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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 정책들을 작동시키는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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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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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아주 먼 옛날에는 땅을 갈거나 짐을 옮길 때 순전히 사람의 힘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소나 말 같은 짐승을 이용하여 땅을 갈고 짐을 나르게 되었고 현대에는 과학문명이 발전하여 사람이나 우마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보다는 우마가 세고 우마보다는 기계가 더 셉니다. 우마차를 작동시키는 동력은 우마이고 기계나 자동차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전기나 오일입니다. 모든 노동을 사람의 힘에 의존하던 시대에는 제도와 정책을 작동시킬 에너지가 사람의 힘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는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고전적 경제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현대보다는 더욱 확고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짐승이나 기계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는 기술과 제도의 운영 방법이 성실한 노동보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과 제도와 정책들을 개발하는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과학과 산업은 더욱 빠르게 진보하고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에도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고전적 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실한 노동의 개념이 과거처럼 단순하지 않고 다원화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땅을 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등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만이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도 노동이고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도 노동입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하거나 시를 짓거나 글을 쓰는 것도 노동입니다. 이러한 지적 노동이나 정신적 노동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반드시 사전에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그림이나 노래나 시나 글과 같은 정신적 노동의 결과물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경제적 이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사람들이 좋아해야 경제적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직접적인 노동이나 기술이나 운영 방법이나 정신적 노동이나 지적 노동이나 그 외의 인간의 어떤 노력이라도 그것을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경제적, 정신적, 심리적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원시 시대나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나 모든 시스템과 정책들을 작동시키는 에너지입니다. 그 어떤 시스템이나 정책이나 고상한 목적을 지향하는 일이라도 인간의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활용하지 않고는 작동시킬 수 없습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들의 사상을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그리고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전투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청년헤겔학파와 주관주의적 제 관점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들은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인 요소들은 받아들이면서 그것의 신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하였습니다. 1845년 4월, 마르크스는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썼습니다. 그 글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의 「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이라는 책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11번째 테제가 바로 그 유명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 선언은 마르크스가 그의 공산주의 이론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언제나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제도와 사상과 철학들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적 상황에 직면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의 명쾌한 사회과학적 설명은 많은 지식인들과 대중을 매료시켰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과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환상적인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희랍적 영향으로 서구인들은 이론과 논리와 과학에 길들여져 있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에 쉽게 설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어도 19세기 초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에 이성은 종전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모든 것이 상대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 가치까지 상대화하고 나아가서는 종교적 신앙의 영역에까지 상대화의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가치와 절대 권위를 해체시킨 현대정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인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병의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비판했지만 그의 정반합 이론을 공산주의 경제이론에 응용하여 자본주의 이전은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정’이고, 자본주의는 ‘반’이며, 그 보나 나은 것이 ‘합’인 공산주의라고 하였습니다. 전제군주와 자본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데, 볼셰비키 혁명 전 러시아는 전제군주의 횡포와 경제 파탄으로 온 국민이 귀족이나 자본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던 터라 귀족이나 자본가를 비판하는 공산주의 혁명 이론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선택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과학에는 정답이 있는데, 러시아 국민들에게 공산주의는 과학적 정답 같았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매료된 이들은 공산주의 혁명이 반드시 성공하고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것을 마치 수확 공식처럼 믿었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켰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전쟁에 시달리고 온갖 복잡한 정치와 국제관계와 사상적 혼란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름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은 그렇게도 이상적인 이론과 과학적 방법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복음처럼 믿고 혁명을 했지만 그 시스템과 정책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정치 경제 시스템과 정책들을 제대로 작동시킬 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모든 활동의 동력은 인간으로부터 나옵니다.

인간 활동의 동력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 째 인간 활동의 동력은 이기적 욕망입니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거의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라는 동력에 의해서 이룩된 것입니다. 이 이기적 욕망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기적 욕망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생존을 위한 이기적 욕망이 있습니다. 이 이기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에 속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백배의 결실을 기대하고, 소나 양을 기르는 목축업자는 고기와 털과 가죽과 젖을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생업을 통해 이익을 기대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노동이든 자본이든 투자한 만큼의 이익을 기대하는 것을 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더 많이 노동하는 것과 이익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도 악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공의 이익보다 사익을 추구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그것이 사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원리이고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에너지입니다.

공산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욕망을 악하게 생각하고 통제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 시스템과 정책이 작동하게 하는 에너지원을 처음부터 틀어막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고 연료 탱크에 연료도 가득 채워두었지만 연료가 공급되는 노즐이 없으면 자동차는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에게도 욕망이 있지만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려는 욕망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하게 되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가난하게 되고 맙니다. 일하기 싫어서 일하지 않으면 이익이 창출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나누어 줄 빵이 턱없이 부족하게 됩니다. 자원이 아무리 풍부해도 일하기 싫어하면 가난하게 됩니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처럼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나라지만 지금의 정부 경제 정책은 사회주의 경제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온 국민을 일하기 싫어하는 국민으로 만들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북한이나 남미의 어느 나라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익 추구 욕망을 악하게 보고 억제하는 시스템과 정책은 동력 공급원을 차단하여 경제를 급격히 무너지게 할 것입니다. 정부가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국민은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국가가 가난하게 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결국 개인까지 가난하게 되고 맙니다.

두 번 째 인간 활동의 동력은 윤리입니다. 윤리에도 사회 윤리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윤리는 개인적입니다. 윤리란 한 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은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위하여 살 수도 있지만 집단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단은 이기주의이지만 자본주의는 생산적 이기주의이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비생산적 이기주의입니다. 집단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만 비생산적 이기주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개인은 다른 사람이나 공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사회에 이익이 되지만 집단이 개인이나 다른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공익을 해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집단이 개인이나 다른 집단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은 철저하게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집단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개인은 자신을 희생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타적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타적 개인이 많아지면 집단의 이기적 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인간 활동의 동력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 동력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안에서도 작동하는 에너지입니다. 참 기독교인의 모든 활동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에너지입니다. 감사는 자원하므로 실행하는 에너지이고 순종은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실행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지양해야 하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지향해야 하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약점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동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나라에 정치적 부정의나 경제적 실책이 많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사와 순종의 에너지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순종은 불완전한 시스템과 정책이라도 이익 창출을 극대화시키는 최고의 에너지입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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