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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확인,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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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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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너는 누구냐?”는 질문은 대답하기가 아주 쉬운 질문임과 동시에 어려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밝히는 대답을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이 정체성에 대한 시비를 거는 질문이라면 그 대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뭘 하는 사람인지, 이를테면 직업과 신분을 알면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것은 존재와 신분에 대한 시비를 거는 질문입니다. 즉 언행이 신분에 맞지 않다는 전제에서 자신의 존재와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강한 메시지가 담긴 질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사람을 표류하는 배에 비유합니다. 배는 그 규모와 성능과는 상관없이 목적이 없으면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태도로 사는 것은 표류하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누군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실업자도 아니고 백수도 아닌, 신분이 분명한 사람들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인과 학자와 언론인과 평론가와 종교인과 예술인들의 말과 행동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요즘 대학교수들 중에는 정치인인지 학자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이들이 많고, 기자가 평론가 같기도 하고, 예술가나 종교인이 특정 정당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목사가 기업가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나 자신은 이런 류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대적 경향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제 자리를 찾자는 의미에서 이 질문을 제기해 보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종교인이나 철학자나 예술인이 아닙니다. 종교인이나 철학자나 예술가는 자기가 믿는바 옳은 주장을 굽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정치인은 정책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란 본래 집단을 위해 협상과 타협과 합의를 하는 사람입니다. 정치인은 그렇게 해야 하지만 학자나 신앙인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정치인이 신앙인처럼 처신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한 나라와 사회에 정치가 많다는 것은 후진성의 증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정치’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정치의 오용과 남용 때문이지 본래 인간은 정치적 존재로 창조되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으로 문제를 좁혀보겠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매 주일 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드릴까요? 교회 나가지 않고, 가족이나 개인이 예배 드리며 신앙생활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무교회주의자라고 합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뿐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맞습니다. 그들도 역시 루터나 칼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나 한국의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노평구, 류영모 등이 다 무교회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가 형식에 치우치는 것을 싫어해서 내용으로 치우치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식주의가 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형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뿐 아니라 교만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반드시 해야만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우문이지만 신앙의 본질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복 받기 위해 교회 나가고, 어떤 이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교회 나가고, 어떤 이들은 외로워서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착하고 선하게 되기 위해 나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긍정적인 삶을 배우기 위해 나가고, 이민 교회에는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서 깊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 관련성 때문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나오는 곳이 아니고,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따른 하나님의 배려요 은혜요 명령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활동하는 것은 영적 생명의 아주 구체적인 토대요 실제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부활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부활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곧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부활생명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는 표현은 교회가 부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나 일반 성도들의 생활, 즉 직장 생활이나 가정생활도 모두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활동은 부활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 아닌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부활 증언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고 업적을 쌓았다는 것도 부활 증언이라는 토대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부활을 증거 하지 못한 사람으로 살았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뜬금없는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가장 복음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상황은 초대교회 당시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을 술 취한 사람들의 이성을 잃은 주장이라고 취급하였습니다. 낮술을 마시고 취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자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광신자들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광신적이 되어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말짱한 것도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불신자들에게나 심지어 같은 신자들에게도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그렇게 비춰졌다는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지금도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신자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리고, 돈도 드리고, 음식도 해가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약의 예를 들어 낮술에 취한 게 아니고 성령에 취한 것이라고 해명하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일반 백성들이 볼 때 좀 유별나고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상한 것은 선지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이상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들과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상한 게 아니고 그들을 낮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성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바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사회법정으로 가는 일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사회 법정으로 가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경찰이 조사를 해야 되고 사회 법정에서 판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인들끼리의 교회 일로 분쟁이나 행정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 법정에 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손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은 너무나 엄청난 잘못이듯이 오늘날 교회가 성도 간의 시비가 발생하여 사회 법정에 가는 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영적 생명 현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생명을 생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고 이해합니다. 영적 생명은 의학과 생물학과 물리학으로 다 추적할 수 없는 높고 깊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의 육체는 여러 원소로 해체되고 산화하겠지만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이 산화하는 데는 산소가 산화제로 작용하는데, 아직까지 산화의 메커니즘과 대사경로에 대해서는 과학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육체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총체적으로만 설명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영적 생명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부활생명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부활을 변화라고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육체가 썩어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합니다. 음부로 떨어지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였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 변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의 토대에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의 부활 경험은 종말에 완성 될 부활생명이 자신들의 현재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은 내 안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우리가 생존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부활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증언하고 삶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이 확실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명활동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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