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성 교수 "소강석 목사의 단점을 생명으로 살리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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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16-01-0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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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뉴욕남노회는 2016년 1월 4일(월) 뉴욕센트럴교회(김재열 목사)에서 신년하례예배를 열었다. 3부 특강의 순서에서 이희성 한국 총신대 교수는 "생명나무 신학과 목회적 적용"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이희성 교수는 사당동 총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면서, 새에덴교회에서 연구목사로 사역하며 소강석 목사의 설교와 목회에 신학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은 두 번째 기사로 "생명나무의 목회적인 적용"에 대한 내용이다. 앞선 기사에서 소강석 목사의 강단에서의 모습과 오늘날의 위상과는 갭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 기사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희성 교수는 목회현장에서 성도들이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과 선악과를 선택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이론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새에덴교회에서 소강석 목사, 그리고 부교역자와 중직자들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새해에 큰 도전을 주고 있다. 다음은 관련 내용이다.
▲열강하는 이희성 교수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는 늘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길이 놓여 있다. 이 선택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 중심의 교회
생명 중심의 교회이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사도 요한도 그렇고 이미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성전의 원형이다. 에덴동산의 한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듯이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의 복음이고 예수님의 생명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명만 들어가면 사람이 바뀐다. 생명이 역사하면 교회가 부흥한다. 생명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래서 교회의 인프라를 생명중심, 그것도 철철 넘치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교구와 부서가 생명나무의 신앙을 붙든다는 것은 복음을 붙든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든다는 것이다. 생명이 넘치는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생명은 21세기의 화두이다. 트리니티에서 생명윤리 컨퍼런스가 열렸는데 핵심은 생명이었다. 오늘날 얼마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가. 유전공학에서 인간복제등 얼마나 생명을 조작하는가. 21세기의 키워드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나무라는 키워드가 잘 먹혀 들어간다. 그런데 생명의 핵심중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민교회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핵심은 예수님의 복음인 줄로 믿는다. 교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면 되는 것이다. 생명력만 있으면 된다. 죽어있는 교회는 안된다. 선악과 교회처럼 생명이 없으면 안된다.
생명나무를 붙들고 인내하며 승리하는 신앙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선악과보다는 생명나무를 선택하라
성도들에게 생명나무를 붙들고 인내하며 승리하는 신앙을 가르쳐야 한다. 요한 계시록 2:7을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를 준다고 했다. 이 땅 교회를 섬길때 힘들고 어렵다. 새에덴교회 성도들중 어떤 분들은 애들의 학원비를 아껴서 사역헌금을 한다. 정말 눈물겨운 성도들이 많다. 어떤 성도는 너무나 어려워 대출을 받아서 헌금하는 분들도 있다. 생명을 붙들고 인내하며 승리하라. 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를 주신다는 약속을 붙잡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결국 목회는 성도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성도들이 교회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세상을 선택하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선택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나무가 목회적으로 작용하면 사명, 사랑, 인내, 화목, 충성, 헌신, 봉사, 용서, 긍정적인 믿음의 말 - 즉 인격과 관련되어 있다. 잠언에 나오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생명나무를 선택하자. 어떠한 상황이라도 생명나무를 선택하자.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을 목회적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소강석 목사와 대화하는데 이런 말을 한다. 한 사건이 교회에 일어났다면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생명나무의 시각으로 보는가 아니면 선악과의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교회가 완전히 달라진다. 간음한 여인이 대중앞에 끌려나왔을때 많은 바리새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을 치라고 하셨다. 이것이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는 그 사람의 실수와 허물과 연약한 것을 생명으로 덮어준다는 것이다. 반면 선악과 마인드는 까발리는 것이다. 자기의 판단으로 생각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사건이 생기면 생명나무 마인드로 덮어주어야 한다. 생명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생명나무 인프라의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특히 교회를 세우는 말이다. 긍정적인 믿음의 말이다. 잠언 10:20에는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했다. 생명나무의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새에덴교회 구역예배에서 공과공부를 하는데 외부에서 온 성도가 불평의 말을 한다. 소강석 목사가 솔직히 처음오는 사람에게 반감을 일으킨다. 와일드하고 예배중에 코도 풀고 한다. 불평의 말이 나와도 새에덴교회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은 그렇지 않다고 덮는다. 훈련된 새에덴교회 성도들은 선악과의 말을 들으면 이것은 생명의 언어가 아니라는 반응을 자동으로 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만 부끄럽게 되는 것이다.
새에덴교회 부목사 한 분이 논문을 썼는데 교회문화에 대한 내용이다. 교회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생명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누가 담임목사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어 이것은 생명의 언어가 아닌데'라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생명의 언어의 문화를 교육시켜야 한다.
