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 ① 청중을 깨우는 10가지 설교전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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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18-10-1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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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미주동부동문회(회장 이재철 목사)는 60여명의 동문들이 참가한 가운데 2018년 가을 수양회를 10월 1일(월)부터 1박2일 동안의 일정으로 뉴저지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골든 너기트 애틀랜틱시티 호텔에서 가졌다.
강사 류응렬 목사는 "행복한 목회자와 성경적 설교자", "제자훈련과 설교", "청중을 깨우는 설교전달법"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류응렬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대원 90회 동문으로 모교 설교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와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객원교수로 있다.
류응렬 목사는 “총신 출신이라면 전달보다는 본문해석과 내용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조크를 하며 “청중을 깨우는 10가지 설교전달법”을 나누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설교작성과 본문해석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치고 설교전달을 다루게 된다. 설교전달을 잘 다루면 설교작성과 본문해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설교전달법이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식당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잘되는 식당은 분위기가 다르며, 친절 등 매너가 있으며, 다음이 메뉴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기본이며 플러스 친절과 분위기가 잘되는 식당을 만들어낸다. 설교에 적용한다면 똑같은 설교를 해도 가슴이 열리고 마음이 동하는 설교가 있는가 하면, 본문은 열심히 설명하는데 마음이 열리지 않고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설교가 있을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이 아무리 주옥같은 표현이지만 읽었을 때 끝까지 기억하고 졸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용이 문제 아니라 표현이 문제이다.
방송의 뉴스 시청은 누가 앵커인가에 따라 다르다. 같은 뉴스 내용이지만 표현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이 다르다. 사건은 팩트이다. 역사 사실도 기술하는 사람에 따라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 결정이 된다. 같은 복음을 전하지만 가슴을 여는 복음, 마음을 닫는 복음(설교)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강단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회자들이 고백하는 설교의 부족한 부분 연구한 적이 있다. 연구결과 전달력에 대한 고민이 24.6%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자료준비 부족인데 오늘날은 인터넷의 발달로 예전보다 나아졌다. 그리고 적용부분이다. 저도 적용부분이 가장 어렵다.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설교가 잘못하면 잔소리 되고, 한 이야기를 또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어려움이다. 그리고 예화 부족을 고민한다. 반면 본문의 이해와 해석에 대한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청중을 깨우는 10가지 설교전달법을 나누겠다.
1. 원고를 보는가 청중을 보는가?
원고를 보고 읽는 설교자들이 있다. 제발 총신 동문 중에 그런 분이 없었으면 좋겠다. 설교의 설(說)은 말하는 것이다. 문(文) 즉 읽는 것이 아니다. 원고에 집중해서 읽는 설교자는 기본예의가 없는 것이다. 성도들을 위해 밥을 지었으면 밥을 잘 나누는 것이 설교자의 몫인데, 원고를 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뉴스의 앵커가 그렇게 한다면 아무도 그 뉴스를 보는 사람은 없고 채널을 돌릴 것이다. 내용보다 전달이 문제이다. 요즘은 그런 목회자는 거의 없다. 물론 그렇게 하면 반드시 안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 역사는 일어나고 가능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성도들의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도록 해야 한다. 밥을 지었으면 잘 먹도록 하는 것이 어머니의 심정이다. 그런 면에서 조금이라고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몫이다.
설교를 하다 잊으면 어떻게 하는가?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눈이 안 좋아 원고를 읽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큼 영성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원고를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은 아니지만 목자는 더 좋은 것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냥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다른 데를 보고 이야기 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보다 3배가 더 높다고 한다. 대화식과 원고를 보고하는 설교가 3배나 엄청난 효과가 있다. 앞에 100명이 앉아있으면 30명이 귀를 기울이는가 아니면 90명이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차이이다.
사람을 보면서 설교한다는 것은 선풍기 돌아가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듯이 한분 한분을 보면서 그분에게 주시는 말씀같이 설교한다. 우리 교회 예배당은 2,100석 규모이다, 2-3부 예배에는 1천명 이상이 나오는데 뒤의 사람의 얼굴이 잘 안보인다. 그런데 한 사람만 눈여겨보아도 다른 사람은 자기를 보는듯한 효과를 나타난다. 한사람 한사람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사람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해도 다른 사람은 나를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을 보면서 설교하려면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준비없이 불가능하다. 오늘 ‘하나님이 힘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는데 흔하게 하는 설교는 아니다. 갑작스러운 설교부탁에 설교준비를 어제밤새도록 준비한 것이 아니다. 설교내용을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기억한다.
목회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고민하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 의지하는 최선이 필요하다. 그것에 가장 적합한 본문이 있다면 아마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하나님께 완벽하게 의지한 다윗같은 삶이 아니겠는가? 다윗의 삶을 가지고 보니 말의 힘줄을 끓어버린 내용이 나온다. 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다. 말씀에 순종해서 하는 것이다. 그 다윗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힘줄을 강조하다 무너지는 모습이 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 만나고 자신의 힘줄을 끓어버리고 죄인중의 죄인이라는 고백을 한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힘줄이 바뀌게 된다. 주님이야 말로 힘줄을 다 끓어버리신 분이시다.
