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인간의 박수갈채와 주님의 심판” > 아멘넷 뉴스

본문 바로가기


뉴스

이재철 목사 “인간의 박수갈채와 주님의 심판”

페이지 정보

성회ㆍ 2014-11-23

본문

지난 10월에 열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는 이영훈 목사의 뉴욕집회에서 학력과 경력등 아주 길게 소개를 받은 후에 회중들의 큰 박수가운데 등장한 이영훈 목사는 "우리 삶에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 많은 소개를 해 주었는데 다 잊어버리시고 예수님 한 분만 기억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긴 설교보다 더 큰 메세지를 준 발언이었다.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는 한국교계에서 이영훈 목사 못지않게 영향력있는 목사이다. 11월 21일(금) 저녁에 열린 팰리세이드교회 성회에서 이재철 목사 또한 긴 소개와 박수갈채 속에 강단에 섰다. 과연 이재철 목사가 무엇이라고 응답했을까? 이 목사는 진지하게 인간의 박수갈채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인간의 박수갈채가 사도행전 11:19-26을 본문으로 '주님의 심판'이라는 제목의 설교의 내용전개와 일치하기 때문에 더욱 길게 이를 언급했다. 격려와 환영이라는 치장이 붙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장 세속적인 인간의 박수갈채와 같은 것이 교계와 교회 내에 얼마나 많은가? 다음은 설교내용이다.

2.jpg
▲설교하는 이재철 목사

인간의 박수갈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갈구한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 살아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와 정반대의 사람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6:1-2절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나팔을 부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은 이미 세상의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상을 의식하면서 산 적이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상을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기위해 나팔을 불고 살고 있는가?

박수갈채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높임받고 존경받고 대접받고 싶은 마음의 총칭이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천국에 가 보니 집사들은 셀프 서비스로 먹는다. 직분없는 사람들은 장로들의 서빙을 받는다. 그런데 목사가 안보여서 물어보니 배달나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는 세상에서 이미 박수갈채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이미 상을 받았다. 직분없는 사람들은 빛도 이름도 없이 헌신하고 봉사했으니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많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뿌린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인가? 세상의 박수갈채를 목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상을 받기위해 자기가 무엇을 행하든 자기의 직분의 무엇이든지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가려가는 사람,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이다.

안디옥교회를 세운 몇 사람 이야기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은 정말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받고 높임을 받았음을 분명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안디옥교회가 세워지는 내용이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지역에 세워진 이방인을 위한 첫교회였으며, 위대한 사도바울을 배출한 교회였으며, 교인들이 세상 사람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아주 의미있는 교회이다. 그렇게 중요한 안디옥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이었으며, 얼마나 세상 사람들로 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을까 하는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본문 20-21절을 보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나온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 중에서 구브로(지중해 사이프러스)와 구레네(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의 몇 사람이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이방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 덕분에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방 땅에서 처음으로 이방인교회가 세워졌다. 본문에는 안디옥교회를 세운 자들의 이름이 없고 단지 ‘몇 사람’이라고 나온다. 헬라어 원문에는 '피네스 안드레스'라고 ‘몇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나이도 직업도 경력도 숫자도 모른다. 안다면 그들이 아프리카 리비아와 지중해 사이프러스에서 살다가 이민왔다는 것 밖에 모른다.

그런데 왜 모르겠는가? 사도행전은 의사 누가가 기록했다. 누가는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을 만나 주님을 영접한 뒤에 바울이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할 때 까지 바울의 수족을 들었던 사람이다. 바울은 바나바와 동역한 안디옥교회의 창립 초기의 목사였다. 그래서 바울은 안디옥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다 알 것이다. 누가도 바울로부터 들어서 다 알고 있었다. 누가가 성경을 기록할 때 의사이기에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하는데 그 유명하고 중요한 안디옥교회를 창립한 사람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익명으로 처리했다. 그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가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마음을 높이 산 바울이 그 사실을 누가에게 알려주었고,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하나님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위해서 그들을 '어떤 사람들'이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역사가 100년이 넘은 교회를 갔는데 담임목사가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우리 교회 창립멤버인 아무개의 4대 손이라고 소개했다. 100년이 지났는데 창립자의 4대손까지 영광을 받는다. 그분들에 비하면 본문의 몇 사람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정말 복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이분들의 상급이 클 것인가? 얼마나 큰 자로 높임을 받을 것인가?