선악과를 선택하면 교회분열로
선악과는 망하는 길이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지도자의 권위를 대적하고,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며, 결국 교회가 분열된다. 선악과는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다.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악을 알게된다고 말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교회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지도자도 자기기준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선악과이다. 나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것을 생명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지도자의 권위를 대적하는 것은 선악과이다. 한인이민교회는 목사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모든 부교역자들도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모든 생각을 맞추어야 한다. 담임목사의 목회철학, 담임목사가 바라보는 비전을 같이 보는 것이다. 부목사가 자기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목사도 하나님께 부름과 쓰임을 받지만 그러나 교회의 부사역자로 보낸 이상은 담임목사의 비전의 협력자이고 조력자이다. 이것을 부교역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담임목사의 권위에 대한 불평이 있을때에도 부사역자들이 막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담임목사가 목회할 수 있는 인프라를 깔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소강석 목사는 개인적으로 보면 거칠다. 다리도 떨고, 하모니카도 불고, 말이 거칠어 처음 교회에 온 성도들은 내가 아는 목사가 아닌데 하면서 교회를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부목사와 전도사들이 붙잡아서 무마시키고 교회에 정착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새에덴교회가 되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의 스케줄은 살인적이다. 밤 12시까지 심방한다. 미국집회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심방한다. 밤 12시까지 까지 심방하고,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고 설교준비를 하는 것을 옆에서 본다. 어떤때에는 새벽 1-2시에 저에게 전화를 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본다. 소강석 목사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렇다. 새벽 2-3시까지 설교준비를 하고, 8시에 일어나 스케줄을 다 소화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금야철야와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때로는 수요예배도 설교한다. 소강석 목사의 열심은 아무도 못 말린다. 성도들이 지켜보고 다 손을 든다. 소강석 목사의 헌신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성도들이 마음으로 느끼기에 목회가 되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에 대한 오해가 있을 경우에 주변에 있는 사역자들이 도와주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에 대해 긍정적인 생명나무의 신앙을 가질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목회에 있어 너무 중요하다. 실제적인 것이다. 이 역할을 누가 해 주어야 한다. 첫째는 부교역자들이 해 주어야 하고, 둘째는 교회의 장로와 권사들이 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목회가 된다. 저도 설교할때 제 잘난 학문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주님이 못하게 하신다. 담임목사의 권위를 세워주면 주님이 기뻐하신다. 희안하다. 하나님의 세계는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러면 하나님이 저도 세워주신다.
어떻게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 인해 타락한 죄성이 있기에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한다. 우리는 본성으로 선악과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내 자아가 나타나고 내 생각이 나타나서는 결코 생명나무를 선택할 수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인이민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못한다. 자기 생각이 다 옳고 자기 계획이 다 옳다. 인간의 생각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옛 사람이 죽고 예수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따라서 살아갈때 생명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소강석 목사는 성령을 굉장히 강조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죄성으로 선악과를 선택하는데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때 생명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안에 인프라가 생명중심이 된다.
미국의 소망은 한인교회에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웠기에 한인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한인이민교회는 잘되어야 한다. 한인이민교회가 잘되어야 세계선교가 일어난다. 그럴려면 교회마다 생명중심의 목회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생명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모든 교회의 체질이 바뀌어야 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다음은 두 번째 기사로 "생명나무의 목회적인 적용"에 대한 내용이다. 앞선 기사에서 소강석 목사의 강단에서의 모습과 오늘날의 위상과는 갭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 기사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희성 교수는 목회현장에서 성도들이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과 선악과를 선택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이론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새에덴교회에서 소강석 목사, 그리고 부교역자와 중직자들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새해에 큰 도전을 주고 있다. 다음은 관련 내용이다.
▲열강하는 이희성 교수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는 늘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길이 놓여 있다. 이 선택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 중심의 교회
생명 중심의 교회이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사도 요한도 그렇고 이미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성전의 원형이다. 에덴동산의 한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듯이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의 복음이고 예수님의 생명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명만 들어가면 사람이 바뀐다. 생명이 역사하면 교회가 부흥한다. 생명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래서 교회의 인프라를 생명중심, 그것도 철철 넘치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교구와 부서가 생명나무의 신앙을 붙든다는 것은 복음을 붙든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든다는 것이다. 생명이 넘치는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생명은 21세기의 화두이다. 트리니티에서 생명윤리 컨퍼런스가 열렸는데 핵심은 생명이었다. 오늘날 얼마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가. 유전공학에서 인간복제등 얼마나 생명을 조작하는가. 21세기의 키워드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나무라는 키워드가 잘 먹혀 들어간다. 그런데 생명의 핵심중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민교회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핵심은 예수님의 복음인 줄로 믿는다. 교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면 되는 것이다. 생명력만 있으면 된다. 죽어있는 교회는 안된다. 선악과 교회처럼 생명이 없으면 안된다.
