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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행 목사 "종교개혁의 배경과 그 역사적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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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한국총회(총회장 이광희 목사)는 9월 11일부터 21일까지 98명이 참가한 가운데 영성수련회를 동유럽에서 열었다. 허연행 목사(안디옥교회, 조지아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영성수련회 첫날 "종교개혁의 배경과 그 역사적 교훈"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편집자)

I. 들어가면서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Remember'이다. 반댓말은 'Dismember(절단, 단절)'이다. 역사의식의 부재가 문제다. 한국인은 냄비근성으로 사건이 일어나면 끓어오르다가 금세 식어버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 같이 무엇을 시작했는데 월등히 앞서가는 사람을 보면 과거의 실패를 분석해서 교훈을 얻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II. 개혁의 발자취를 따라서

1. 종교개혁의 선구자 :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현 체코)의 얀 후스


1517년 독일의 신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다면, 그 일이 있기 약 100년 전에 보헤미야 지방(현 체코 공화국)에서 이미 개혁의 횃불을 용감하게 치켜든 선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얀 후스라는 사람이다.

동 시대 인물인 영국의 위클리프(옥스포드 대 교수)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영국의 리차드 2세가 보헤미아 출신의 앤과 결혼하면서 보헤미아 학생들의 영국 유학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그들은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신자들의 유일한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라는 위클리프의 성경중심적 개혁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유학을 마친 젊은이들이 귀국하면서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을 전해주었는데 당시 프라하대학 총장인 후스가 이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후스의 개혁 사상은 성경 중심적(Biblical)이며 민족주의적(Nationalism)이라는 크게 두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그의 개혁 정신은 당시 로마 카톨릭 주교들의 탐욕과 부패상에 대한 실망과, 당시 보헤미야 지방을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식과 맞물리면서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사상은 대중들로부터는 큰 지지를 받았으나 부패한 교회를 비판한 죄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는 파문과 함께 화형을 당했다.

그가 화형대에서 죽기 전 앞으로 닥쳐올 개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오한 예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지금 거위(‘후스’는 보헤미아어로 거위를 의미)를 굽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100년 안에 구울 수도 없고 그을릴 수도 없는 고귀한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가 노래할 때 사람들은 그에게 귀흫 기울일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살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그의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되어 약 100년 후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설교했던 성당을 바라보며 서 있는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다음과 같이 쓰여 있어서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어려서부터 총명해 29세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세에 총장이 되어 얼마든지 기존 교회와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진리를 위해 ‘산 제물’로 자신을 기꺼이 바쳤다.

2. 루터

1) 루터의 신학적 위치와 중요성

중세 후기(1300~1500) R.C 교회가 영적 혼돈에 빠져있을 때 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성서를 깊이 연구하다가 로마서에서 복음을 재발견(Rediscovery of the Gospel)한 후 자신의 깨달음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교리로 정리하였다. 그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믿음을 ‘전적인 신뢰’로 보는 새로운 이해였다. 그래서 오직 성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을 원리로 하는 개신 교회(Protestant church)가 탄생하였다.

그의 <칭의구원론>은 오직 믿음에 근거하여 순간적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해지는 구원의 교리로서, 구원을 ‘순간적인 신분의 변화’로 본다. 즉 누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일을 신뢰하기만 하면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순간적으로 신분이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의 순간은 곧 중생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직 거룩해지지 않은 채로 갑자기 의인으로 용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린다. 자발적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서 놀라운 영적 자유를 누린다.(그의 글 ‘그리스도인의 자유’ 참조)

그러나 루터 이후 개신교의 <칭의구원론>은 R.C의 <성화구원론>과의 논쟁 속에서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키는 문제로 고민한다. 이 문제는 칼빈에 의해 해결된다. 그는 칭의와 성화는 '이중의 은총'(double grace)으로서, 서로 구분은 할 수 있으나 분리는 할 수 없고, 칭의의 순간에서부터 성화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루터의 <칭의구원론>과 R.C의 <성화구원론>을 종합시킨 것으로서 구원론의 발전에서 찬사를 받을 만한 업적이었다.

칼빈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며 평생 동안 성화되어 갈 수 있을 뿐,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점진적 성화론) 그런데 18세기 감리교 부흥 운동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1703-1791)는 칭의(중생) 이후에 순간적으로 온전한 성화(Christian perfection)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순간적 성화론). 이것은 칼빈의 '점진적 성화론'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개혁 교회 전통과 웨슬레 전통은 계속 이 문제에 대하여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2) 루터 인생의 전환점 : 비텐베르그 대학에서의 ‘탑의 경험’

꿈에도 그리던 로마 여행(1510 말~이듬해 1월)에서 참회자들의 형식적 모습과 수도사들의 무지한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온 루터는 대학에서 곧이어 신학박사 학위를 얻은 후(1511년, 28세)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에서 정식으로 성서와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로마서와 시편)했다. 그는 이 대학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어거스틴 수도원의 작은 다락방에서 숙식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서의 의미를 탐구했다. 그의 평생의 숙제인 구원에 관한 물음과 씨름하던 중 어느 날 소위 탑의 경험(Turmerlebnis)이 이루어진 바 이는 성령의 조명을 힘입어 성서에서 복음을 재발견함을 의미한다. 이 복음 신앙이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을 형성하였고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했다.

