을 보여 주시도록 기도하며 순종합니까? 저도 매일 갈등하며 살지만, 주님이 주인되어 모든 삶을 다스리시면 삶이 단순해지고, 염려가 없어지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을 닮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4. 김명희 선교사 (뉴욕 할렘사역 선교사)
롱기누스님의 고민은 참 아름다운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고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런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껍데기 뿐인 신앙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28년전 불신자였던 상태에서 갑자기 부흥회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획기적인 변화를 체험했던 자였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심의 삶에서 갑자기 예수님 중심의 삶의 방향으로 변화 된 것은 있었으나, 내 자신이 갑자기 예수의 형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뜨거웠으나 속은 설익은 전병의 모습이었지요.(그러니 변신 로보트라는 것은 사람전체가 순간에 바뀐 것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기독교 교리에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업적으로 누구든지 그 공로를 믿으면 죄가 사하여지고 즉각적으로 구원이 임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성화는 일생을 두고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며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 공평하지요.
저의 경우에는 뜨거움이 있어도 잘 변하지 않는 제 자신에 대해 고민하다가, 근래에 좋은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기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씀묵상과 회개기도인데, 이 회개기도가 물론 행동에 대한 회개도 해야하지만, 우리의 자세에 대한 회개를 많이 해야겠다는 거지요.
인간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있는데, 의식의 부분은 10%라면 무의식의 부분은 90%라고 할 수가 있다더군요. 그래서 제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나의 의식은 감사를 할 수가 있는데, 나의 무의식은 그러지 못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10%의 의식이 감사를 한다고 내 전체가 주님께 감사를 하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이 무의식의 창고에 차있는 어둠을 빼어내야 겠다는거예요. 이 무의식의 창고에는 어렸을 적 부터의 상처로 온 쓴뿌리들, 잘못된 개념들, 공포의 경험, 수치감, 죄의식 등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차 있어 우리를 많은 부분 좌우 합니다.
이 창고가 어두울수록 우리는 빛의 행동을 하기 어려운 거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자세가 이 창고에 많이 연루된 것 같고, 나쁜 자세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회개기도를 할 때 무의식의 창고가 밝아져 온다고 생각해서 그리해보니 실지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물론 그 행동에 대해 회개를 하여도 또 다음에 거짓말을 쉽게 하게 되는데, 매일 이 경향성(자세)에 대해 뿌리가 뽑힐 때 까지 회개기도하면 무의식에 근거한 그 뿌리가 뽑힌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내개인의 약한면들, 또한 가계에서 오는 내력, 그리고 옛적부터 오는 국가적인 약한면들을 리스트를 만들어 회개기도하니, 내영혼이 많이 가벼워지고 빛들로 차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약한 부분이 비판이 되거나 상처가 될때, 그 사람의 그 면이 원죄를 가진 내속에도 있다는 것의 전제하에 내죄인양 대속의 중보기도할 때, 내 무의식에 있는 어둠도 함께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에서 절대 싸움이 없어지고, 우리가 같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아름다운 일이 계속되리라 믿습니다.
또 한가지는 말씀묵상입니다. 말씀묵상에서 진정한 생명감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말씀을 씹어봐야 그 나오는 즙으로 실감있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베풀어 놓으신 풍성한 삶에 대한 축복은 그 지평이 말 할 수 없이 큽니다. 오직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 2009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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