이런 식으로 흐름을 가지고 어떤 순서를 가지고 설교할 것인가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누는 것이지 원고를 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선을 다해 철저히 준비해야 청중을 보고 설교할 수 있다. 설교하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잊어버릴 정도이면 안하는 것이 낫다. 설교자가 기억안날 정도이면 무슨 수로 성도들을 기억나게 하겠는가? 그런것에서 자유함을 가지라. 그래도 기억에 한계가 있으니 작은 메모가지고 나와 흐름을 확인한다. 원고를 읽지 말라는 것을 율법처럼 받아들이면 안되고, 필요한 것을 받아 하나라도 적용하라. 필요하면 거울을 보고 연습하라. 그래야 원고를 놓고 사람에게 대화하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설교는 문(文)이 아니라 설(說)이다. 말을 하는 것이다. 문(文), 읽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일어나 지금까지 했던 일을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정리안하고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원고 안 쓰고도 기억난다.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지 머릿속에 그려나가며 설교준비를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10년 지나도 한번 원고를 안보아도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머릿속에 흐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설교 준비할 때 문(文)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설(說)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가능하다.
2. 설교자의 얼굴이 설교를 담아내는가?
말보다 강한 것이 얼굴이다. 면접관이 사람을 보고 선택하는 시간은 얼마이겠는가? 이전에는 6초인데 요즘은 4초라고 한다. 그 시간 동안 100%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안 바뀌고 나머지 시간은 제대로 택했는가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바뀌는 경우도 있겠지만 첫인상은 거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가? 내용과 목소리와 태도이다. 3가지의 순위는 어떻게 되겠는가?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무엇인가? 보험을 가입할 때 깨알 같은 글을 읽지 않고 친구가 추천하니 가입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열고 지갑을 푸는 것은 무엇인가? 겨울옷을 살 때 영하 20도에 견디는가 보고 사는 여인이 있는가? 사놓고 왜 필요한지 설명한다. 사놓고 증거를 가지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한다. 딱 보고 사는 것이다.
실제 보면, 내용을 가지고 마음을 여는 것은 7%이다. 목소리로 마음을 여는 경우는 38%이며, 태도 몸짓 모습을 보고 결정하는 경우가 55%이다.
면접할 때 “들어오세요, 앉으세요”하면서 앉으면 6초 정도가 걸린다. 그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우리교회에 두 명 사역자를 모집하는데 60명의 목회자가 현재까지 지원했다. 그 60명 설교를 다 듣고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설교가 30분이면 3분을 들으면 거의 확실하고, 아니 20~10초만 들어도 거의 답이 나온다. 첫 목소리, 설교에 들어가는 모습, 태도 얼굴 눈빛만 보아도 웬만하면 다 된다. 학교에서 설교학 점수를 매길 때 처음에는 학생수가 많아 설교를 4분 시켰다가, 나중에 너무 많아 반을 나누고 8분을 시켰다. 4분 설교하면 다 듣는 것이 아니라 40초면 점수 매기고도 남는다. 첫 인상이 첫 모습이 중요하다. 태도가 중요하다.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강단에 서면 얼굴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표정이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다 묻어있다. 그 사람의 흰머리가 그 사람의 역사이다. 목회자가 강단에 선다면, 일주일 동안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고 연구하고 눈물을 쏟는 것을 가지고 나온다. 그러니 강단에 섰을 때 설교자의 모습이 중요하다. 설교자 얼굴이 과연 설교를 담아내고 있는가?
설교할 때 제스처를 사용한다. 저는 다니면서 설교하기에 자유롭지만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표정을 짓거나 몸짓을 할 때는 약하게 하면 뒤에서는 산만하게 보인다. 그래서 제스처를 할 때는 크게 하는 것이 좋다.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 진실한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은 평소의 삶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강단에서 얼굴이 중요하다고 화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먼저 나타나야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것이 “겸손하라. 당당하게” 라는 표현이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특히 청년에게 강조한다. 태도에서 겸손하지만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앞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우리교회 동영상으로 설교를 보면 전체 화면이 안 나와 못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앉아있다 중앙무대로 나오는 거리가 15보 정도이다. 걸어갈 때 성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걸어가는 것을 보면 힘이 막 생긴다고 한다. 제가 평소 걸음이라고 했지만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걷는다. 목회자가 힘없이 걷거나 처지면 성도들도 힘이 빠진다. 당당한 모습으로 가슴을 펴고 당당히 걸어 들어간다.
어떤 설교자는 강단에 서서 성경을 펴고, 원고를 정리하고, 머리를 만지고, 안경을 만지고, 코를 만지고 한다. 강단에 서면 준비된 모습으로 딱 서서 설교하는 것이다. 단 1초도 헛된 시간 보내지 말아야 한다. 클릭은 사람의 정신이 빠져 나가는 것이다. 설교를 듣다가 뭐 하나 클릭되면 다른 생각의 날개를 펼친다. 성도들에게 딱 주어진 25~30분이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강단에 서야 한다. 설교자는 얼굴을 바꾸려 하지 말고 삶을 바꾸어야 한다.