분문이 주는 3가지 교훈

인간의 외적 발육을 성장이라고 한다. 반면 인간의 내적인 발육은 성숙이라고 한다. 외적 발육인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20대까지 육체가 성장하다가 30대에 접어들어 정체상황을 이루다가 이후로는 점점 쇠퇴한다. 그런데 내적 발육인 성숙에는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끝이 없다. 성숙을 추구하는 사람은 계속 성숙해지다가 원숙의 경지까지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다. 우리의 목적은 겉사람의 자람이 아니라 속사람의 자람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날이 갈수록 성숙해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날마다 참되고 신실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날마다 참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3가지 교훈이 있다.

1.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람들은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라 최선의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무식한 갈릴리 어부였다.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안디옥교회를 세우고 자기의 이름을 가려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그 어떤 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만약에 2천여 년 전 로마제국에서 최고의 사람들이었다면 안디옥으로 안가고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대단하게 평가하지만 2천여 년 전 세계를 장악한 로마제국의 시각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은 무명의 존재이다. 최고의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단지 무식한 베드로에 비교하여 석학이라고 불릴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지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 무식한 갈릴리 어부이자 변방의 베드로, 그리고 이주를 거듭한 겸손한 몇몇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최고가 아니었던 사도 바울이 최선을 다할 때 그들을 세계역사를 변화시키는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최고가 되려는 것에서 파생된다. 최고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지성인들도 쉽게 불의와 타협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최고가 되려고 하기에 삶의 현장에서 신앙양심을 거리낌 없이 져버린다. 최고를 지향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또는 권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본문의 베드로나 사도 바울처럼 절대로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지 못한다. 최고를 추구한다는 것이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에게 우리의 한계에 대해 최선을 다할 때 나는 보잘 것 없지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시대를 세우게 하신다.

2. 우리가 주님 앞에서 최고의 사람이 아니라 최선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이든지 인간의 박수갈채가 아니라 저 위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받는 하나님의 상을 목표로 하고 소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최고를 지향한다는 것은 다 박수갈채를 지향하는 것이다. 박수갈채가 무엇인가? 한순간 공기의 진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처럼 허무한 것이 없다. 인기 연예인들이 다는 아니지만 왜 약물에 많이 빠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공기의 진동인 박수갈채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박수갈채를 향하여 뛰어가고 박수갈채는 받지만 집에 돌아오면 허전한 것이다. 허무한 것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 공허함을 엉뚱한 것으로 채우려 하기에 쉽게 약물에 빠져드는 것이다. 인간의 박수갈채를 푯대로 삼지 않는다는 뜻은 인간의 모함도 핍박도 굴하지 않고 이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의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의 시대가 지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분들은 단 한 번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삶의 현장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다. 이 세상은 여전히 죄성으로 가득차 있다. 내가 내 삶의 현장에서 신앙양심을 따라 살려고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돌을 던진다. 목사가 주님을 쫓아서 살려고 하면 목사들이 돌을 던진다. 교회가 주님의 뜻을 좇아 살려고 하면 이웃교회가 돌을 던진다. 핍박의 시대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2천 년 전 성경은 다 쓰였지만, 성경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 성경집필은 끝났지만 성경 속에 있는 내용은 오늘날 이시대의 역사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고 주님오실 날 까지 그대로 되풀이 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넒은 문을 향하여 걸어 갈 것이고 좁은 문을 향해서 걷는 사람들은 주위로 부터 핍박받고 모함받을 수 있지만 주님은 좁은 문을 향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들을 통해서 시대를 바꾸신다. 그 속에서 박수갈채에 현혹되지 않고 사람들의 모함에 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의 길 밖에 없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여러분들의 이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말씀대로 신앙을 지키며 절대 살 수 없다. 바울이 자기 목까지 내어 놓은 것은 세상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박수갈채에 현혹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핍박에 굴한 것이 아니라 상주시는 주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상주심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심판을 믿는다는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심판이라는 단어가 실종됐다.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 2년 동안 갇혀 있을 때 총독이 바울의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총독이 바울을 불러 전하고자 하는 예수믿는 도가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사도행전 24:25에 의하면 바울이 3가지 단어로 대답했다. 기독교의 핵심인 의, 절제, 심판이다. 66권 성경을 세단어로 압축하면 이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관계를 맺으면 그 분의 의에 힘입어 의로운 삶을 살게 된다. '절제'라는 말은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우리말로 절제는 좀 줄여서 하는 것이다. 돈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 돈 쓰는 것을 절제하라고 하면 돈을 아예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절약해서 살라는 뜻이다. 그런데 헬라어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엥크라테이아'는 절약을 의미하는 절제가 아니라 제쳐 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예 제쳐 버리는 것이다. 칼로 무우를 자르듯이 짤라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이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을 의미한다.

