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②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 뉴스

본문 바로가기


뉴스

조진모 목사 ②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페이지 정보

성회ㆍ2017-03-31 11:15

본문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장로회신학교와 뉴욕과 뉴저지 교협과 목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동 학술 세미나가 3월 26일(주일) 오후 5시에 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에서 열렸다. 유철운 목사가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과 목회 리더십"에 대하여, 조진모 목사가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에 대하여 강의했다. 

 

조진모 목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필라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29e0b870de1de55181141bc9cc55b535_1490973232_77.jpg
 

조진모 목사는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개혁의 영향력: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 등 3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형태로 강의를 인도했다.

 

다음은 둘째 질문인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에 대한 내용이다. 세 번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1. 이민교회의 현실: 신앙과 삶의 불일치

 

① 이민과 신앙의 기회

 

초기부터 이민 사회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한국에서는 교회와 담을 쌓고 살았던 자들에게 신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처음 교회를 찾는 목적과 이유가 개인에 따라 달랐겠지만, 결국 복음 안에서 거듭나고 신실하고 충성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된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신분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인종 차별 등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신앙에 눈이 뜨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한국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은 고달픈 이민자의 삶을 통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② 종교성과 선택적 기독교 신앙

 

이민자들은 이민교회를 통해 절대자이시며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소개받았다. 신앙심을 키우며 통해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 단지 삶의 여건이 신앙생활에 반영되면서 높아진 종교성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독교를 자신에게 가장 커다란 유익을 주는 종교로 판단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어느 민족보다 종교적이어서인지 아주 쉽게 교회의 분위기에 동화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동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다음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적인 태도를 가진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에 기독교를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별하여 수용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경의 기준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욱 소중히 여긴 것이다. 

 

③ 지식과 행동이 동반되는 신앙의 실종

 

요즈음 이민교회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교회가 이민 사회의 중심에서 주도하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각종 분야의 전문인들이 생겨나서 교회가 이민자들을 위한 생활의 길잡이 노릇을 하지 않게 된 상황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대한 언급도 아니다. 이민 사회를 향한 교회의 근본적인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민교회가 이민 사회에 존재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신앙 공동체’로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지금은 초기 이민자들의 경우처럼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시기가 지났다. 지금은 교회가 그들을 찾아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 사명을 누가 어떻게 맡아야 할까? 모든 성도들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과 자세를 수정할 것을 과감하게 요구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할 일이 있다. 우리가 먼저 묵묵히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다. 행동이 동반되는 복음 증거와 내용이 없는 열정은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  

 

2. 루터의 고민과 해결책: 오직 성경

 

①말씀을 붙잡은 사람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반박문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대성당에 붙였다. 본격적인 종교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당시 루터는 비텐베르크라는 도시에 국한되어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루터를 그토록 유명인사로 만들었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아예 교회의 개혁을 제안하는 루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에 '95개 조항' 자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결국 개혁의 불씨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다 도리어 불똥이 튀어 널리 확산된 것이다. 

 

루터는 '95개의 조항'과 관련하여 몇 번의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기회를 얻었다.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분노에 가득한 로마 가톨릭 교회 관계자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루터라는 존재가 로마 교황청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동시에 유럽 전역에 그의 개혁 사상이 퍼져나가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95개 조항' 자체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는 자신이 깨달은 성경에 대한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비판하였다. 상대의 반응도 더욱 세거 거칠어졌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자신의 입을 막고 심지어 아예 없애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터는 오직 말씀을 붙잡았다. 

 

1517년 5월에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논쟁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이 발명과 인문주의의 발달이 맞물려 도시마다 출판업이 성행하던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호재를 만난 것이다. '95개 조항'이 무려 16만부나 독일어로 번역되고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퍼졌다. 교황 레오 10세는 '95개 조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루터의 스승 스타우피츠를 통하여 교섭이 들어왔다. 결국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어거스틴 수도회 독일 분회에서 그의 자신의 입장을 '28개 조항'에 담아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는 성경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1518년 5월에 아우스부르크(Augusburg)논쟁이 있었다.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좀 더 세밀하게 설명한 '95개 조항에 대한 해설'을 교황에게 보냈다. 결국 사건으로 인하여 루터는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나아가서 로마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으라는 소환장을 받게 되었다. 루터를 두텁게 신임하던 프리드리히(Fredrich) 백작이 이 일을 해결하기위해 나섰다.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열리는 제국회의에서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을 수 있도록 교황청과 타협하였다. 매우 떨리는 자리였으나 용기를 내어 출석하였다. 담대하게 자신이 성경을 통해 깨달은 이신신칭 교리를 주장하였다. 상대가 자신을 체포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보를 전달받고 밤에 말을 타고 비텐베르크로 도망갔다. 

 

1519년 7월에 라이프찌히(Leipzig)논쟁이 있었다. 원래 이 자리는 루터보다 3살 어리지만 그를 가르쳤던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와 요한 에크(Johann Eck)가 대결하는 자리였다. 칼슈타트가 불리해지자 루터가 자원해서 논쟁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루터는 교황의 교회 수위권을 부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임을 천명하였다. 나아가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외에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상대는 루터를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여 중세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얀 후스(Jan Hus)와 연결시켜 이단으로 고발하였다. 얼마 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파문하기로 결정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화의 파문 교서를 불에 던졌다. 이 논쟁 이후로 루터는 교회 개혁의 선구자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1521년 1월에 보름즈(Worms)제국회의가 열렸다. 로마 황제가 루터에게 보름즈 제국회의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으라는 소환장과 함께 안전보장 확인서를 함께 보냈다. 그 장소는 매우 위험한 곳이니 절대로 가지 말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당당하게 황제 앞에 섰다. 논쟁을 예상했지만, 일방적으로 루터에게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루의 시간을 허락받고 기도한 끝에 답을 얻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였다.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저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제가 인용한 성경이 저를 구속할 것입니다. 또 저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저는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서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아멘!" 