3. 대화하듯이 친밀하게 설교하는 것
강단에 서면 사나워지는 목사가 있다. 하지만 설교자는 목자이다. 양떼들을 먹이는 목자이다. 따스한 마음으로 서야 한다. 설교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다. 물론 설교자 혼자 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니 일방적 선포이기도 하지만, 대화하듯이 설교하는 것이다. 아버지도 자녀와 일방적이 아니라 대화하듯이 해야 효과가 있다. 수천 명 앞에 설교하더라도 한사람 앞에서 설교하듯이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잘 안되지만 그런 마음을 가자고 설교할 때 친밀하게 설교가 된다.
대화의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내는 최고의 힘은 친밀감이다. 목회자와 성도가 친밀하게 하나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보통 10-1000명 앞에서 설교해도 앞에서 대중을 향해 설교하다 보면 혼자서 때로는 독백조와 웅변조로 설교가 나올 때가 있는데 커뮤니케이션 상으로 보면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에게 하듯이 차분한 느낌으로 하는 설교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강조할수록 약한 소리로 분명한 어조로 한다. 막 크게 하면 머리가 아플 때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막 소리치는 분도 있는데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학적으로 전달력을 보면 좀 떨어질 수 있다.
강단에 있을 때 최고의 친밀감은 역시 목자의 심정이다. 예수님을 품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제가 중국에 처음 선교사 부름 받고 교수로 들어갔다. 중국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길거리 국수를 사먹는데 먼지가 많아 국물을 마시면 밑에 모래 같은 것이 가라앉아 있을 정도이다. 그때는 그것이 맛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 모든 것이 허용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어려움도 당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식으니 어느 순간 사랑만 베풀 것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같이 가지고 대해야 이들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의 날카로운 칼로 사람을 대하니 사랑이 하루아침에 죽었다.
예수님이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오셨는데, 만약 정의로 다가오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이다. 정의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심판이 아니라 죽으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죽으시고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시고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섬기시는 모습이 눈물겹다. 목자는 이런 것이다.
설명하는 목회자 되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목자라는 것은 품고 사랑하는 것밖에 없지 정의의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사용하게 되면 사랑은 순식간에 죽는다. 정의를 가지고 오셨더라면 누구도 주님 앞에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 마음으로 강단에 서기를 바란다.
집회를 다니다 보면 많은 목회자들이 장로들과 당회와의 갈등으로 고민한다. 그때마다 부탁한다. “저 한분이 변화되면 우리교회 모든 분이 정말 변화될 수 있겠구나. 예수님이 나를 그래도 사랑하셔서 나를 믿으시기에 저분을 맡겨주셨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라고 한다. 그렇게 제가 가르친 것을 제가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저의 교회 당회원들과 관계가 너무 좋다. 당회 할 때마다 얼굴을 박수치고 웃고 한다. 당회원들이 무엇을 하자고 하면 성경적으로 왔다갔다 할 정도가 아니면 다 알아서 하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우리교회에 누군지 모르는 마음에 부담스러운 한 분이 있는데 미워하지는 않으며 기도하고 있다.
강단에 그런 마음이 있어야 약이 나온다. 아니면 자칫 잘못하면 설교자에게 독이 나올 수 있다. 저 사람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치는 설교”라고 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식을 치는 부모는 없다.
4. 설교가 청중의 눈에 그려지는가?
설교자의 머릿속에 그려져야 청중에게도 머릿속에 그려지도록 만들어 낸다. 뉴스를 보면 남부지방에 100미리 비가 왔다고 하면 대부분은 100미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데 강의 물이 넘쳐 가슴까지 차고 소가 떠내려가는 것을 화면으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화면을 바라본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눈으로 보여주는 설교, 그것이 성도들의 눈과 귀를 열 수 있는 설교이다. 예수님이 설교할 때 비유로 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신다고 할 정도로 비유설교를 하셨다. 비유설교는 스토리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 누가 이웃인가를 물으며 딴지를 거는 율법사들이 온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자에게 가서 도와주는 것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아니하신다. 제사장 이야기, 레위인 이야기,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시고 “네가 생각하기에 누가 이웃인가? 선을 베푼 사람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천국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로 구원받는 자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면 끝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은 뭐와 같다고 계속 설명을 이야기로 꾸려 나가신다.
그래서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이야기식으로 구성되고 본문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은 설교라 볼 수 있다. 이것을 위해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조직신학 같은 내용인데, 이것을 눈으로 보여지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설교자들이 해야 할 몫이다. 이런 경우는 본문을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도 괜찮고, 좋은 예화를 가져와 설명하는 것도 괜찮고, 본문을 이야기로 잘 구성해 내는 것들도 다 필요할 것이다.
제가 많이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태양과 달의 관계 이야기이다. 청중의 눈에 그려지도록 하려면, 구름하나 없는 달처럼 깨끗하게 보여지도록 하려면 다듬고 또 다듬어서 청중들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언어가 힘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자료제공 복음뉴스(BogEu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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