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리 권사 간증 "내가 잘 알려진 것은 이때를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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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 2005-11-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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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4일(금) 저녁 순복음뉴욕교회(김남수 목사)는 월드비젼 친선대사이며 크리스챤 연예인으로 잘 알려진 정애리 권사를 초청하여 간증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정애리 권사의 간증이 시작하기전 10분동안 월드비젼 친선대사로서 정애리 권사의 사역을 알리는 동영상을 상영했다. "어려운 사람의 손을 잡아주면서 오히려 제가 더 행복했어요"라는 정권사의 멘트가 나오는 동영상은 몽골, 인도, 북한, 한국의 불우한 우리의 이웃의 모습이 비추어 지고 있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몽골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소녀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화상치료가 아니라 영양보충"이라는 멘트가 나오자 교회당은 더욱 숙연해진다.
이어 김남수 목사는 "지구촌의 굶주린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정애리 권사는 우리가 잘 아는 '상두야 학교가자', '불멸의 이순신'등에 출연한 배우"라고 소개한다.
동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단상에 서서, 스스로 "고장난 수도꼭지"로 자신을 소개한 정애리 권사는 1시간 반 동안 자신의 삶을 간증했다. 정애리 권사는 자신은 조금씩 모르는 사이에 감사의 비를 맞아 젖은 "이슬비 신앙"이라며, "내가 잘 알려진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간증했다. 아래는 간증 내용이다.
모태신앙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나는 굴비의 고장인 영광에서 태어나 유교적이며 불교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때 서울로 이사 와서 크리스마스 때 사탕을 준다는 유혹에 교회에 처음 나갔다. 그 다음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의 관리아래로 들어갔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한두 번 교회에 나갔으며, 고등학교 때는 뺑뺑이로 미션학교에 들어가 일주일에 한번은 예배를 보고 성경공부를 하는 기회를 가졌다. 성경공부 시간 때는 매번 성경공부를 하기보다는 예수 영화도 보여주고 쉬게 해주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고 편하게 내안에 예수가 들어가게 되었다. 졸업할 때 쯤 하나님과 예수님이 편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나중에 미션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을 접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꼼꼼한 편인 내가 따지고 들었으면 신앙을 가지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6남매의 막내인 나는 오빠의 권유로 연극경험도 없이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78년 KBS 탈렌트 시험에 응시해서 대상으로 합격했다. 사람들은 탈렌트 시험에 되었다고 하자 내향적인 내가 아니고 외향적인 언니가 된 줄 알 정도였다. 당시의 나의 신앙은 막연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는 정도였고 어떤 갈구나 확신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왜 나를 많은 사람 앞에 서게 하셨는지 지금은 확실히 안다. 나를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탈렌트가 되고 선배를 따라 다니고, 책도 읽어 열심히 연기를 배웠다. 주어진 배역도 이미지가 좋은 역할들이 대부분이었다. 선택당하는 배우라는 직업에서도 이런 역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 MBC에 와서 촬영하다가 밤을 새우고 아침에 웃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업외의 다른 것에 전혀 기쁨이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나중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하는 질문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션 학교때의 평화로움이 그리워지게 되었다. 왠지 교회에 가면 평화로움이 있을 것 같아 대중에 노출을 피해 모자와 안경을 쓰고 집근처 대형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변화한 사람이 아니라 조금씩 모르는 사이에 감사의 비를 맞아 젖은 "이슬비 신앙"이다. 