 

여러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상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을 할 것인지를 정리하기 위해 말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나아가서 성경에 입각한 중세 교회의 신학적 오류와 자신이 깨달은 이신칭의 교리를 로마 가톨릭 교회 유럽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계속되는 논쟁은 종교 개혁에 큰 유익이 되었다. 비록 루터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성경적 종교 개혁의 불길이 크게 확산 되는 계기가 되었다. 

 

② 말씀에 붙잡힌 사람 

      

프레드리히 백작은 위험에 처한 루터를 보름즈에서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남몰래 안내하였다. 역경을 이겨내며 개혁의 길을 달려온 루터가 안식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가는 이곳에서도 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였다. 수도사들의 독신과 개인 미사를 폐지를 주제로 하는 글과 주석을 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루터는 바루트부르트 성에서 지내는 동안 독일어로 신약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그가 번역을 위해 사용한 성경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원문과 자신이 번역한 라틴어 역문을 대역으로 편집하여 1516년에 출판한 것이었다. 그 당시 교회는 초대교회 교부 제롬이 4세기에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 성경이 1522년 9월에 출판되었다. 루터는 원어의 뜻을 최대한으로 잘 드러내는 단어와 표현을 위해 고심하였다. 동시에 자신이 번역한 책을 읽을 때 쉽게 이해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 결과 주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몇 번에 걸쳐 개정판을 내는 열정을 보였다. 상당히 많은 양의 성경이 인쇄되어 퍼져나갔다. 구약 성경 번역에도 힘을 썼다. 결국 구약과 신약 합본이 1534년에는 출판되었다. 현대 독일어의 문을 연 루터의 성경은 무엇보다 종교개혁의 불을 확장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 다른 중요한 동기가 있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잠시 비텐베르크를 다녀온 후 성도들에게 반드시 성경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잘 진행되던 개혁 운동이 급히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의 동료인 칼슈타트 교수가 과격한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구교의 신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나아가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기 때문에 성경이 반드시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급진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장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바르트부르크 성에 10개월을 지낸 후 비텐베르크 시의 요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8편의 탄원설교를 통해 개혁은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나아가서 성급한 인간적 방법을 포기할 것과 성경에 의한 질서를 유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루터는 토마스 뮌쩌(Thomas M?ntzer)라는 급진적 개혁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중세 신비주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성령의 직접 계시를 통한 내적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그는 성도는 성령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세속 통치권자의 지배를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주로부터 억압당하는 농민들을 부추겨 폭동을 일으켜 강도와 살인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루터는 성경이 없는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거부하였다. 평화를 촉구하는 루터의 권장에도 불구하고 뮌쩌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복음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터는 사회 권위자들과 구교로부터 개혁의 의도에 대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성경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펼쳐나가던 루터에게 뮌쩌의 등장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성경의 보급이 절실함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었다. 성경적 개혁은 상아탑에서 계획되어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개혁의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체계화 된 것이었다.  

 

③ 말씀 중심의 신앙과 삶 

 

루터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 언어와 고전문학에 능통하였다. 그가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을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던 것도 그가 인문주의 교육과 친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비텐베르크 대학 커리큘럼의 핵심에 두었다. 심지어 인문주의에서 강조하는 학문 분야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성경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성경은 성도에게 필수적인 신앙과 삶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 대신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내세웠다. 성도가 성경을 직접 대하고 가까이 할수록 잃었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세 가지 성경 해석의 원리들에 그의 고민이 잘 반영되었다.

 

첫 번 원리는 그리스도이다. 성경을 통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갖는 것을 성도의 신앙과 삶에 중심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원리는 율법과 복음이다. 율법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하며 죄인을 그리스도께 이끈다. 율법은 복음의 온전한 가치와 필요를 드러내 주는 도구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믿는 신앙을 가지면 삶이 변화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원리는 믿음과 행위이다. 죄인은 그 어떤 행위로도 의롭게 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된다.

 

루터는 성령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는 급진적 개혁자들에 맞서서 성경을 강조하였지만, 그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성령의 역사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성령은 소통하시는 분이시다. 바깥으로부터 성도에게 전달된 복음이 내면에 이르도록 하는 장본인이다.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리 말씀을 듣거나 읽어도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가 주도한 성경적 종교개혁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소교리문답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출판하였다.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성경을 통해 '이신칭의'의 진리를 깨달은 후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자신이 성경을 통해 변화를 받은 경험이 성경적 종교개혁을 더욱 힘 있게 주도할 수 있었다. 성경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신앙과 삶이 자연스럽게 변화된다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실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로 삼은 개혁자였다.  

 

3. 정리 

 

루터는 이렇게 오직 성경 교리를 가르쳐서 말씀을 최종 권위로 삼게 했다. 이민교회를 한번 살펴보았다,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질문했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종교성을 가지고 내가 선택한 종교이기에 얼마든지 이것으로 부터 후퇴하고 포기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른 종교로 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깊은 잠재의식 가운데 종교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그런 우리도 모르는 그 종교성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성경을 절대적인 최종의 권위로 두는 것이 아니다. 내 종교성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기에 그렇다. 종교성이나 내가 생각하는 경건의 모습 등 그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위에 권위로 있을 것이 없다. 그러나 말씀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권위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민교회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최종권위를 어떤 것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정말로 그분에게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말씀이 최종권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이민교회의 종교개혁의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 관련기사 보기

- 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이전 기사)
-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현재)
- 개혁의 영향력: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 (예정)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쓰기 위해서는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뉴스 목록

Total 0건 9 페이지
뉴스 목록
기사제목 기사작성일
게시물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