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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보편 가치와 신앙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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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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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 그리스 사상은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로 수학을 매우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수학의 진리는 그 자체로서 확실하며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이 바로 수학의 위대한 미덕이라고 하여 수학에다 도덕적이고 철학적 가치까지 부여하였습니다. 어떤 세계에서든지 직선은 임의의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거리입니다. 이 원칙에서 예외인 세계란 없다는 그리스인의 믿음이 모든 영역으로 확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수학 이외의 다른 모든 사실들은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가 8,848m 이지만 그보다 1m는 더 높거나 낮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도 우연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지만, 그가 어릴 때 병에 걸려 죽었거나 사고로 죽었다면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과학적 사실 조차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설탕은 달지만 왜 신맛을 낼 수 없는지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수학의 진리만이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신조차도 모서리가 있는 원은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수학의 영역이 아닌 것을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려고 할 때 그와 같은 논리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어 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결혼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수학에 대한 이와 같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동의할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의 수학에 대한 믿음이 현대인들에게는 과학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수학 이외의 모든 사실을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처럼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 이외의 모든 것은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무엇이든지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현대 시대정신인 상대주의는 철학의 그와 같은 방법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원용하여 모든 것을 상대화 하여 ‘신조차도 모서리가 있는 원은 만들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이 나이브한 논리를 따르므로 모든 보편 가치와 심지어 신앙의 토대마저 흔들어 놓았습니다. 현대에는 보편 가치와 신앙의 토대가 몹시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보다 위험한 것이 바로 보편 가치와 신앙의 토대가 흔들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 불안을 느끼기는 하지만 현상만 보고 불안해하고 막연히 두려워합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나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현상만 보고 불안해하고 두려워 할 게 아니라 그 원인이 되는 보편 가치와 신앙의 토대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첫 문장 내용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믿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토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인데 첫 권 첫 장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을 말해 주는데, 이 토대는 수학이나 과학이나 합리성을 초월하는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않다면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러 다른 종교에도 창조설화가 있고 천지가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무에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한 것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무엇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이 신앙 고백의 전제와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하고 또한 믿고 전하고 설명하고 풀어가야 합니다. 이 신앙의 토대가 견고하면 과학이나 논리의 한계 상황에서도 갈등하거나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것은 도무지 인간 이성으로 이해도 납득도 설명도 할 수 없지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신앙고백이 참이라면 하등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믿음을 가진 우리라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 믿는 신앙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때를 대비하여 교회는 성령의 인도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수시로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토대가 흔들릴 때 사도신경의 첫 내용을 기억하여 신앙의 토대를 견고히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애굽인들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항복시키고 출애굽 하게 된 것과 기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건이 바로 전능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않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이런 사건들을 자꾸만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홍해 도하 지점을 위쪽으로 잡습니다. 왜냐하면 위쪽은 수심이 깊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얕은 시내를 건너듯이 건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나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기적이 아닌 것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홍해를 건넌 후에 온 이스라엘은 홍해 도하의 경험자들로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찬양과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이고 그 어떤 영웅이나 강한 나라도 하나님 앞에는 바람 앞에 먼지와 같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능한 하나님 경험을 시작으로 광야 생활에 접어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하나님 경험이 없었더라면 광야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어려운 광야생활 출발점에서 전능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전능한 하나님 경험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능한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의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그 경험으로 그들의 실질적인 왕이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 바로 대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앞으로 광야생활에서 겪게 될 생존의 위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처음 맞닥뜨린 문제가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길을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노정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는 길에서 이런 위기를 만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현대 교회 메시지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길게 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기에 형통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또한 훈련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특히 광야 40년은 훈련 과정입니다. 그 훈련 과정에는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이 다 들어 있습니다. 물이 없어 목마른 훈련, 음식이 없어 굶주리는 훈련, 독사의 습격을 받는 훈련, 반역자들의 선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훈련, 비협조적인 나라의 땅을 통과하는 훈련, 전쟁의 훈련 등 온갖 시련과 생존이 위협을 당하는 과정들이 전개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위기들 중 양식이 없어 굶게 되는 것과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된 위기는 가장 심각한 위기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는 한 달 이상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못하면 일주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들이 통과할 광야는 양식과 물을 조달할 여건이 못 되기에 어떻게 보면 굶주림과 목마름은 예상된 위기입니다. 전쟁의 위험은 항복하는 길이 있을 수도 있고 자연 재해도 피하여 생존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과 물이 없다는 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대체가 불가능한 아주 실제적인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상대적 빈곤이나 외로움이나 두려움이나 소외감이나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문제는 해결 방법이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고픔이나 목마름은 다른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합니다. 배고프고 목말라 죽게 된 사람에게 좋은 음악이나 따뜻한 위로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이나 목말라 죽게 된 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토대가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짜고짜로 모세에게 대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준비했던 물이 점점 모자라게 되자 아껴 마시고 나눠 마시고 그 때문에 온갖 시비가 발생하고 급기야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이 탈진해서 쓰러지기도 하고 젊은이들은 어디 물이 없을까 광야 이곳저곳을 물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물도 시내도 없고 탈진하는 이들은 늘어나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까지 굶주리고 목말라 헐떡이는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지경이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것입니다. 드디어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와 다투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세로서도 난감한 노릇입니다. 양식이나 물을 숨겨두고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말로 설득하고 진정시켜서 될 상황이 아닙니다. 백성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만 모세를 향하여 당신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이렇게 되어 혁명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혁명은 이러나저러나 다 죽게 된 상황에서 뒤집어엎어보자는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해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판사판의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정도의 위기에는 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도 나름대로 젊잖게 대처합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나와 온 가족이 죽게 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굶거나 물을 마시지 못해서 탈진해 쓰러진 상황에 처하면 저의 믿음이 어떻게 작동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낮은 단계의 시련, 이를테면 감당할만한 시련을 겪기 때문에 그런대로 믿음으로 대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도 수도 없이 넘어지고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른 차원에 서 있는 것처럼 그들의 역사를 관조하지만 사실은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보다 내부로부터 오는 위기가 더 위험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외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음식과 물이 없는 위기가 아니라 욕심 때문에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과 권력과 음행과 쾌락을 탐하고 권모와 술수와 거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억지 주장과 우격다짐 식의 세습과 음행과 돈의 유용 횡령 사기 등을 저지르는 이들의‘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참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기독교계 안의 온갖 불법과 윤리 도덕적 타락, 왜곡된 논리와 주장들은 이미 신앙의 토대가 심각하게 무너져 내린 현상들입니다. 기독교 안에, 아니 어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음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옮고 정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하나님 부재에 우는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 중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아닌 우상과 권력과 재물을 좆고 하나님을 좆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 중에 하나님이 게시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신앙의 토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 렘 8:18-19 -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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