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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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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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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구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하였고,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식”은 학문 세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경외하다”는 주로 신앙 세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지식은 이성을 사용하여 연구를 통해 습득하는 것이고 경외는 이성을 통한 학습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마음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다분히 이원론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이성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독실한 신앙인들에게서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하였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지식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위대하심에 놀라움과 존경심을 표하는 것입니다. “경외하다”의 히브리어 דחֵפִּ(피헫)은 “두려워하다.”또는 “무서워하다.”는 뜻인데 영어에서는 to fear, to be afraid or scared로 번역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경외하다”로 번역하기도 하고 “두려워하다”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이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그분을 ‘존경하는’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존경심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념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니다. 즉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두려움은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지에 대한 이해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히브리서 12장 5-11절은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비록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히 12:6), 여전히 그 징계는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자녀들에 대한 징계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가는 구약의 성도들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나 시험 가운데 있을 때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짓지 않아야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성숙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기 위해 죄를 짓지 않기보다 벌이 두려워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뜻을 헤아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매나 꾸지람이 두려워서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영적으로 이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여호와 두려워하기(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계명과 율법을 다 배우고 이해하여 순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면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 하나님께 순종은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도무지 믿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지만 그 외에 믿는 사람답지 못한 다른 행동을 하면서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싫어하시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면 그런 일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야 합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멀리하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지방에 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길 뻔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무사하였지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하자“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도 같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켜주지 않았다면 그는 그 거짓말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은 보존하였을지 몰라도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을 것입니다. 거짓말도 나쁘지만 아내를 이방의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면서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 의도는 거짓 말 자체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몹시도 싫어하실 일입니다. 그러한 그가 거짓말 한 이유를 묻는 아비렐렉에게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말 가운데는 그 자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담보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창 12:1-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즉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것과 같습니다. 그 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떠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의 아브라함의 태도를 살펴보면 성숙한 믿음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없는 여러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인격적 성숙을 드러내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창 22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이 과거로부터 떠나야 한 것이라면,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미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군 소리 한 번 없이 바쳤습니다. 그 충격적 명령을 받고 아들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바치라고 하느냐고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왕하 4장에 보면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지극 정성으로 대접을 하여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제법 자랐을 때 아이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죽은 아이를 눕혀 놓고 갈멜산까지 달려가 엘리사에게 내가 언제 아들 낳게 해달라고 했느냐고 하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아이를 줄 때는 언제이고 이렇게 죽는 것이 웬 말이냐고 따지듯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이 보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주시고는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였는데 아무 말도 없이 순종했다고 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충격과 갈등과 몸부림을 성경이 생략하였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밤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침 일찍 아들 바치러 갑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시작하면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부르셨다고 합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단의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오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라고 했을 때 시험이 바로 사단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사단이 올무를 놓아 빠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험은 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하나의 시험은 테스트 하는 것입니다. 잘 하나 못하나 알아보려고 하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자주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고향을 떠나오는 사건부터 거의 모든 것이 시험입니다. 욥도 그런 시험을 받았고, 다윗도 시험을 받았고,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런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그를 시험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 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며 불러서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그 같은 행동을 평가하는 말을 합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이 말씀 중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독자까지도 바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힌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경외했다는 것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순종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 바로 전에 나오는 사건이 아브라함이 불레셋 왕 아비멜렉과의 사건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할 뻔 했던 일로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도로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지엄하신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내릴 심판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지만 소름이 돋도록 두려웠을 것입니다.

창 21장에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는 사건이 나오고 본문 1절이 “그 일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아비멜렉과의 사건은 모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가를 드러내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 이후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일은 시간적으로는 본문의 사건과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성경은 마치 바로 연결되는 사건처럼 기록하므로 두 사건이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언급한 “그 일 후에”란 그 두려운 하나님을 경험한 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두려워 할 존재임을 보이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시험을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은 자원하여 기쁘게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본래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나타내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왜 그리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고 또한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또한 최고의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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