어느 순간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주일날 스케줄을 피해주는 것을 부탁했지만 이제는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한다. "공인된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기독교방송국(CTS)이 개국하고 선교사와 대담하는 "땅끝이야기"의 진행을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마치 하나님은 내가 그네를 타면 미시며 "조금 더 앞으로 가지 않을래"라고 부드럽게 말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10여년된 프로그램인 CBS의 "새롭게 하소서"의 진행을 요청받았다. 당시 나는 세상과 하나님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형상이었다. 내가 이 프로그램까지 하면 본격적으로 "예수쟁이"라는 소리와 "한물가서 기독교방송에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요청을 받은 기간까지 대답을 못했다. 그때는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자로도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음악프로그램은 출연료도 2배였으며 일도 더 즐거웠다. 그런데 그때 "이제 나와 함께 일해야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내가 달라졌다. 촬영하러 나간 고아원에서의 작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부모사랑을 못 받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원장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바빠서 못 가다가 다른 촬영장으로 가다 그 고아원을 보고 시간을 내어 다시 방문했다. 방문하여 눈에 띄는 깔끔한 아이를 먼저 안았다. 이제는 코 흘리는 아이를 자연스럽게 먼저 안아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해외 현장을 많이 찾아 다녔다. 연변의 한 교회에 5명의 탈북자가 찾아 왔다. 그중 한명은 임신 9개월이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하다가 배에 손을 대게 되었는데 (정애리 권사 울기 시작 함) 너무 못 먹고 힘들어 딱딱하게 굳어있는 배를 느끼고 울었다. 그들은 환경과 지위가 아닌 단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용한 양식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연변교회는 탈북자를 위해 항상 밥을 해 놓고 준비한다. 나는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환경과 시간으로 봉사한 것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표현이 안되면 사랑이 아니다. 희생과 수고 없는 사랑은 없다. 나는 사랑의 현장이 기쁘다. 300여명에게 노련한 실력으로 밥을 퍼주기도 했다. 내가 봉사하는 기관이 방송에 나간 다음 많은 분들이 물질과 봉사로 참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잘 알려진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만나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껴안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내 코를 막아 주셨다.
주님을 만나 복을 받았다. 돈과 환경이 아니라 복을 헤아릴 줄 아는 복을 받게 되었다. 내가 예쁘지 않은가? 공주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이다. 10년 뒤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이사를 준비하다가 중요한 아주 중요한 이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이사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를 잘하려면 내가 있는 현장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막내오빠가 방광암에 걸렸다. 그것을 계기로 가족들이 주님에게 온전히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 이사가는 땅에서 다 만나시기를 바란다. 사랑합니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정애리 권사의 간증이 시작하기전 10분동안 월드비젼 친선대사로서 정애리 권사의 사역을 알리는 동영상을 상영했다. "어려운 사람의 손을 잡아주면서 오히려 제가 더 행복했어요"라는 정권사의 멘트가 나오는 동영상은 몽골, 인도, 북한, 한국의 불우한 우리의 이웃의 모습이 비추어 지고 있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몽골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소녀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화상치료가 아니라 영양보충"이라는 멘트가 나오자 교회당은 더욱 숙연해진다.
이어 김남수 목사는 "지구촌의 굶주린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정애리 권사는 우리가 잘 아는 '상두야 학교가자', '불멸의 이순신'등에 출연한 배우"라고 소개한다.
동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단상에 서서, 스스로 "고장난 수도꼭지"로 자신을 소개한 정애리 권사는 1시간 반 동안 자신의 삶을 간증했다. 정애리 권사는 자신은 조금씩 모르는 사이에 감사의 비를 맞아 젖은 "이슬비 신앙"이라며, "내가 잘 알려진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간증했다. 아래는 간증 내용이다.
