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섭 목사 "가짜에서 교회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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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07-07-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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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경 한 연기자의 앨범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바로 신신애씨의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가 들어있는 앨범이다. 얼마 전 한국의 주요일간지 중앙일보의 이지은 기자는 신신애씨의 노래를 들어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는 가짜 학력사건에 관한 글을 썼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라는 노랫말이 정말로 꼭 들어맞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라며 요즘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가짜와 관련된 사건들을 대중가요를 들어 풍자했다.
한국에서 유행하던 말 중에 ‘짜가’라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가짜를 거꾸로 부르는데서 온듯하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짝퉁’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품이 아닌 모조품을 일컫는 말로 많이 사용되어진다. 이렇게 가짜라는 말이 언어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발달되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가짜로 즉 정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만연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눈을 많이 보는 에스키모가 눈을 서술하는 말이 40여 가지가 넘는 것처럼 가짜를 많이 보는 사회에서는 가짜를 일컫는 말이 발달한다는 이론이다.
얼마 전 북한은 전문가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위조지폐로 미국과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끌었었다. 한국인은 가짜를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듯하다. 그런데 가짜를 만드는 것이 물건에 머물지 않고 학력과 인격과 사람자체에도 가능하다는 것이 더욱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 유행하는 성형수술도 이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짝퉁’이라는 말은 진짜가 아닌 진짜 같은 가짜라는 것이다. 때로는 진짜보다 이 ‘짝퉁’이라는 것이 진짜보다 훨씬 더 좋게 만드는 게 한국의 ‘짝퉁’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진품보다 더 좋은 모조품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국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동국대 신정아사건’ 그리고 그 뒤를 이은 ‘KBS 굿모닝 팝스 영어강사 이지영사건’ 학력지상주의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상당부분 그들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았다는 그 사실에 더 많은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들 이전에 우리 이민사회에서 발생한 ‘스텐포드대학 가짜 대학생 김모양사건’으로 우리는 한국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학력우월주의라는 고질병에 빠져있는 안타까운 우리의 자화상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뿌리는 체면을 중시하고 겉모양이나 이름을 중요시하는 허례허식의 한국적인 그리고 고질적인 병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인 2세들을 교육하는데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비리그나 명문대에 우리의 자녀를 넣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안에서 성공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에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사회의 부패에 대해 정화작용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 안은 이러한 병적인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느 특정지역에 고학력자가 많은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교육의 기회가 없으셨던 분들도 제법 많이 그 한인교회에 나오고 계셨다. 그런데 몇 몇 몰지각한 성도(?)들이 서로를 ‘이박사’ ‘김박사’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부르는 것이었다. 다른 성도들보기에 얼마나 민망하던지 교회에서 아무개 집사님 아무개 성도님 하지 않고 세상의 학력을 교회 안에서도 자랑하려는 복음도 교회의 참된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습이다.
얼마 전 어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있지도 않은 지휘자의 학위를 본인 스스로 위조(?)해서 성도들 앞에서 지휘자를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은 이것이 문제가 돼서 교회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가대 지휘자가 박사여야지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교회를 이끄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발상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것도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담임목사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찬양인도자를 청빙할 때도 지휘자를 청빙할 때도 그들의 영성을 보며 그들이 성령 안에서 변화된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며 하나님께서 찬양인도자로 성가대지휘자로 찬양 팀과 성가대를 이끌 수 있는 리더십과 사역에 대한 사명과 소명이 있는지 기도하며 영적으로 확인하기보다는 학벌을 들먹이며 노래를 잘하는지 기술적 지휘를 잘하는지 그리고 경력사항만 보는 무지한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지금 수두룩하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많은 음악 하는 사람들이 돈벌이로 교회에 가서 지휘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는 보다 낳은 돈벌이를 위해서 이리저리로 마구 옮겨 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교회와 목회자들이 음악 하는 사람들을 다 망쳐 놓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신실한 지휘자들도 찬양인도자들도 그 중에는 있을 것이다. 지휘자나 반주자나 찬양인도자나 성가대의 솔리스트나 연주자나 모두 그들이 자신의 생업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풀타임으로 일한다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에 사례비를 받지 말고 순수하게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며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어느 한 분이 주장한 적이 있다. 일리가 있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담임목회자를 청빙하는 조건 들이 대학은 일반 명문대학교를 나오고 대학원은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그리고 미국에서 신학 석 박사학위 하나정도 있어야 그래도 번듯한 교회에 서류라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태평양신학교’ 신학박사라는 것이 있었다. 미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태평양신학교’는 태평양을 비행기로 건너서 한국으로 갈 때 갑자기 신학박사로 둔갑하는 것이고 미국에서 인가도 없는 학교에서 학위를 돈 주고 사며 미국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학위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요즘 현실인 것이다. 