생명나무를 붙들고 인내하며 승리하는 신앙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선악과보다는 생명나무를 선택하라
성도들에게 생명나무를 붙들고 인내하며 승리하는 신앙을 가르쳐야 한다. 요한 계시록 2:7을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를 준다고 했다. 이 땅 교회를 섬길때 힘들고 어렵다. 새에덴교회 성도들중 어떤 분들은 애들의 학원비를 아껴서 사역헌금을 한다. 정말 눈물겨운 성도들이 많다. 어떤 성도는 너무나 어려워 대출을 받아서 헌금하는 분들도 있다. 생명을 붙들고 인내하며 승리하라. 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를 주신다는 약속을 붙잡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결국 목회는 성도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성도들이 교회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세상을 선택하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선택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나무가 목회적으로 작용하면 사명, 사랑, 인내, 화목, 충성, 헌신, 봉사, 용서, 긍정적인 믿음의 말 - 즉 인격과 관련되어 있다. 잠언에 나오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생명나무를 선택하자. 어떠한 상황이라도 생명나무를 선택하자.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을 목회적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소강석 목사와 대화하는데 이런 말을 한다. 한 사건이 교회에 일어났다면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생명나무의 시각으로 보는가 아니면 선악과의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교회가 완전히 달라진다. 간음한 여인이 대중앞에 끌려나왔을때 많은 바리새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을 치라고 하셨다. 이것이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는 그 사람의 실수와 허물과 연약한 것을 생명으로 덮어준다는 것이다. 반면 선악과 마인드는 까발리는 것이다. 자기의 판단으로 생각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사건이 생기면 생명나무 마인드로 덮어주어야 한다. 생명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생명나무 인프라의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특히 교회를 세우는 말이다. 긍정적인 믿음의 말이다. 잠언 10:20에는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했다. 생명나무의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새에덴교회 구역예배에서 공과공부를 하는데 외부에서 온 성도가 불평의 말을 한다. 소강석 목사가 솔직히 처음오는 사람에게 반감을 일으킨다. 와일드하고 예배중에 코도 풀고 한다. 불평의 말이 나와도 새에덴교회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은 그렇지 않다고 덮는다. 훈련된 새에덴교회 성도들은 선악과의 말을 들으면 이것은 생명의 언어가 아니라는 반응을 자동으로 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만 부끄럽게 되는 것이다.
새에덴교회 부목사 한 분이 논문을 썼는데 교회문화에 대한 내용이다. 교회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생명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누가 담임목사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어 이것은 생명의 언어가 아닌데'라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생명의 언어의 문화를 교육시켜야 한다.
선악과를 선택하면 교회분열로
선악과는 망하는 길이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지도자의 권위를 대적하고,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며, 결국 교회가 분열된다. 선악과는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다.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악을 알게된다고 말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교회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지도자도 자기기준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선악과이다. 나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것을 생명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지도자의 권위를 대적하는 것은 선악과이다. 한인이민교회는 목사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모든 부교역자들도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모든 생각을 맞추어야 한다. 담임목사의 목회철학, 담임목사가 바라보는 비전을 같이 보는 것이다. 부목사가 자기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목사도 하나님께 부름과 쓰임을 받지만 그러나 교회의 부사역자로 보낸 이상은 담임목사의 비전의 협력자이고 조력자이다. 이것을 부교역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담임목사의 권위에 대한 불평이 있을때에도 부사역자들이 막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담임목사가 목회할 수 있는 인프라를 깔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소강석 목사는 개인적으로 보면 거칠다. 다리도 떨고, 하모니카도 불고, 말이 거칠어 처음 교회에 온 성도들은 내가 아는 목사가 아닌데 하면서 교회를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부목사와 전도사들이 붙잡아서 무마시키고 교회에 정착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새에덴교회가 되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의 스케줄은 살인적이다. 밤 12시까지 심방한다. 미국집회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심방한다. 밤 12시까지 까지 심방하고,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고 설교준비를 하는 것을 옆에서 본다. 어떤때에는 새벽 1-2시에 저에게 전화를 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본다. 소강석 목사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렇다. 새벽 2-3시까지 설교준비를 하고, 8시에 일어나 스케줄을 다 소화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금야철야와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때로는 수요예배도 설교한다. 소강석 목사의 열심은 아무도 못 말린다. 성도들이 지켜보고 다 손을 든다. 소강석 목사의 헌신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성도들이 마음으로 느끼기에 목회가 되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에 대한 오해가 있을 경우에 주변에 있는 사역자들이 도와주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에 대해 긍정적인 생명나무의 신앙을 가질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목회에 있어 너무 중요하다. 실제적인 것이다. 이 역할을 누가 해 주어야 한다. 첫째는 부교역자들이 해 주어야 하고, 둘째는 교회의 장로와 권사들이 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목회가 된다. 저도 설교할때 제 잘난 학문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주님이 못하게 하신다. 담임목사의 권위를 세워주면 주님이 기뻐하신다. 희안하다. 하나님의 세계는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러면 하나님이 저도 세워주신다.
어떻게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 인해 타락한 죄성이 있기에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한다. 우리는 본성으로 선악과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내 자아가 나타나고 내 생각이 나타나서는 결코 생명나무를 선택할 수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인이민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못한다. 자기 생각이 다 옳고 자기 계획이 다 옳다. 인간의 생각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옛 사람이 죽고 예수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따라서 살아갈때 생명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소강석 목사는 성령을 굉장히 강조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죄성으로 선악과를 선택하는데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때 생명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안에 인프라가 생명중심이 된다.
미국의 소망은 한인교회에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웠기에 한인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한인이민교회는 잘되어야 한다. 한인이민교회가 잘되어야 세계선교가 일어난다. 그럴려면 교회마다 생명중심의 목회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생명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모든 교회의 체질이 바뀌어야 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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