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 목사 ① 건강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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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14-10-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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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미국장로교 전국한인목회자 컨퍼런스가 "목회자의 자기관리"라는 주제로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리노한인장로교회에서 열렸다. 주강사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4개의 주강의를 했는데 △건강한 목회 △건강한 영성 △목회와 설교 △성령과 설교 등이다.
두번째 강의인 '건강한 영성'을 두번에 걸쳐 소개한다. 이동원 목사는 교회 목회를 은퇴한 목회자로서 솔직하며 간증적인 강의를 했다. 이동원 목사는 지난 15여년동안 '영성'이라는 화두에 빠져 있었으며, 그 한 결과 은퇴후 경기도 가평에 필그림하우스라는 영성의 집을 만들고 영성을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필그림하우스에는 개신교 영성을 대표하는 천로역정에 대한 테마 파크를 만들고 있으며, 내년 9월에 완공한다고 소개했다.
이동원 목사는 게리 토마스의 9가지 영성, 리차드 포스터의 영성의 6가지 전통 등을 소개하며 영성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이어 이동원 목사는 한국교회라는 상황속에서 우리가 추구해 왔던 4가지 영성을 소개했다. 또 자신의 영성의 성향이 복음주의-오순절주의-사회 복음주의-수도원주의 순서대로 바뀌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고 간증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집회를 인도하는 이동원 목사
지난 14-15년동안 영성이라는 화두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성에 대해 생각도 좀 했고, 책도 읽었고, 적용하려고 애를 썼고, 그것때문에 몸살을 앓기도 했다. 결국 내면의 영성이 나의 목회를 만들고, 나라는 인생을 만들기에 결코 영성이라는 화두를 지나갈 수 없다. 물론 영성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불교, 힌두교, 심지어 뉴에이지도 영성을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적 영성 사역자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영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든지 두가지 단어없이는 영성에 대한 접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과 나의 영이다. 성령님께 나의 영이 반응해서 만들어내는 영적인 삶이 결국 영성의 본질이 아닐까 쉽게 생각해 본다.
제가 신학교 다닐때만 해도 영성에 대한 과목이 없었는데 최근에 와서 영성에 대한 추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새로운 트랜드로 볼 수 있다. 시간의 제한때문에 영성에 대한 많은 것을 나눌수는 없다. 은퇴사역으로 경기도 가평에 필그림하우스라는 영성의 집을 만들고 2-3박 동안 영성을 주제로 목회자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영성의 핵적인 것만 몇가지 나누고자 한다.
브래들리 홀트는 다른 종교도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말을 했다. 또 그는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이고 전 세계적인 것이며 그것은 2천년 동안 발전되어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로서 최근 탐 라이트와 함께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는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책들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것을 하나의 표현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영성은 다양한 표현이 있다. 기독교안에서도 다양한 표현들이 있을 수 있는데 결국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이 다양한 영성의 유형들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게리 토마스의 9가지 영성
복음주의적 영성가로 알려진 게리 토마스가 쓴 책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이 된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보면 9가지 영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의 기질이나 개성에 따라서 성령에 반응하는 스타일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때 이러한 유형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게리 토마스가 9가지로 구분한 영성은 다음과 같다. 자연주의, 감각주의, 전통주의, 금욕주의, 행동주의, 박애주의, 열정주의, 묵상주의, 지성주의.
자연주의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연속에서 가장 편안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성경에도 그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자연주의는 자연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감각주의는 신비한 건축물 또한 예배의 어떤 도구를 통해서 감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통주의는 우리 기독교 교회안에 내려오는 전통을 통해서 가장 편안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규칙적인 예배, 기도문, 예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장 편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전통예배는 결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통을 좋아하는 흐름은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금욕주의는 어떤 자기절제, 금식이나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동주의는 어떤 사회적인 정의를 가지고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박애주의는 사랑의 실천과 이웃들을 향한 긍휼, 그들을 품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열정주의는 특별한 축제, 기획된 예배를 통해 열정이 솟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묵상주의는 조용히 홀로있는 독거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성주의는 어떤 사색과 토론 등 지성적인 추구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의 영성의 6가지 전통
리차드 포스터는 영성의 전통을 6가지로 줄여서 우리에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 <생수의 강>을 보면 묵상의 전통, 성결의 전통, 카리스마의 전통, 사회정의의 전통, 복음전도의 전통, 성육신의 전통 등 6가지 영성의 전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묵상의 전통은 성경의 사도 요한, 수도원 운동의 창설자 안토니우스, 필리핀의 사역했던 프랭크 로바흐 등이 해당한다. 프랭크 로바흐는 1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성결의 전통은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통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야고보, 피비 팔머, 본훼퍼 등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는 것이 성결의 전통이다.
