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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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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전야 네 번째 이야기 

 

2e9ea248deff7784250578d10254e0d6_1502894881_82.jpg종교개혁은 역사의 판도를 바꾼 사건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흘러왔던 역사에서 생각하게 하는 역사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또 한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종교개혁 즉 교회 개혁은 단지 교회의 탐욕과 성직자의 타락과 무지로만 넘길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깨어나는 성도들의 자성입니다. 

 

중세 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성도들은 순진한 양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성경 독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사제들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주체적이고 신앙고백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속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은 성경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들을 성경을 가르쳤고, 회람하였으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교부들의 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405년 히에로니무스(제롬)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라틴어 불가타역입니다. 이 성경은 서방교회의 표준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로 반역된 이후에 더 이상 성경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를 알아야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라틴어는 교육 받은 이들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를 안다고 해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이 읽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물론 사제 가운데 라틴어를 모르면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니 사제의 말이 곧 성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사제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전하면 문제가 크게 줄어들겠지만 사제가 무지하거나 타락하면 성도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부패와 함께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예비합니다. 그는 성경은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입니다. 위클리프는 1378년 교황제의 대 분열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서>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권위가 최상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많은 권위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았고, 모든 권위들보다도 가장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거스틴의 증거도, 제롬도, 그 어느 성인들보다도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는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처럼 영국 사람들도 라틴어를 읽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모든 사람들이 영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교회의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영어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때가 1382년입니다. 결국 위클리프는 이 일로 인하여 죽은 지 21년 후인 1415년 콘스탄츠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1428년에는 부관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뼈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각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롤라드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자들”이라는 네델란드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들은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향은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그 가운데 존 낙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가 보헤미안 사람들 즉 체코의 얀 후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클리프의 책을 읽었던 후스는 이단자로 사형 당하였던 위클리프를 “복음적 박사”라고 언급했다는 의미로 기소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관행대로 설교문은 라틴어로 썼지만 설교는 체코어로 전파했습니다. 이는 바로 위클리프의 영향이었습니다. 결국 얀 후스는 이러한 개혁운동으로 말미암아 1415년 콘스탄츠 회의에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전야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운동이 있었으며 그 근저에는 성경번역과 함께 깨어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신동식 목사(빛과소금교회, 기윤실 정직윤리운동본부장) 

ⓒ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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