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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약함의 치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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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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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 영어의 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로 인공지능을 의미합니다. 인공지능이란 기계로 만들어진 지능이라는 뜻입니다. 컴퓨터 공학에서 인공지능이란 이상적인 지능을 갖춘 존재, 혹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지능을 뜻합니다. 또한 이 용어는 그와 같은 지능을 만들 수 있는 방법론이나 실현 가능성 등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가 사람의 지능처럼 작동하는 것은 과학의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계가 사람의 지능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은 인공지능이 곧 바로 인간 지능을 능가하게 된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어떤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과학자이자 SF 작가인 베너 빈지(Vernor Vinge)는 이미 1993년에 ‘특이점(singularity)’이란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개념의 핵심은 기술의 발전이 점점 빨라져 결국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기계 지능이 탄생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특이점은  ‘무어의 법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무어의 법칙(Moore's law)은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경험적인 관찰에 바탕을 둔 법칙으로, 인텔의 공동 설립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내 놓은 이론입니다. 무어는 마이크로칩의 밀도가 2년 내지 18개월마다 2배씩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다시 말해 컴퓨터 처리속도가 일정 시기마다 배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빈지 박사는 기계 지능의 특이점이 도래할 시기를 2005년에서 2030년 사이로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의 특이점이 도래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경우입니다. 그 때가지만 해도 알파고는 인간에 의해 학습하였지만, 그 후 알파고는 자율학습으로 실력을 쌓아 세계 바둑 1위 커제를 3연승으로 격파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구글은 커제와의 바둑 대결을 통해 알파고가 직관과 창의성을 모두 갖췄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대국의 당사자인 커제가 알파고 바둑의 특징 중 하나로 창의력을 꼽으면서 앞으로 알파고를 바둑 스승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창의력은 지식을 합성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장 유력한 이유가 창의력이었는데 인공지능은 이제 창의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공지능이 극복해야 할 점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잘 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양하게 발생하는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입력된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컴퓨터는 이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DARPA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뇌를 따라 만든 시스템으로 유기체가 어떻게 학습하는지 연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가 성공할 경우 인공지능은 학습한 적 없으며 예측하지도 못한 불규칙한 상황에 직면해도 자기 나름대로의 대응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기계를 학습시켜 인공지능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였지만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만드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컴퓨터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특정 필요에 맞도록 맞춤형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여 모든 사람의 일상에 엄청난 큰 변화를 예상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아직까지 인간의 생물학적 지능의 원리를 완전하게 이해도 설명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능을 그대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아직 요원하다고 합니다.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하게 될 경우 인간이 어떻게 인공지능과 협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인간이 해결해야 할 숙제이면서 미증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은 정치와 경제와 군사 외교 분야에서 적용 또는 응용되어 과거에는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젠가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인간의 능력으로 극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후자의 경우가 인간 존재와 능력에 더 정직하게 직면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인간 능력이 한계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기독교인과 불신자가 같은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제기하려는 문제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무능과 연약함의 치명성에 대해서는 주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무능이나 연약함이란 교리적으로 구원 얻기에 무능하며, 물리적 힘에서도 보잘 것 없고, 지식도 불완전하며, 윤리 도덕적으로도 선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사실은 인간은 무엇이 자기에게 이로운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바로 인간 연약함의 치명성입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적으로 인간에게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이나 혼인과 가정의 가치에 반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줄을 사람들은 쉽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합리적 지식이나 과학을 믿는 지식인들에게 그와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식자우환이라는 옛말이 현대 지식인들에게 너무 어울리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현대 지식이란 어느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일 뿐 그 한 분야를 제외한 다른 여러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특징이 원자주의인데, 모든 것이 세분화 되고 전문화 된 원자주의가 지배적 경향을 띤 상황은 한 분야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다른 분야에 대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지식인들은 자기 분야의 지식과 원리로 다른 분야를 설명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 시스템은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있고 그 시스템 안에 온갖 원리와 이론이 각 분야에서 작동하며 융합하기도 하고 상호 모순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화학반응 같은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기 분야의 내일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지식은 내일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고 내일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야 사람은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정보와 지식의 과잉 속에서 내일에 대한 예측이 점점 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접근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생각이 정직하다면 마땅히 그와 같은 의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사려 깊지 못한 이념에 사로잡혀 사회과학이나 합리적 방법을 종교대상처럼 믿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지혜 있는 것처럼 생각하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무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무능 즉 연약함의 치명성을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빈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하지만 더 넓은 뜻으로 보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으로는 기도를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욕망을 따라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제자들도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똑똑한 학생은 모르는 것을 질문합니다. 그러나 똑똑하지 못한 학생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질문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이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 몰라서 질문할 수 없는 수준은 치명적 수준입니다. 그런 수준의 학생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문제를 풀거나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란 무엇을 모르는지 몰라서 질문하지 못하는 수준의 학생과 같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은 죄를 지어 무능하고 연약하게 된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기 위합니다. 인간이 마땅히 빌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스스로 하나님의 필요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필요를 일깨우고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령께서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을 계속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추구하고 기도해야 할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마치 죽을힘을 다해 산의 정상에 오른 다음 “이 산이 아닌가봐”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탄식하며 간구하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를 제처 놓고 독립적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친히 간구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시고 간구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언제나 성령의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고 묵상하며 노력할 때 어쩌다가 성령의 탄식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수준과 경지에 이르도록 성령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성경과 신학을 통해 세상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로 마땅히 빌 바를 알아 기도할 수 있는, 즉 자기의 진정한 필요를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새 피조물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하였습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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