요즘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 가를 칠 것도 아니면서 박사학위를 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다 앞에서 말한 조건들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목회학 박사라도 따서 이력서에 명함에 박사라는 말 하나라도 넣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목회학 박사는 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그 어려운 철학박사(Ph.D)가 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뭔가 번듯하고 껍데기가 빤짝 빤짝한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명품선호도 세계1위라고 한다. 성도들도 목사님을 자랑할 때 우리 목사님이 박사라는 것을 상당히 강조한다. 다 지적허영심에 빠지고 자기 안에 영적인 공허함과 허전함을 채워줄 대리만족을 찾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목사들도 목회자 가운을 입지 않고 박사학위가운을 설교할 때 입는 것을 종종 본다. 서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사라는 호칭으로 서로 부르기 보다는 ‘이 박사’ ‘김 박사’하고 부른다. 이러한 모습들은 초대교회와 정반대의 모습들이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몇 가지 초대교회의 예를 살펴보면 사도 베드로는 천한신분인 어부였다. 아무런 학문적인 배경도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을 때 세상의 어떤 지혜와 지식 있는 사람들보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사도행전 4장8절로 보면 당시에 지식 있고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과 대제사장 문중들 앞에서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반응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스데반도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 그가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8) 요즘 세상에 바울이 있었다면 그는 학위도 몇 개를 가진 박사중의 박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길뿐더러 더나가서 배설물로 여긴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가 학문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훌륭했지만 그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 충만하심에 온전히 의지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리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 안에도 가짜가 많이 있다. 학력을 속이는 가짜도 있고 경력을 속이는 가짜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가짜는 쉽게 검증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짜는 동정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정 받지 못하는 ‘짜가’ ‘짝퉁’인 가짜가 교회 안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가짜 성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성령의 체험도 없는 성도들이 집사가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심지어는 목사까지 된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를 이끈다. 그곳은 가짜교회 짝퉁교회 짜가 교회인 것이다.
주님께서 그날에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알곡과 쭉정이를 타작마당에서 구분하여 알곡은 곳간 안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말씀하셨다.(눅3:17)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에서도 나와 있듯이 심판 날에 가라지는 먼저 모아 불에 태우게 모으고 곡식은 곳간 안에 들인다고 하셨다.(마13:30) 우리는 이제 가짜(짜가, 짝퉁, 쭉정이, 가라지)에서 나와 진짜(진품, 명품, 알곡, 곡식)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도 가짜의 허상으로 그들을 교육하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알곡과 곡식으로 그들을 교육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초대교회와 같은 진짜 성도 진짜 사도 진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호섭 목사(프라미스장로교회)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한국에서 유행하던 말 중에 ‘짜가’라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가짜를 거꾸로 부르는데서 온듯하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짝퉁’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품이 아닌 모조품을 일컫는 말로 많이 사용되어진다. 이렇게 가짜라는 말이 언어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발달되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가짜로 즉 정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만연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눈을 많이 보는 에스키모가 눈을 서술하는 말이 40여 가지가 넘는 것처럼 가짜를 많이 보는 사회에서는 가짜를 일컫는 말이 발달한다는 이론이다.
얼마 전 북한은 전문가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위조지폐로 미국과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끌었었다. 한국인은 가짜를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듯하다. 그런데 가짜를 만드는 것이 물건에 머물지 않고 학력과 인격과 사람자체에도 가능하다는 것이 더욱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 유행하는 성형수술도 이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짝퉁’이라는 말은 진짜가 아닌 진짜 같은 가짜라는 것이다. 때로는 진짜보다 이 ‘짝퉁’이라는 것이 진짜보다 훨씬 더 좋게 만드는 게 한국의 ‘짝퉁’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진품보다 더 좋은 모조품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국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동국대 신정아사건’ 그리고 그 뒤를 이은 ‘KBS 굿모닝 팝스 영어강사 이지영사건’ 학력지상주의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상당부분 그들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았다는 그 사실에 더 많은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들 이전에 우리 이민사회에서 발생한 ‘스텐포드대학 가짜 대학생 김모양사건’으로 우리는 한국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학력우월주의라는 고질병에 빠져있는 안타까운 우리의 자화상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뿌리는 체면을 중시하고 겉모양이나 이름을 중요시하는 허례허식의 한국적인 그리고 고질적인 병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인 2세들을 교육하는데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비리그나 명문대에 우리의 자녀를 넣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안에서 성공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에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사회의 부패에 대해 정화작용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 안은 이러한 병적인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느 특정지역에 고학력자가 많은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교육의 기회가 없으셨던 분들도 제법 많이 그 한인교회에 나오고 계셨다. 그런데 몇 몇 몰지각한 성도(?)들이 서로를 ‘이박사’ ‘김박사’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부르는 것이었다. 다른 성도들보기에 얼마나 민망하던지 교회에서 아무개 집사님 아무개 성도님 하지 않고 세상의 학력을 교회 안에서도 자랑하려는 복음도 교회의 참된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습이다.
