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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는 소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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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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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이집트의 톨레미(프톨레마이오스)왕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유명한 기하학자인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배우고 있었는데, 왕은 기하학이 너무 어려워 유클리드 교수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기하학을 좀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겠소?”그러자 유클리드가 톨레미 왕에게 “왕이시여, 길에는 왕께서 다니시도록 만들어 놓은 왕도가 있지만,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왕도”란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 대왕에게 멸망당한 페르시아 제국이 만든 길입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있는 메소포타미아가 기원전 900년경에 기병과 전차로 무장한 아시리아인들에 의해서 점령당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가혹하게 지배하자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이 지역은 기원전 610년경에 4개의 나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525년에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형성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정치 중심지는 수사, 겨울 궁전은 베벨론, 여름 궁전은 에크바타나로 3개의 중요한 도시를 설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사(Susa)와 지중해에 접해 있는 소아시아의 사르디스(Sardes)를 잇는 약 2,700km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 길은 왕의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통 사람이 3개월 걸려서 갈 수 있는 거리를 왕의 사신은 이 길을 이용해 1주일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통신이나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3개월이 걸리는 거리를 1주일로 단축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는 “왕도”라는 말은 바로 이 수사에서 사르디스를 잇는 길을 가리킵니다. 수사는 지금의 이란에 있고 사르데스는 지금의 터키 이스탐불 남쪽에 있는 이즈미르 지역입니다. 고대에는 철학자는 물론 제국의 지배자들도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일강이 범람하면 토지의 경계가 사라져 강물이 빠지고 나면 토지의 넓이를 새로 측정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자들에게도 기하학은 중요했습니다. 플라톤은 “가장 완전한 도형은 직선과 원이며, 그래서 신은 직선과 원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 것을 보면 기하학은 철학과 정치와 종교에까지 깊은 관련을 가진 학문이었습니다.

이슬람은 알라신과 창조물과 예술 등에 대하여 기하학적 깊은 관련을 지으며 심지어 기하학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과 창조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신론뿐만 아니라 창조론은 인류에게 창조의 다면적 일관성을 탐구하고 인식하도록 하는 훌륭한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우주에는 자연발생론으로는 절대 해석이 불가능한 수많은 수학적 배열과 법칙이 현상계에 존재합니다. 창조 세계는 너무나 복잡한 행성 운동 법칙과 물리 법칙, 수학 법칙, 논리 법칙, 자연의 일관성 등이 상호 신비한 관련 가운데 작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 원리들과 법칙들의 복잡한 관계와 연관성과 결과들을 다 규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그 원리와 법칙들의 특징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하지만 그 원리와 법칙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사람들은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합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기 위해 원리와 법칙을 활용은 하지만 원리나 법칙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와 법칙들의 질서 안에서 인간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을 그 원리와 법칙들에게만 맡겨두지 않으시고 직접 다스리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기적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물리의 법칙이나 원리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원리나 법칙들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초월하여 일을 하시기도 한 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믿음은 수많은 물리적 법칙과 창조물 가운데 들어 있는 자연의 원리들을 존중하고 따르지만 그것들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원리나 법칙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의 사이에서 헷갈림과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한 때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원리와 법칙들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간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시기도 하기 때문에 믿음의 길에 “왕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사신도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였지만 왕의 명령을 전달할 때는 왕도를 이용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 왕도입니다. 왕도는 왕이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길입니다. 왕의 통치를 수행하는 이들은 그 왕도를 이용하여 일을 신속하고 수월하게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사신들입니다. 우리도 일상에서는 모든 사람들과 다름없이 자연의 법칙과 우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특수 임무를 수행할 때는 페르시아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왕의 신하처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왕도를 이용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닦아 놓으신 영적 왕도를 이용하여 선지자의 소명을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로 인하여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아내에게 누가 묻거든 그대는 나의 누이라고 하라고 거짓말을 시켰습니다. 애굽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돌려보냈습니다. 그 때 사라의 나이 70세쯤 되었는데 그 나이에 미모가 남편에게 위협이 될 만 했다는 것은 사라의 미모가 매우 특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로부터 20년 이 지난 후에 아주 유사한 실수를 또 저질렀습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이번에는 그랄 지방에서 아내를누이라고 거짓말 했고 그로 인하여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했는데 역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간섭하셔서 무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때 대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둘째는 이익을 얻으려고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 하다가 아내를 이방 왕에게 빼앗길 뻔 한 이 두 사건은 아브라함이 20년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실수한 이후 20여 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과 돌보심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인격에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본받자”라는 식의 설교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 받을 점도 많지만, 아브라함의 믿음과 훌륭한 인격의 공을 아브라함에게 돌리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역시 허물이 많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너무도 강조하여 가르칩니다.

내가 만나고 배우고 알게 된 사람들 중에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분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교만일 수도 있지만, 그분들의 가르침과 본받을 점만 본받으면 됐지 불필요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인간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자신의 발전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태도의 아쉬운 면도 없지 않지만 성경과 하나님 이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킬 줄 아는 나름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은 큰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분의 행위나 가르침은 따르되 환상은 지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더 용이하게 발견할 수 있고 견고한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칼빈이나 장기려, 박윤선 같은 분들을 존경하지만 그분들의 인격과 명성을 부풀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브라함을 통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인 것은 그의 위대한 믿음과 고상한 인격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삭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는 것도 이삭을 태어나게 하시려는 조치입니다. 이삭이 있어야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이나 열국의 아버지라는 것도 모두 이삭이 있고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는 방법이 매우 특이한 방법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의 나이가 99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가 미모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지만 불임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녀가 없었고 게다가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가 되고 사라의 나이는 90세가 될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 사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약속을 따라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초자연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초자연적으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에서 우리는 하등의 아브라함을 높일 이유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모든 일은 그가 창세기 20장에서 설명한대로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중재 역할을 감당함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마치 유치원 교사가 아이를 지도하듯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려하셨습니다.

소돔성이 멸망당할 때 중재에 나섰던 것도 무대와 역할을 아브라함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0장에서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다가 화를 당할 뻔 한 아비멜렉과 그 가문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 중재를 한 것은 아브라함의 인격의 고상함이나 너그러움이나 포용성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역할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면 그 집안 여자들의 닫혔던 태가 열려서 아이를 생산할 수 있게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면 죽을 아비멜렉과 그의 가족이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무대에서 역할을 맡은 배우처럼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여 아비멜렉의 가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지만,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게 해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격적으로 사용하셨겠지만 아브라함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해서 복을 받았는지 저주하다가 저주를 받았는지 아브라함은 그것을 일일이 다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중요한 일은 그를 통해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용서 하시는 것과 생사 문제까지 최종적인 권한은 하나님께 있지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살려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안하셔도 될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을 보게 하셨습니다. 거짓말 하다가 봉변을 당할 뻔 한 아브라함을 그렇게 사용하심은 인간은 누구도 자랑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왕도를 가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만드시는 왕도는 우리의 소명의 길입니다. 위기의 때에 각자 소명의 왕도를 찾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창 20:7, 17,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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