마지막은 심판이다. 주일예배 때 마다 사도신경으로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사도신경 내용 중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내용이 있다. 사도신경으로 고백할 때마다 심판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정말 심판을 믿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질문했을 때 선뜻 대답을 못한다. 기독교의 요체가 3가지라고 설명한다면 다 동의하고 다 이해할 것이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요체가 세 단어라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지만 왜 이것이 삶속에 적용되지 않는가? 이유는 기독교의 요체는 의, 절제, 심판이지만 신앙의 전개과정, 바꾸어서 말하면 신앙의 진전은 역순으로 이루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판을 믿는 사람만 자기 삶속에서 잘라낼 것을 잘라낼 수 있다. 그런 사람만 결과적으로 주님과 바른 관계를 평생 맺게 된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시험이 있다고 공지하면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공부하지 않는 학생도 있다. 아무리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도 시험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관심없는 학생들은 공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이 자기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학생들은 놀고 싶은 것을 잘라 내버리고 공부를 한다. 그 결과로 좋은 성적을 얻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내 마음속에 새기고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마다 주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는 것 같이 내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내가 마음속에 새기고 믿지 않는다면 내 삶에서 절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평생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지만, 주님 앞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듯이 하나님의 상주심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라는 달란트, 시간이라는 달란트, 능력이라는 달란트, 물질이라는 달란트, 가족이라는 달란트, 직위라는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반드시 하나님은 셈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셈하심에 의해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나와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믿음속에서 이루어진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내 믿음이 깊을수록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무소부재는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 현장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다면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의 지갑을 두껍게 하기위해 신앙양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불의와 거짓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 예배당 안에만 계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게 할 수 없다.

히브리서 11:6을 다시 보면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심판은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어야 한다. 천국은 평등한 곳이 아니라 큰 자와 작은 자가 있고, 큰 상을 받는 자와 작은 상을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믿을 때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세상의 박수갈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기를 가리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겸손하게 드러내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나우루라는 작은 섬으로 된 국가가 있다. 그 섬이 얼마나 작은가 하면 21평방키로 미터로 울릉도의 3분의 1이고 인구는 1만 명이다. 산호초에 둘러싸여있는 섬인데 오랫동안 새들의 천국이었다. 새가 똥을 싸면 산호층들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인광석으로 변했다. 인광석은 화학비료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이다. 나우루 섬은 식민 국가들이 통치를 하다가 1968년 정식국가로 독립했다. 동시에 인광석 광산이 국가소유로 되었다. 전통적으로 농부와 어부, 외국 자본들의 인부로 살던 사람에게 돈벼락을 맞았다. 1980년대에 국민소득이 2만 불이나 되었다. 무료로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으며, 나우루 사람들은 전세기를 타고 주변 국가들을 쇼핑하고 스포츠를 관람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광석이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며, 국민들이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해 많은 국민들이 비만등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나우루는 2003년 인광석이 바닥났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2005년에 국가파산을 했다. 돈 잔치를 시작한지 30년 만에 망한 것이다.

나우루 섬과 인광석 이야기를 축소하면 우리 개인의 인생과 똑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명이라는 인광석이 무궁무진하리라 착각한다.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기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착각한다. 나이가 들어 이제 죽어야지 하는 사람일수록 죽음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면 화를 낸다. 전혀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의 박수갈채를 위해 욕망을 위해서 천하보다 더 귀한 자기생명을 자꾸 깎아 먹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코끝에 호흡이 멈추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내 생명은 나오루 섬의 인광석처럼 언젠가는 고갈된다. 하지만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야 할 길은 최선을 다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바울, 베드로, 본문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가리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되었지만, 바울과 베드로는 거꾸로 자기 이름을 내 걸고 사는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든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라는 이름을 기치를 내걸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 부터 받는 박수갈채에 현혹되거나 그 맛이 들여 그 박수갈채를 푯대로 삼지 않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죽였다. 그 결과 이름을 내걸고 살면서도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다. 그래서 그들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경의 위대한 사도로 살아있다. 본문의 안디옥교회를 세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면 이 위대한 자기를 가린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쓰기 위해서는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아멘넷 뉴스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 시각게시물 관리광고안내
후원안내
ⓒ 아멘넷(USAamen.net)
카톡 아이디 : usaamen
(917) 684-0562 / USAamen@gmail.com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