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8-미국 남부의 노예들 > 아멘넷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8-미국 남부의 노예들

페이지 정보

황상하2021-08-01

본문

황상하이 주제에 대한 세 번째 글에서 이미 미국 노예제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은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노예제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노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 관점이 지향하는 바를 찾아보려고 하였습니다. 본 글에서는 미국의 노예제가 역사적으로 고대 다른 나라의 노예제와 다른 측면이 있음을 살펴보고 또한 노예 해방의 역사에서 진정한 노예 해방의 차원의 조치들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들을 성경적 관점에서 지적해보려고 합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서양에서는 거의 전부 납치를 통해 노예를 수급하였습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서양 국가들도 계속 전쟁을 하였지만, 고대 세계에서 그랬듯이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서양의 노예가 고대의 노예와 다른 점은 노예 수급이 노예무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무역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이뤄졌으며 노예 상인들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배에 태웠습니다. 강제로 배에 태워진 그들은 끔찍한 환경에서 공포에 떨며 이송되어 미국 등 다양한 나라들로 보내졌습니다. 이송 환경의 끔찍함 때문에 죽는 이들이 많이 생겼고 노예 상인들은 흑인들이 병들거나 죽는 것을 상품의 손상 정도로만 생각하였습니다. 노예무역은 백인들과 아랍인들 그리고 심지어 흑인들도 개입하였습니다. 그런데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아랍인들을 더 나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노예무역을 하는 아랍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미국 백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덜 오염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슬람교도가 되거나 모슬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랍인들을 자기들과 가까운 동료라고 생각하여 덜 나쁘다고 생각하였지만, 인권 존중에 대한 아랍인들의 역할은 결코 백인들보다 자비롭지 않았습니다.

탄자니아 잔지바르의 어둡고 아픈 노예무역의 역사는 아랍 상인들이 만든 역사입니다. 잔지바르는 탄자니아 동쪽 근해에 있는 두 개의 섬 웅구자섬( Unguja Island)과 북쪽 펨바섬(Pemba Island)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구는 100만 명 정도이고 면적은 한국 서울의 2.5배 정도 규모입니다. 동아프리카 인도양 해상에 있는 이 섬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북쪽으로는 아랍권에 연결되고, 서쪽은 아프리카 흑인 지역입니다. 수에즈 운하가 뚫리기 이전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무역하기 이전에 잔지바르 섬은 페르시아인(이란인)들이 무역항을 건설했습니다. 잔지바르라는 이름도 페르시아어 잔지(Zanzi:검다)와 바르(bar:사주해안), 즉 ‘검은 해안’이라는 의미입니다. 페르시아가 쇠퇴하고, 아랍인들은 이곳을 아프리카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1107년에 이곳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습니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면서 이곳을 방문해 유럽 사회에 알려졌습니다.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이 이곳을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잔지바르가 서양인에게 넘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1698년 아라비아반도 남쪽을 지배하던 오만(Oman) 술탄국이 잔지바르를 점령해 포르투갈 세력을 내쫓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오만 술탄국의 아랍인들은 잔지바르를 노예와 상아 거래의 무역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잔지바르의 수도는 상아와 노예무역으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아랍인들은 곳곳에 요새를 지어 방어했고, 오만 술탄국은 수도를 아라비아 반도 무스카트에서 잔지바르로 옮겼습니다. 아랍인들은 잔지바르 해안에 석조도시(Stone Town)를 건설해 번영을 구가했고 이 석조도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후 술탄 가문에 분열이 생기면서 1861년 잔지바르는 아라비아반도 오만에서 떨어져 나가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독립했습니다. 독립한 후에도 술탄국은 노예 무역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한해에 잔지바르를 통해 실려 나간 노예가 4만~5만 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번 잔지바르 술탄은 탄자니아 해안과 아프리카 동부 여러 지역을 강제로 점령하여 영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이슬람 왕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을 납치하여 섬으로 끌어다가 서양의 노예상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영국의 무역상들은 아프리카에 필요한 옷, 모자, 철봉, 스튜냄비, 총, 화약, 소금 그리고 장신구 등과 같은 물자를 배에 싣고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어떤 영국 무역선 선장들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직접 거래 하는 것을 선호했으나, 18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무역선 선장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수많은 중개회사 중 한 곳을 이용하였습니다. 노예무역에는 아랍인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우가 많았고 아프리카 지도자들이나 흑인 중개인들까지 흑인 노예무역에 개입하였습니다. 잔지바르의 아랍인들은 영국이 노예제 폐지를 한 후에도 노예무역을 계속하였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흑인 노예무역을 주도한 장본인을 유럽의 백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노예무역을 주도한 이들은 아랍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잔지바르의 노예무역의 오랜 역사가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1890년 영국이 잔지바르 술탄국을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을 때 영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영향으로 잔지바르 술탄국의 노예무역을 폐지하였습니다. 흑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일을 누가 주도하고 누가 참여하였건 간에 노예무역 상인이나 실제로 노예를 부린 자들이나 인간 존재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으로 끔찍한 악을 저지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고대의 노예제도보다 더 나쁜 측면이 있습니다. 노예들이 팔려가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미국의 백인 노예 주인 중에는 하나님이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믿거나 흑인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노예제를 옹호하는 어떤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창세기 9:22을 근거로 함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9:25-27을 보면 이 저주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졌고 가나안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인 블레셋 사람들의 조상이었습니다. 노예제를 옹호하는 것은 성경이 금하는 것을 비성경적으로 합리화하는 주장일 뿐입니다.

