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 목사] 목회자 위상 회복을 위한 칼럼 (3) 은혜를 아는 자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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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 2024-02-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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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초년시절 주일 예배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아내와 한인마트에 들린 적이 있었다. 주일저녁이라서인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마침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 분의 뒤를 따라가 뒤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렸다. 짐을 다 실고 떠나는 자리에 차를 주차하려는 순간 반대편에서 느닷없이 그 주차공간으로 치고 들어와 차를 세우는 것 아닌가.
나는 이 모습을 보고 내가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신호로 빵빵 경적을 주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분이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욕을 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에서 내려 그분에게 왜 욕을 하느냐고 한마디 했더니 내 멱살을 잡고 밀어치자 나는 참지 못할 분노가 솟아올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쌍욕을 하게 되었고 그날 난 목사로써 해서는 안 될 흉한 모습을 연출했던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가 한마디 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신 싸우는 얼굴이 마치 마귀의 얼굴 같았다고 한다. 몇 시간 전 예수님 닮은 성품에 대한 설교를 하고 마귀를 닮은 얼굴로 싸움을 했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부터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얼굴에 기쁨을 나타내며 감사해 하는 모습을 그린 AI
나는 목사로써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못한 목사다. 내가 옳다고 여긴 일에 누군가 시비를 걸고 잘못되었다고 하면 욱하는 못된 성격이 나타난다. 그 성격이 때로는 막말을 하고 흥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가 어린 시절 목사님에 대한 인식은 늘 온유하고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성품을 지니신 분들이 목사님이라 여기면서 지내왔다. 이런 인식은 목사 되어서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내와 말다툼을 하면서 분노가 솟아오를 때는 이런 인자한 모습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아내는 늘 말한다, “당신 그런 성품으로는 목회 못해요. 누가 그런 얼굴을 목사라고 하겠어요.”
예수 믿고 목사되어 성직자로 살아온 지 벌써 수십 년이 되었는데 툭하면 옛 성품이 튀어져 나온다. 이게 가정 안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안에서 새는 박,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시비를 거는 성도나 목사들에게도 여과 없이 들어낸다. 나를 비꼬는 말이 들려지는 순간 참는다고 참지만 얼굴에서 그대로 들어난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까?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사람이 목사이지 않은가. 성도들은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목사들이 놓치고 있다. 그런데 목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어 낼 수 있을까? 바로 내 옛 성품이 죽어져 있어야 만이 가능한 것 아닌가. 그 죽어져 있다는 것이 확인되려면 내가 은혜 받은 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존재를 목사로 불러 주셨다는 그 부르심에 대한 엄청난 은혜를 아는 자만이 옛 성품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왜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까?
바로 인생에 밑바닥까지 떨어져 죽음의 피를 토하면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아니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조차 나올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지금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큰 주님의 은혜인가 실감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난 인생 끝자락에 와서야 깨달았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 여정은 하나님 닮은 성품의 싸움이다.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쳐 복종시키는 훈련이 없이는 결국 예수님 닮은 성품이 나올 수 없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하는 훈련장이다. 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는 예수님 닮은 성품을 가지고 살겠다는 고백이 아니던가. 그래서 예배는 삶속에서 들어나야 참 예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하나님 성품에 관심이 없는 종교 지도자들은 오직 예배뿐이다. 예배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한 것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 착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목사들은 예배를 통해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중적 삶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그 순간은 거룩한데 그 예배가 끝나는 순간, 거룩은 사라지고 인간의 옛 모습을 여과없이 들어낸다. 그러면서도 설교했기 때문에, 기도한 목사이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한 목사라고 생각한다. 여지없이 옛 바리새인들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 뜻을 행하는 자인가 아닌가는 열매를 보아 안다고 했다. 열매가 없으면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라고 책망을 받는다. 그럼 그 열매가 뭘까? 바로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다 성품적인 것들이다. 이 성품의 열매가 없는데 하나님 자녀라고 할 수 있을까?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정화되지 않은 막말, 온유하지 못하고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못된 성격, 화평을 깨면서도 겸손한 척, 온유한 척, 거룩한 척 아무리 해도 그 척하는 나로 인해 목회자의 위상은 한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 걸까? 지금 나 때문에 뉴욕교계의 목사들 위상이 한없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목사들 위상은 회복될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닮은 성품, 성령의 열매가 이 땅에서 나타내지 못한 목사가 내가 될까 오늘도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 본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한준희 목사(뉴욕목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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