셋째, 카리스마의 전통은 사도 바울, 프란체스코, 윌리암 시모어 등이 해당된다. 영적 은사를 경험하는 것이 카리스마의 전통이다. 윌리암 시모어는 아주사 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있었으며 현대 오순절 운동을 몰고왔던 사람이다. 넷째, 사회정의의 전통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우리 동역자들이 늘 강조했던 성경구절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라는 아모스의 전통, 존 울먼의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퀘이커의 전통, 도로시 데이의 일종의 크리스찬 소시얼리즘을 제창했던 전통 들이 있다.
다섯째는 복음전도의 전통으로 베드로, 어거스틴, 빌리 그레이엄 등이 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서 영혼의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즐겨했던 사람들이다. 여섯째는 성육신의 전통으로 예수, 브살렐/수산나 웨슬리, 함마슐드 등이 있다. 일상의 삶의 한복판, 날마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즐겨했던 사람들, 예수님도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브살렐은 성막 건축을 하면서 그것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많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수산나 웨슬리, 유엔 사무총장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늘 성경을 묵상한 함마슐드 같은 사람이 생활과 영성을 분리하지 않고 삶의 한복판에서 영성을 경험했던 전통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리차드 포스터와 교제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가 강조하는 핵심은 우리가 다른 영성의 전통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영성에 균형이 생긴다. 이 부분이 리차드 포스터의 탁월한 기여라고 생각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9가지 만남"이라는 성경공부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교재의 특징은 내게 없는 전통을 좀 배우라는 것이다. 그래야 영성에 균형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 쪽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고, 좀 더 건강한 균형을 가진 영성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동원 목사의 한국교회 4가지 영성
저는 4가지로 줄여보았다. 한국교회라는 상황속에서 우리가 추구해 왔던 영성, 영성이라는 단어를 안쓸때도 우리는 영성을 추구해 왔는데 어떻게 추구해 왔을까? 한국교회는 크게 4가지 전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복음주의(Evangelicalism)로 한국교회의 가장 많은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의 목표는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한다. 성경공부같은 것을 통해 우리가 믿어야 할 명제적 진리를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방법으로는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 붙잡어야 할 진리가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것이 복음주의 전통 혹은 개혁주의 전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에서 부족했던 부분은 예배라는 갈망, 채워지지 않는 예배에 대한 갈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을 많이 발견한다.
둘째,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가 있다. 하나님의 진리, 믿어야 할 진리, 고백해야 할 진리, 붙잡아야 할 진리, 전해야 할 진리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전통이 강조했다다. 오순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하는 것, 은사집회를 하고, 은사를 위해 기도하고, 은사를 받고, 은사를 나누고, 은사를 추구한다. 오순절주의의 방법은 예배이다. 개인예배이든지 공중예배이든지 예배하는 도중에 은사를 받고 방언을 하고 하는 것이 오순절주의이다. 이들에게 결핍된 갈망은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서 오순절 교회인 순복음교회에 있던 분들이 우리 교회에 오면 잘 적응한다. 열정은 그대로 있고, 헝그리했던 성경공부 과정을 통해 잘 정착하는 모습을 본다.
셋째, 사회 복음주의(Socio-evangelicalism)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의 마당에서 사회 복음주의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길이다. 주로 한국에서는 기장, 감리교, 그리고 통합 일부에서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걸어왔던 길이 사회 복음주의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역사안에 사회안에 실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방법은 행동이다. 사회참여 행동을 통해서 그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결핍된 것은 행동만 하다보면 내면의 고갈을 경험한다. 이들에게도 결핍된 갈망은 묵상에 대한 갈망이다. 열심히 다니면서 데모도 하고 행동도 하고 투쟁도 하는데 자기 안이 비어가는 것을 경험하기에 묵상에 대한 갈망이 있다.