모태신앙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나는 굴비의 고장인 영광에서 태어나 유교적이며 불교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때 서울로 이사 와서 크리스마스 때 사탕을 준다는 유혹에 교회에 처음 나갔다. 그 다음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의 관리아래로 들어갔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한두 번 교회에 나갔으며, 고등학교 때는 뺑뺑이로 미션학교에 들어가 일주일에 한번은 예배를 보고 성경공부를 하는 기회를 가졌다. 성경공부 시간 때는 매번 성경공부를 하기보다는 예수 영화도 보여주고 쉬게 해주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고 편하게 내안에 예수가 들어가게 되었다. 졸업할 때 쯤 하나님과 예수님이 편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나중에 미션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을 접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꼼꼼한 편인 내가 따지고 들었으면 신앙을 가지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6남매의 막내인 나는 오빠의 권유로 연극경험도 없이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78년 KBS 탈렌트 시험에 응시해서 대상으로 합격했다. 사람들은 탈렌트 시험에 되었다고 하자 내향적인 내가 아니고 외향적인 언니가 된 줄 알 정도였다. 당시의 나의 신앙은 막연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는 정도였고 어떤 갈구나 확신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왜 나를 많은 사람 앞에 서게 하셨는지 지금은 확실히 안다. 나를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탈렌트가 되고 선배를 따라 다니고, 책도 읽어 열심히 연기를 배웠다. 주어진 배역도 이미지가 좋은 역할들이 대부분이었다. 선택당하는 배우라는 직업에서도 이런 역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 MBC에 와서 촬영하다가 밤을 새우고 아침에 웃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업외의 다른 것에 전혀 기쁨이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나중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하는 질문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션 학교때의 평화로움이 그리워지게 되었다. 왠지 교회에 가면 평화로움이 있을 것 같아 대중에 노출을 피해 모자와 안경을 쓰고 집근처 대형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변화한 사람이 아니라 조금씩 모르는 사이에 감사의 비를 맞아 젖은 "이슬비 신앙"이다. 어느 순간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주일날 스케줄을 피해주는 것을 부탁했지만 이제는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한다. "공인된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기독교방송국(CTS)이 개국하고 선교사와 대담하는 "땅끝이야기"의 진행을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마치 하나님은 내가 그네를 타면 미시며 "조금 더 앞으로 가지 않을래"라고 부드럽게 말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10여년된 프로그램인 CBS의 "새롭게 하소서"의 진행을 요청받았다. 당시 나는 세상과 하나님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형상이었다. 내가 이 프로그램까지 하면 본격적으로 "예수쟁이"라는 소리와 "한물가서 기독교방송에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요청을 받은 기간까지 대답을 못했다. 그때는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자로도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음악프로그램은 출연료도 2배였으며 일도 더 즐거웠다. 그런데 그때 "이제 나와 함께 일해야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내가 달라졌다. 촬영하러 나간 고아원에서의 작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부모사랑을 못 받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원장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바빠서 못 가다가 다른 촬영장으로 가다 그 고아원을 보고 시간을 내어 다시 방문했다. 방문하여 눈에 띄는 깔끔한 아이를 먼저 안았다. 이제는 코 흘리는 아이를 자연스럽게 먼저 안아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해외 현장을 많이 찾아 다녔다. 연변의 한 교회에 5명의 탈북자가 찾아 왔다. 그중 한명은 임신 9개월이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하다가 배에 손을 대게 되었는데 (정애리 권사 울기 시작 함) 너무 못 먹고 힘들어 딱딱하게 굳어있는 배를 느끼고 울었다. 그들은 환경과 지위가 아닌 단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용한 양식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연변교회는 탈북자를 위해 항상 밥을 해 놓고 준비한다. 나는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환경과 시간으로 봉사한 것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표현이 안되면 사랑이 아니다. 희생과 수고 없는 사랑은 없다. 나는 사랑의 현장이 기쁘다. 300여명에게 노련한 실력으로 밥을 퍼주기도 했다. 내가 봉사하는 기관이 방송에 나간 다음 많은 분들이 물질과 봉사로 참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잘 알려진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만나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껴안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내 코를 막아 주셨다.
주님을 만나 복을 받았다. 돈과 환경이 아니라 복을 헤아릴 줄 아는 복을 받게 되었다. 내가 예쁘지 않은가? 공주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이다. 10년 뒤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이사를 준비하다가 중요한 아주 중요한 이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이사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를 잘하려면 내가 있는 현장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막내오빠가 방광암에 걸렸다. 그것을 계기로 가족들이 주님에게 온전히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 이사가는 땅에서 다 만나시기를 바란다. 사랑합니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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