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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 목사] 목회자 위상 회복을 위한 칼럼 (2) 은혜를 아는 자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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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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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민을 오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직장 생활은 호텔에서였다. 새로 지은 호텔은 수십 명의 사원들을 공개 채용했고, 일주일간 합숙훈련을 하면서 호텔인에 대한 정신교육을 철저히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기억에 남는 말이 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a285708ad397600109ad3a94725db0d5_1704212045_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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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건물이나 부대시설, 각종 서비스는 호텔의 등급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호텔 사업의 성공 여부는 직원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여행 잡지에서 조사한 내용인데 ‘다시 가보고 싶은 호텔은 왜 인가?’ 라는 질문에 건물도 아니고 시설도 위치도 서비스도 아니었다. 바로 직원들의 진심어린 서비스와 태도라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텔의 성공여부는 건물이나 호화로운 부대시설이 아니라 바로 직원들의 태도에서 결정난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호텔만이 아니다 모든 사회 영역에서 태도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특히 목사의 태도가 목사의 위상을 깎아내리기도 하고 높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수없이 경험했다.

 

오래전 모 식당 직원에게서 들은 말이다. “목사님들은 제일 피곤해요, 뭐 하나하나 너무 따지는 게 많아요.” 나는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목사님들은 자주 식당에 드나들다 보니 직원들 얼굴도 알고 또 사장도 안다고 그냥 허물없이 식당 잘되라고 충고해 주는 말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듣는 직원 입장에서는 목사님들이 왜 이렇게 까다롭냐고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은행에 자주 드나드는 목사님들이 많다. 오래 거래를 하다 보니 알고 지내는 직원들도 있다. 그래서 허물없이 다가가 한마디 했다. “어제 잠을 못 주무신 모양이야 얼굴이...” 그러나 받아들이는 직원은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말하는 태도가 친근해서가 아니라 성적인 조롱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 하는 말이 어떤 태도로 말을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전혀 반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들이 뭐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다거나 거액을 횡령했다거나 성폭력을 했다고 해서 목사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태도에서 목사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소한 언행을 목사님들은 당연히 말할 걸 말했고 지적할 것을 지적해 주었다는 것이다. 맞다. 틀림없이 바른 지적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바른 지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님께서는 이 정도는 이해해 주고 덮어 줄 수준의 지도자들인데 어째서 세상 사람들도 덮어주고 넘어가는데 유독 목사님들은 어느 것 하나도 용서가 없이 지적하고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이것이다. 자신이 하는 태도가 지극히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딸과 함께 커피점에 가서 커피를 박스로 주문했다. 컵을 세어보니 두 개 정도가 더 필요했다, “여기 컵 2개 더 요” 물론 영어로 말했다. 2개의 컵을 받고 밖으로 나오는데 딸이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빠 왜 그렇게 무례하게 말을 해” 난 정당하게 평소하던 말로 주문했는데 뭐가 무례하다는 것인지 의아해 했다. 

 

딸은 “아빠는 그분들에게 명령한 거야, 좀 부드럽게 말해야지...”라고 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내 스타일대로 평소 습관적으로 했던 언어로 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례하게 들은 직원은 나를 향해 어떻게 평가했을까. 만일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보나마나 ‘저게 목사야, 수준이하로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목사들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런 아주 사소한 태도를 보고 성도들이 목사들을 평가하고 아주 소소한 행동에 성도들은 목사를 저질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2년 전에 교협총회에 평신도 대표인 집사를 모시고 갔다. 이런 모임은 처음이란다. 그래서 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목사님들의 행동을 보고 시험에 들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그 우려가 현실화되었다. 소리소리 지르는 목사, 마이크를 빼앗고 강제로 끌어내리는 모습, 사회를 보는 회장의 몰상식한 말들을 적나라하게 보고 듣고 있었던 집사가 나에게 “목사님 제가 안 올 때를 왔네요”라고 한마디 하고 나갔다. 얼굴이 화끈했다. 창피해서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목사님들은 정당한 법 집행을 위해 따질 걸 따지고 지적할 걸 지적해 주는 것뿐이지만, 보고 있는 성도 입장에서는 싸움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다.

 

왜 이런 태도가 목사님들에게서 나타날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라는 단어에 나를 걸러내면 할 말도 못한다. 설령 한다 해도 겸손하게 온유하게 가장 낮은 자세로 말을 해야 하건만 은혜라는 단어가 사라진 현장은 말 그대로 세상단체들 보다 못한 현장으로 보여지게 된 것 아닌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설교할 때, 기도할 때는 거룩함이 철철 넘친다.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기도, 찬양을 할 때는 거룩한데 왜 교회 밖으로 나오면 거룩함이 사라질까? 예배 행위에 대한 태도는 거룩한데 인간들을 대하는 태도는 빵점이다. 왜 그럴까? 태도는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태도가 들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올 때 앉았던 의자를 공손히 안으로 들여 놓는 태도, 식사 후에 직원들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태도, 문을 열어주고 닫아 주는 태도, 자신이 먹었던 컵을 자기가 처리하고 나오는 태도, 아주 사소한 태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에 위상이 추락된 것이다.

 

오래전 한국 교보문고 지하 계단에서 여자 한분이 굴러 넘어졌다. 얼굴과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넘어지는 순간 치마를 내리면서 속살을 감추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아니 그렇게 큰 부상을 입는 순간에도 치마를 내릴 정신이 있나, 여자들은 자신이 여자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어딜 가도 단정하게 화장을 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늘 긴장감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다. 

 

바로 목사라는 정체성이 그것이다, 예수님을 품고 사는 목사님들이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품을 그대로 들어낸다. 못된 성격, 거친 말투, 분노하는 모습 등 하나도 정화되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목사라는 직분의 옷을 입고 부끄러움조차 모른 채 속살을 들어낸다. 즉 목사라는 긴장감을 놓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태도가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자신은 정의로운 목사라고 착각하는 목사들로 인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된 모양이다.

  

목사의 위상이 회복되려면 먼저 아주 작은 자를 예수님으로 모시겠다는 태도부터 시작해야 한다. 목사가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목사이기 때문에 저절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남을 배려하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놓치면 그 하나의 잘못된 태도가 뉴욕교계를 다 실족시킨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무례한 자는 자기가 저지른 무례함을 모르는 것이 더 큰 무례함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한준희 목사(뉴욕목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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