넷째, 수도원주의(Monasticism)으로 한국교회에 비교적 최근에 와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개신교 보다는 과거의 로마 카톨릭이 수도원주의를 추구했다. 저만해도 사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는 과거에 공부할때, 수도원 운동하면 도피주의와 신비주의로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으로 배웠었다. 좀 더 신앙생활이 지나면서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월 스나이더의 책에서 최근에 많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수도원주의 운동을 개신교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개신교의 앞 길은 어쩌면 매우 어두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부터 다시 한번 좋은 보석들을 건져내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말에 공감하고 싶었다. 결국 수도원주의 운동이 추구했던 궁극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 그리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수도원주의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 방법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수도원주의의 결핍된 갈망은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다 될 것인가 하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영성의 이동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숙해 지는 과정에 서 영성의 이동이 있다. 복음주의 전통에 있던 사람은 신앙이 성숙하면서 결핍되었던 것을 채우기 위해 주로 다음 스탭으로 가는 것이 오순절주의이다. 결핍된 예배의 갈망을 채우려고 열심히 예배에 몰입하고 예배하다가 은사도 경험한다. 오순절주의에 있던 사람은 다음 스탭으로 복음주의로 많이 간다. 둘이 서로 많이 왔다 갔다 한다.
반면 사회 복음주의로 열심히 사회운동을 하다가 결핍된 갈망을 가지고 채우기위해 주로 가는 곳이 수도원운동이다. 최일도 형제가 열심히 청량리에서 사회운동을 하다보니 이것만 가지고 안되겠다 해서 영성운동을 해야겠다고 들어가 묵상도 해보고 기도도 한다. 세이비어 교회가 추구하는 길도 비슷하다. 반대로 수도원주의 운동하던 사람들은 주로 사회 복음주의로 간다. 수도원에서 묵상과 기도만 한다고 전부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도 행동해야 하지 않는가 해서 묵상했던 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와 생각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생각을 해 보자. 4가지 전통이 추구했던 가치;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등 4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가 소흘히 할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왔던 그 전통안에 갇혀있기에 자기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복음주의에서 살다가 복음주의 안에서 죽는다. 어떤 사람은 사회 복음주의에서 시작해서 평생 투쟁하다가 돌아가신 분도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살아왔던 세계가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며 겸허하게 다른 전통을 배우려 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그만큼 그들에 있어서 균형잡힌 영성의 추구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같은 경우에도 처음에 아주 근본주의적인 성격의 선교사들에게 전도받아 성경공부하다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어쩌다 젊은이 수양회를 갔다가 혼자 방언을 받았다. 나는 선교사에게서 방언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 배웠다. 공부한 신학교에서도 모든 은사는 과거에 초대교회에서 끝났다고 배웠다. 그런데 내 옆의 아내가 방언을 한다. 참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내에게 방언이 마귀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며 하지말라고 주의도 주었다. 하지만 아내의 정직성과 순결성을 볼 때, 아내는 전혀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혼자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을 통해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쩌면 아내가 맞을지 모른다는 조용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러한 오순절운동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좀 마음이 넓어졌다. 또 복음주의 전통속에 살다보니, 복음주의 전통안에서 군사독재 시대에 암울했던 시대에 나도 청년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학생들에게 사회정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제시할 수 없었다. 그것에서 오는 양심의 가책때문에, 과연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는데 침묵만 하는 것이 전부인가, 사회 복음주의 길에 헌신한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저는 복음주의에서 시작하여 오순절주의 그리고 사회 복음주의로 왔다가, 목회의 거의 마지막 마무리에 와서 '영성'이라는 화두에 걸리면서 수도원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10년간 미친듯 수도원운동의 흐름들을 찾고, 같이 기도도 해 보고, 내가 몰랐던 부유한 광맥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때문에 훨씬 적어도 내면에 훨씬 더 커다란 부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직한 나의 고백이다. 같은 교단에 있는 목회자라도 영적인 경험의 전이는 매우 다양하다.