얼마 전 어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있지도 않은 지휘자의 학위를 본인 스스로 위조(?)해서 성도들 앞에서 지휘자를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은 이것이 문제가 돼서 교회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가대 지휘자가 박사여야지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교회를 이끄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발상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것도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담임목사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찬양인도자를 청빙할 때도 지휘자를 청빙할 때도 그들의 영성을 보며 그들이 성령 안에서 변화된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며 하나님께서 찬양인도자로 성가대지휘자로 찬양 팀과 성가대를 이끌 수 있는 리더십과 사역에 대한 사명과 소명이 있는지 기도하며 영적으로 확인하기보다는 학벌을 들먹이며 노래를 잘하는지 기술적 지휘를 잘하는지 그리고 경력사항만 보는 무지한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지금 수두룩하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많은 음악 하는 사람들이 돈벌이로 교회에 가서 지휘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는 보다 낳은 돈벌이를 위해서 이리저리로 마구 옮겨 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교회와 목회자들이 음악 하는 사람들을 다 망쳐 놓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신실한 지휘자들도 찬양인도자들도 그 중에는 있을 것이다. 지휘자나 반주자나 찬양인도자나 성가대의 솔리스트나 연주자나 모두 그들이 자신의 생업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풀타임으로 일한다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에 사례비를 받지 말고 순수하게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며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어느 한 분이 주장한 적이 있다. 일리가 있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담임목회자를 청빙하는 조건 들이 대학은 일반 명문대학교를 나오고 대학원은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그리고 미국에서 신학 석 박사학위 하나정도 있어야 그래도 번듯한 교회에 서류라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태평양신학교’ 신학박사라는 것이 있었다. 미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태평양신학교’는 태평양을 비행기로 건너서 한국으로 갈 때 갑자기 신학박사로 둔갑하는 것이고 미국에서 인가도 없는 학교에서 학위를 돈 주고 사며 미국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학위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요즘 현실인 것이다. 요즘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 가를 칠 것도 아니면서 박사학위를 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다 앞에서 말한 조건들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목회학 박사라도 따서 이력서에 명함에 박사라는 말 하나라도 넣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목회학 박사는 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그 어려운 철학박사(Ph.D)가 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뭔가 번듯하고 껍데기가 빤짝 빤짝한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명품선호도 세계1위라고 한다. 성도들도 목사님을 자랑할 때 우리 목사님이 박사라는 것을 상당히 강조한다. 다 지적허영심에 빠지고 자기 안에 영적인 공허함과 허전함을 채워줄 대리만족을 찾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목사들도 목회자 가운을 입지 않고 박사학위가운을 설교할 때 입는 것을 종종 본다. 서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사라는 호칭으로 서로 부르기 보다는 ‘이 박사’ ‘김 박사’하고 부른다. 이러한 모습들은 초대교회와 정반대의 모습들이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몇 가지 초대교회의 예를 살펴보면 사도 베드로는 천한신분인 어부였다. 아무런 학문적인 배경도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을 때 세상의 어떤 지혜와 지식 있는 사람들보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사도행전 4장8절로 보면 당시에 지식 있고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과 대제사장 문중들 앞에서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반응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스데반도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 그가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8) 요즘 세상에 바울이 있었다면 그는 학위도 몇 개를 가진 박사중의 박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길뿐더러 더나가서 배설물로 여긴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가 학문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훌륭했지만 그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 충만하심에 온전히 의지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리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 안에도 가짜가 많이 있다. 학력을 속이는 가짜도 있고 경력을 속이는 가짜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가짜는 쉽게 검증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짜는 동정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정 받지 못하는 ‘짜가’ ‘짝퉁’인 가짜가 교회 안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가짜 성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성령의 체험도 없는 성도들이 집사가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심지어는 목사까지 된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를 이끈다. 그곳은 가짜교회 짝퉁교회 짜가 교회인 것이다.
주님께서 그날에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알곡과 쭉정이를 타작마당에서 구분하여 알곡은 곳간 안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말씀하셨다.(눅3:17)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에서도 나와 있듯이 심판 날에 가라지는 먼저 모아 불에 태우게 모으고 곡식은 곳간 안에 들인다고 하셨다.(마13:30) 우리는 이제 가짜(짜가, 짝퉁, 쭉정이, 가라지)에서 나와 진짜(진품, 명품, 알곡, 곡식)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도 가짜의 허상으로 그들을 교육하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알곡과 곡식으로 그들을 교육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초대교회와 같은 진짜 성도 진짜 사도 진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호섭 목사(프라미스장로교회)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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