미국 남부 노예들은 백인 주인의 집안일과 과중한 농장 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히브리 노예들처럼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일은 없었고, 당연히 자유로운 삶의 책임을 훈련받지도 못하였습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이 노예에 대한 이런 대우가 정당하다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려고 하였지만, 성경은 미국의 노예제를 명백하게 정죄합니다. 성경에서 납치는 중형에 해당합니다. 출애굽기 21:16은 “사람을 납치 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고 하였고, 신명기 24:7은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 : 7)고 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고 슬픈 사실은 많은 노예가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에도 그들의 기독교인 주인들은 노예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는 있었으나 예배가 인종별로 분리되었습니다. 미국 노예 역사에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대할 때 섬기는 지도자의 자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은 동료 이스라엘인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신약은 주인들에게 “위협하지 말라 "고 꾸짖고 있습니다. 히브리 종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보면 노예는 자유를 위해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노예 주인들은 이러한 원칙을 거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히브리 노예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나 노예제도를 유지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더 큰 원칙은 노예제도의 유지와 양립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 노예제도는 더 가혹한 인권 유린을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허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노예제에 반대하는 충분한 기초를 제공합니다.

미국의 노예제에 대한 진지한 역사적 지적과 반성은 그 범죄에 대해 적절히 처벌된 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노예제도가 끝났을 때 노예들은 이전에 노예를 소유했던 이들이나 노예무역에 관여했던 이들로부터 상당한 배상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좀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노예 소유주나 노예무역상들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사형에 해당하는 몇몇 범죄는 몸값 지불로 그 벌을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출 2130; 민 3531-32). 이 경우를 적용하면 노예 주인이 그 목숨에 해당하는 상당한 몸값을 노예에게 주는 데 동의한다면 최선이 될 것입니다.

미국 사회는 수 세기 동안 노예에 대한 범죄를 묵인 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을 때 전에 노예였던 자들은 미국 사회에 정착하거나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를 위해서 충분한 재산이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 중 어느 것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노예였던 이들은 아무 보상이나 도움도 없이 내보내졌으며 그 결과 이등 시민으로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이것은 노예 해방 이후에 벌어진 과거 노예였던 이들에 대한 2차 범죄였습니다. 노예 해방 이후 노예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되는 기업들에 대한 고소들이 있었지만 백 년이나 지난 후에 이러한 책임들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소수 집단 우대 정책 같은 것도 그 혜택의 수혜자가 도리어 주변인들이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며 바라보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보는 경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은 대규모보다는 소규모에서 더 유익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교사가 불리한 조건에 있는 학생을 선발해서 그 학생이 더 격려받고 고등 교육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따로 지도한다면 이는 장려할만한 일입니다. 소규모 기업 고용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이 소수 집단 학생들을 다른 학생들의 수준에 맞추려는 노력 없이 그들의 인종에만 근거해서 점수를 계속해서 올려 준다면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흑인들은 그런 특혜 자체가 또 다른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정부와 사회가 과거에 노예였던 이들의 후손에게 보상하려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흑인들도 자유로운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에 근거한 성공을 원하지 단순히 인종적 호의에 근거한 성공은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예제도에 이어 해방 후의 분리 정책이나 차별의 역사는 여전히 백인과 흑인 간의 경제적 차이가 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사회는 이러한 인종적인 갈등과 간극을 좁힐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족하지는 않지만, 그 간극은 좁아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국가 정책이나 사회적 인식을 통해 법적 사회적 차별을 점점 줄어가면서 자유 시장의 힘을 통해 진정한 성취를 보상받게 되도록 하는 것이 노예제에 대한 역사적 부채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흑인들과 나머지 유색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전에 없는 고용의 기회를 얻고 있으며 그 분야들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한때 흑인들에게 닥친 재앙이라고 생각되던 복지 개혁은 많은 이들에게 일터를 제공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누구나 자유 시장이 참된 자격 요건과 성취를 보상하게 하는 것과 삶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을 소유 할 수 없는 모든 인종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사회의 각 방면에서 인종차별 없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지평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포괄적인 차원에서 선포되고 적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법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참고 골 4: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 시각게시물 관리광고안내
후원안내
ⓒ 아멘넷(USAamen.net)
카톡 아이디 : usaamen
(917) 684-0562 / USAamen@gmail.com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