저는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에서 가장 붙잡아야 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일가. 그것은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두번째 강의인 '건강한 영성'을 두번에 걸쳐 소개한다. 이동원 목사는 교회 목회를 은퇴한 목회자로서 솔직하며 간증적인 강의를 했다. 이동원 목사는 지난 15여년동안 '영성'이라는 화두에 빠져 있었으며, 그 한 결과 은퇴후 경기도 가평에 필그림하우스라는 영성의 집을 만들고 영성을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필그림하우스에는 개신교 영성을 대표하는 천로역정에 대한 테마 파크를 만들고 있으며, 내년 9월에 완공한다고 소개했다.
이동원 목사는 게리 토마스의 9가지 영성, 리차드 포스터의 영성의 6가지 전통 등을 소개하며 영성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이어 이동원 목사는 한국교회라는 상황속에서 우리가 추구해 왔던 4가지 영성을 소개했다. 또 자신의 영성의 성향이 복음주의-오순절주의-사회 복음주의-수도원주의 순서대로 바뀌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고 간증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집회를 인도하는 이동원 목사
지난 14-15년동안 영성이라는 화두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성에 대해 생각도 좀 했고, 책도 읽었고, 적용하려고 애를 썼고, 그것때문에 몸살을 앓기도 했다. 결국 내면의 영성이 나의 목회를 만들고, 나라는 인생을 만들기에 결코 영성이라는 화두를 지나갈 수 없다. 물론 영성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불교, 힌두교, 심지어 뉴에이지도 영성을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적 영성 사역자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영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든지 두가지 단어없이는 영성에 대한 접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과 나의 영이다. 성령님께 나의 영이 반응해서 만들어내는 영적인 삶이 결국 영성의 본질이 아닐까 쉽게 생각해 본다.
제가 신학교 다닐때만 해도 영성에 대한 과목이 없었는데 최근에 와서 영성에 대한 추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새로운 트랜드로 볼 수 있다. 시간의 제한때문에 영성에 대한 많은 것을 나눌수는 없다. 은퇴사역으로 경기도 가평에 필그림하우스라는 영성의 집을 만들고 2-3박 동안 영성을 주제로 목회자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영성의 핵적인 것만 몇가지 나누고자 한다.
브래들리 홀트는 다른 종교도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말을 했다. 또 그는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이고 전 세계적인 것이며 그것은 2천년 동안 발전되어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로서 최근 탐 라이트와 함께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는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책들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것을 하나의 표현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영성은 다양한 표현이 있다. 기독교안에서도 다양한 표현들이 있을 수 있는데 결국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이 다양한 영성의 유형들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게리 토마스의 9가지 영성
복음주의적 영성가로 알려진 게리 토마스가 쓴 책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이 된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보면 9가지 영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의 기질이나 개성에 따라서 성령에 반응하는 스타일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때 이러한 유형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게리 토마스가 9가지로 구분한 영성은 다음과 같다. 자연주의, 감각주의, 전통주의, 금욕주의, 행동주의, 박애주의, 열정주의, 묵상주의, 지성주의.
자연주의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연속에서 가장 편안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성경에도 그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자연주의는 자연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감각주의는 신비한 건축물 또한 예배의 어떤 도구를 통해서 감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통주의는 우리 기독교 교회안에 내려오는 전통을 통해서 가장 편안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규칙적인 예배, 기도문, 예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장 편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전통예배는 결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통을 좋아하는 흐름은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금욕주의는 어떤 자기절제, 금식이나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동주의는 어떤 사회적인 정의를 가지고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박애주의는 사랑의 실천과 이웃들을 향한 긍휼, 그들을 품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열정주의는 특별한 축제, 기획된 예배를 통해 열정이 솟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묵상주의는 조용히 홀로있는 독거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성주의는 어떤 사색과 토론 등 지성적인 추구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의 영성의 6가지 전통
리차드 포스터는 영성의 전통을 6가지로 줄여서 우리에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 <생수의 강>을 보면 묵상의 전통, 성결의 전통, 카리스마의 전통, 사회정의의 전통, 복음전도의 전통, 성육신의 전통 등 6가지 영성의 전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묵상의 전통은 성경의 사도 요한, 수도원 운동의 창설자 안토니우스, 필리핀의 사역했던 프랭크 로바흐 등이 해당한다. 프랭크 로바흐는 1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성결의 전통은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통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야고보, 피비 팔머, 본훼퍼 등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는 것이 성결의 전통이다.