3) 루터의 중심 사상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전적 부패 특히 의지의 부자유를 말한다. 즉 인간의 어떤 한정된 부분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인격이 자기 중심적으로 정위(Self-oriented)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악이란 하나님 존전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 자체가 자기중심적으로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능력이 그 안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모든 성취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탑의 경험’을 통해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계시되었다’는 구절에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는데(복음의 재발견),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죄인이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는 의가 아니라 JX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얻어진 수동적 의(Passive 혹은 Alien righteousness)이다. 즉 심판하시는 의가 아니라 구원하시는 의(Saving r.)다. 이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선의(Good will)요 호의(Favor of God)다.

이 새롭게 이해된 하나님의 의는 결국 죄인에게 은혜(Gratia)로서 나타나며 이 은혜는 오직 믿음(Faith)을 통해 죄인에게 매개된다(믿음은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 죄인이 내미는 마음의 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소지가 우리 밖에(extra nos)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죄인된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된다. 즉 우리는 전혀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다(義認).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e)의 경우는 그리스도를 의의 출처로 하여 이미 의롭게 된(義認이 아닌 질적으로 의롭게 된 義化) 인간 본성을 의미하며, 계속 의로운 열매를 맺는 것 역시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중세 R.C 교회의 구원론적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기독교인의 윤리(die Gabe & die Aufgabe)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 교리, 곧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die Gabe=the gift)인데, 기독교인의 모든 윤리는 이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인의 과제(die Aufgabe=the task)라고 부른다. 이 Gabe와 Aufgabe는 직설법(Indicative)과 명령법(Imperative)라는 문법 용어로도 설명된다(R. Bultmann). 다시 말하면 선교의 명령을 포함한 신,구약 성서에 나타난 모든 명령들(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이 전제되는 명령들이다. 개신교의 윤리는 이처럼 구원론을 전제로 한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을 읽어보라.

4) 루터의 동역자들

첫째, 아내이다. 루터가 42세때 아내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낙심에 빠진 루터를 “하나님이 죽으셨습니다”라고 하여 일깨운 유명한 일화가 있다. 둘째, 루터의 정신적 친구 멜랑히톤은 1518년 루터가 봉직하던 비텐베르그 대학에 희랍어 교수로 부임하면서 루터의 친구와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신학강요(神學綱要"(1521)를 펴내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조직신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 후 신학/철학 교수를 하며 1530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신앙고백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썼다. 성서의 독일어 번역에도 협력하였으나, 온화한 성품의 학자여서 종교개혁운동에 표면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5) 소환장을 받은 루터

루터는 1521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보름스(Worms) 제국회의장에 나오라는 소환장을 받게 된다. 그 정도로 당시 상황이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곳에 갔다가 잘못되면 체코의 얀 후스(1372~1415) 처럼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길을 나섰다. “얀 후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지붕의 기와 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거기서 나를 기다린다 해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소.”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성교회에 붙인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는 700여 ㎞. 한 달은 걸어야 할 거리다. 제국회의장에 선 것은 1521년 4월18일이었다. 그곳에 선 루터는 독일의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 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III. 결론과 도전 : 운동(Movement) vs 제도(Institution)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 1894~1962)는 <도덕적인 인간 비도덕적인 사회>의 저자로 유명한 리처드 니버의 한 살 아래 동생으로, 그의 책 에서 다음과 같은 역사관을 피력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느 곳,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제도’로서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싸늘한 ‘조직’(Organization)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불러내신 사람들의 살아있는 ‘몸 곧 생명체’(Organ)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또는 기독교 신앙은 본질상 '명사(Noun)'이 아니라 '동사(Verb)'이다.

그런데 본래 운동(Movement)으로서의 기독교는 세속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점차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의 길을 걷게 된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가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313)과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395) 이후 급속히 조직화, 제도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 제도권 안에서 다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가 본연의 운동성을 회복해 나가게 되는 패턴이 존재함을 그는 간파하였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운동) →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과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 이후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됨 → 광야 교부 & 수도원 운동 → 중세 암흑기의 교회(State church로 다시 제도화) → 종교개혁(운동) → 교단(Denominations) 분립(제도화) → Evangelical Revivals(미국의 대각성운동, 영국의 웨일스 부흥운동, 미국의 오순절 운동 등) → Postmodern(또는 Post-Christian) 시대의 종교 다원주의 등으로 인한 영적 침체(제도화) → 이제 어떤 운동이 나타날 차례인가?

니이버는 “교단 혹은 국교의 형태 등에서 볼수 있는 기독교의 제도화 현상은 어디까지나 A라는 운동에서 B라는 운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간이역과도 같다”는 낙관주의적 견해를 피력한다. 교회가 제도화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 속에서 다수 또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시대 시대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운동이 출현한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것과, 굳어져가는 제도권 교회 속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시대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실 것인지 기대가 된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적으로 번져가는 ‘4/14W 어린이 교육선교 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 하나님의 성회가 이 운동을 총회 차원에서 새로운 선교 정책으로 수용하려는 적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약 100년전에 시작된 근대 오순절 운동의 첫번째 주자인 오순절 교단이 오늘날 그 횃불을 다른 교단에게 ‘나누어준 것이냐 뺏긴 것이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 원조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제 곧 일으키실 새로운 운동의 주역으로 쓰임받기 위해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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