셋째, 카리스마의 전통은 사도 바울, 프란체스코, 윌리암 시모어 등이 해당된다. 영적 은사를 경험하는 것이 카리스마의 전통이다. 윌리암 시모어는 아주사 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있었으며 현대 오순절 운동을 몰고왔던 사람이다. 넷째, 사회정의의 전통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우리 동역자들이 늘 강조했던 성경구절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라는 아모스의 전통, 존 울먼의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퀘이커의 전통, 도로시 데이의 일종의 크리스찬 소시얼리즘을 제창했던 전통 들이 있다.
다섯째는 복음전도의 전통으로 베드로, 어거스틴, 빌리 그레이엄 등이 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서 영혼의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즐겨했던 사람들이다. 여섯째는 성육신의 전통으로 예수, 브살렐/수산나 웨슬리, 함마슐드 등이 있다. 일상의 삶의 한복판, 날마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즐겨했던 사람들, 예수님도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브살렐은 성막 건축을 하면서 그것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많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수산나 웨슬리, 유엔 사무총장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늘 성경을 묵상한 함마슐드 같은 사람이 생활과 영성을 분리하지 않고 삶의 한복판에서 영성을 경험했던 전통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리차드 포스터와 교제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가 강조하는 핵심은 우리가 다른 영성의 전통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영성에 균형이 생긴다. 이 부분이 리차드 포스터의 탁월한 기여라고 생각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9가지 만남"이라는 성경공부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교재의 특징은 내게 없는 전통을 좀 배우라는 것이다. 그래야 영성에 균형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 쪽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고, 좀 더 건강한 균형을 가진 영성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동원 목사의 한국교회 4가지 영성
저는 4가지로 줄여보았다. 한국교회라는 상황속에서 우리가 추구해 왔던 영성, 영성이라는 단어를 안쓸때도 우리는 영성을 추구해 왔는데 어떻게 추구해 왔을까? 한국교회는 크게 4가지 전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복음주의(Evangelicalism)로 한국교회의 가장 많은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의 목표는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한다. 성경공부같은 것을 통해 우리가 믿어야 할 명제적 진리를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방법으로는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 붙잡어야 할 진리가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것이 복음주의 전통 혹은 개혁주의 전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에서 부족했던 부분은 예배라는 갈망, 채워지지 않는 예배에 대한 갈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을 많이 발견한다.
둘째,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가 있다. 하나님의 진리, 믿어야 할 진리, 고백해야 할 진리, 붙잡아야 할 진리, 전해야 할 진리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전통이 강조했다다. 오순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하는 것, 은사집회를 하고, 은사를 위해 기도하고, 은사를 받고, 은사를 나누고, 은사를 추구한다. 오순절주의의 방법은 예배이다. 개인예배이든지 공중예배이든지 예배하는 도중에 은사를 받고 방언을 하고 하는 것이 오순절주의이다. 이들에게 결핍된 갈망은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서 오순절 교회인 순복음교회에 있던 분들이 우리 교회에 오면 잘 적응한다. 열정은 그대로 있고, 헝그리했던 성경공부 과정을 통해 잘 정착하는 모습을 본다.
셋째, 사회 복음주의(Socio-evangelicalism)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의 마당에서 사회 복음주의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길이다. 주로 한국에서는 기장, 감리교, 그리고 통합 일부에서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걸어왔던 길이 사회 복음주의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역사안에 사회안에 실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방법은 행동이다. 사회참여 행동을 통해서 그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결핍된 것은 행동만 하다보면 내면의 고갈을 경험한다. 이들에게도 결핍된 갈망은 묵상에 대한 갈망이다. 열심히 다니면서 데모도 하고 행동도 하고 투쟁도 하는데 자기 안이 비어가는 것을 경험하기에 묵상에 대한 갈망이 있다.
넷째, 수도원주의(Monasticism)으로 한국교회에 비교적 최근에 와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개신교 보다는 과거의 로마 카톨릭이 수도원주의를 추구했다. 저만해도 사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는 과거에 공부할때, 수도원 운동하면 도피주의와 신비주의로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으로 배웠었다. 좀 더 신앙생활이 지나면서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월 스나이더의 책에서 최근에 많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수도원주의 운동을 개신교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개신교의 앞 길은 어쩌면 매우 어두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부터 다시 한번 좋은 보석들을 건져내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말에 공감하고 싶었다. 결국 수도원주의 운동이 추구했던 궁극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 그리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수도원주의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 방법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수도원주의의 결핍된 갈망은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다 될 것인가 하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영성의 이동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숙해 지는 과정에 서 영성의 이동이 있다. 복음주의 전통에 있던 사람은 신앙이 성숙하면서 결핍되었던 것을 채우기 위해 주로 다음 스탭으로 가는 것이 오순절주의이다. 결핍된 예배의 갈망을 채우려고 열심히 예배에 몰입하고 예배하다가 은사도 경험한다. 오순절주의에 있던 사람은 다음 스탭으로 복음주의로 많이 간다. 둘이 서로 많이 왔다 갔다 한다.
반면 사회 복음주의로 열심히 사회운동을 하다가 결핍된 갈망을 가지고 채우기위해 주로 가는 곳이 수도원운동이다. 최일도 형제가 열심히 청량리에서 사회운동을 하다보니 이것만 가지고 안되겠다 해서 영성운동을 해야겠다고 들어가 묵상도 해보고 기도도 한다. 세이비어 교회가 추구하는 길도 비슷하다. 반대로 수도원주의 운동하던 사람들은 주로 사회 복음주의로 간다. 수도원에서 묵상과 기도만 한다고 전부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도 행동해야 하지 않는가 해서 묵상했던 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와 생각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생각을 해 보자. 4가지 전통이 추구했던 가치;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등 4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가 소흘히 할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왔던 그 전통안에 갇혀있기에 자기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복음주의에서 살다가 복음주의 안에서 죽는다. 어떤 사람은 사회 복음주의에서 시작해서 평생 투쟁하다가 돌아가신 분도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살아왔던 세계가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며 겸허하게 다른 전통을 배우려 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그만큼 그들에 있어서 균형잡힌 영성의 추구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같은 경우에도 처음에 아주 근본주의적인 성격의 선교사들에게 전도받아 성경공부하다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어쩌다 젊은이 수양회를 갔다가 혼자 방언을 받았다. 나는 선교사에게서 방언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 배웠다. 공부한 신학교에서도 모든 은사는 과거에 초대교회에서 끝났다고 배웠다. 그런데 내 옆의 아내가 방언을 한다. 참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내에게 방언이 마귀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며 하지말라고 주의도 주었다. 하지만 아내의 정직성과 순결성을 볼 때, 아내는 전혀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혼자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을 통해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쩌면 아내가 맞을지 모른다는 조용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러한 오순절운동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좀 마음이 넓어졌다. 또 복음주의 전통속에 살다보니, 복음주의 전통안에서 군사독재 시대에 암울했던 시대에 나도 청년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학생들에게 사회정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제시할 수 없었다. 그것에서 오는 양심의 가책때문에, 과연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는데 침묵만 하는 것이 전부인가, 사회 복음주의 길에 헌신한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저는 복음주의에서 시작하여 오순절주의 그리고 사회 복음주의로 왔다가, 목회의 거의 마지막 마무리에 와서 '영성'이라는 화두에 걸리면서 수도원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10년간 미친듯 수도원운동의 흐름들을 찾고, 같이 기도도 해 보고, 내가 몰랐던 부유한 광맥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때문에 훨씬 적어도 내면에 훨씬 더 커다란 부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직한 나의 고백이다. 같은 교단에 있는 목회자라도 영적인 경험의 전이는 매우 다양하다.
저는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에서 가장 붙잡아야 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일가. 그것은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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