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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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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96.♡.♡.163)2017-01-06 11:52

본문

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아주 오래전 친구 딸의 세례를 참석했다.
맨해튼에 위치한 프랑스 성당에서 세례를 한다하여
대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의 신자라 거절하였더니 증인이라도 되어 달라 하여
유럽식 가톨릭 세례를 어떻게 받는지도 궁금하여 참여 하겠다 하였고
성당에 도착하였더니 프랑스 인 신부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면서
아버지가 가슴에 안은 금발의 딸과 아버지를 위하여 서서 기도를 하기에 
같이 기도를 하였지만 나는 아버지와 딸과 신부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저들이 주님을 올바로 따르게 하여주십시오.
딸은 이제 세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삶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사 온전한 신앙인이 되게 이끌어 주십시오.’
신부는 기도를 마치고 아이에게 손에 물을 젖서 머리와 온몸에 뿌리고
주문을 하듯 세례의 교리를 알아들을 수 없이 빠르게 중얼거리듯 울프고
한 쪽 벽면으로가 옆 사진과 조각의 장식으로 이동하여 그렇게 하고
아마 20여 번을 자리를 옮기고 또 옮기고 성당 벽면을 한 바퀴 돌아
기도하고 손끝으로 물을 뿌리고, 아이는 손끝의 물이 얼굴에 닿을 때 마다 울고불고 두 시간을 그렇게 하였고, 지루하다 못해 내게는 고역스러운 세례를 마치고 세례 만찬으로 프랑스 식당에 가서 신부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은  기억이 아직 생생한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식이 격식이 되고 전통이 되어
종교화가 되어 화석(化石)되었는지, 안타깝고 슬프고 답답하다.
그러면 가톨릭만 그럴까.
아니다. 개신교도 이미 종교의식에 젖어있고
그 의식을 예수님은 외식이라 하셨고
이는 인간의 내적인 경건을, 외적인 틀에 맞춘 권위라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거룩' 이라는 의식으로 치장하면 이미 탐욕의 길에서 조직을,
신앙이 행위를 위한 욕심의 의로 변절되면, 계급적인 조직의 종교가 되고
이에 신앙심을 덧칠하면 이미 종교 조직이 되어
한 몸을 이루하는 교회는 한 몸이 아닌 조직을 위한 조직 유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를 시대의 사조로 받아 드리는 무리가 되면
종교의식의 껍데기만 남은 종교인이 된다.
생각해 보라.
현대의 종교인이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이 간절히 원하셨던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우리를 사랑했던 그 고귀한 사랑으로 새로운 변화를 바라셨던
제자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이었을까?
형제가 자매가 모인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몸을 이루는 형태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며
조직이 직분이 되어버린 모습일까?
직분이 조직이 되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고
모두 모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세상과 구별된 성도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도로 바꿀 사명이 있는데
어찌 오늘날의 교회의 조직에, 생명의 존귀함을 잃었는가?
어찌 교회 건물을 위해, 온 몸의 힘을 빼고 있는 힘마저 탈진하여 소진한
헌신(獻身)을 강요하는가?
이런 생명을 경시한 비천한 문화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
요한이 말한 생명의 부활(resurrection of life, 요한복음 5:29)로
나오는 삶을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된 믿음의 공동체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란 말인가?
누가 그렇게 존귀한 공동체의 주인 노릇을 하는가?
누가 그런 권위를 주었으며 성경 어디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일이
있었던가?
그 변절된 사도의 권위가 복음을 능력을 감소시켰고
사도의 권위가 더 권위를 더하여 권력이 될수록 부패하였던
교회사를 기억하는가?
기름을 부었다는 선별된 선민 화 된 집단은 복음을 권력의 도구로 삼았고
권력 착취의 수단으로 삼고 세상 권력자의 권력화가 되어 신분을 나누고
평민과 농민 노동자의 착취자가 되어 수탈(收奪)하고 
권력유지를 위하여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으로
고문(拷問)의 방법으로 온갖 고문 도구를 만들어 낸 세상 고문의 역사는
지난 유럽과 미국의 교회사임을 아는가?

틀에 매인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닮는 나날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그의 부활의 신앙은
그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죽기까지 사랑한 형제자매 사랑은
권능을 알지 못하면 그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
권능이 무엇인가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이 지도자라면
믿음으로 바라보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는,
믿는 자라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 이어야
하고 특히 교회의 지도자라면 더욱 그래서 어느 정도 세계역사를 배워서
믿음을 현실의 상황에 대조(對照)하여
시대(時代)의 흐름을 읽고 시대의 신앙 대안을 내놓고
신앙의 길을 제시하여야 하는데 그런 안목(眼目)을 가진 지도자를 볼 수가 없고 그런 글을 볼 수가 없다.
설교는 주장은 창세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예언을 하고
철학과 음악과 심리학과 사회상을 죄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나름, 이 시대를 흐름과 현상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 하지 못한다면
미안하지만 종교로 밥벌이 하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에게 현혹되어
눈이 먼 맹신자이거나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광신자라 종교의 노예라고
‘5.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에서 조선의 신분제도를 언급하면서
종교의 계급 화된 신분 화를 쓰고 싶었지만
차마 노예라는 말을 쓰고 분란을 일으키기 싶지 않아 피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틀고 어그러진 길로 가면
진리의 자유를 잃어 종교의 노예가 된다.
왜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분별의 눈이 없을까?
분별력을 잃었다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다는 증거이고
성령님의 인도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까닭이다.
생각해 보자.
왜 한국과 미주 교회가 하루도 거르지 못하고 온갖 추문으로
떠들썩하고 일상화 되었는지, 언론의 비난을 받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왜 그리 정직하지 못하고
서로 옳다고 서로를 비난할까?
죄의 노예가 된 종교인들...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셨을까?
어떻게 하여야 온전한 교회의 예배모습인가?
화려한 건물의 교회에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묵직한 소리와
성가대의 중세시대적인 군대 같은 복장으로
목사의 설교 제목과 내용에 맞춘 찬송가로 찬양하는
높고 낮은 목소리를 고용(雇傭)한 성가대원의 소리와
평상시 목소리도 아닌 가성의 목소리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고
이에 화답받기를 원하는 제사장처럼 복장을 따로 한 가운을 입은 목사의
빈곤한 성경의 풀이로
예화를 반복 반복하는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헌금 바구니를 이리 저리 돌리며 헌금을 거두고
눈물을 짜는 헌금 송과 피아노 반주의 가사처럼 헌신의 마음을 자아내는
희생된 마음을 원하셨을까?
헌금을 주보에 헌금별로 공포까지 하여 헌금의 금액이 믿음과 축복의 척도가 되었고 음성 좋은 사람만 모인 성가대, 그래서 은혜로운 찬송이라면
눈과 귀를 막고 싶다.
무엇이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대답일까?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몫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가슴에 그리스도를 간직한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면
그 흔적 때문에 가슴을 울려서 나오는 소리의 말, 대답은, 각자의 몫이고
그 흔적이 없어 영혼을 흔들지 못하는, 가슴의 복판을 울려 나오는 대답이
아니라면 이는 성령의 부재(不在)라
그것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도 아니다.
예배의 시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공의)를
성경을 통하여 찾는 시간이며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형제 자매된 모임이라 찬양과 감사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결단의 시간이라 자백하여 복종하려는 자복(自服)의 시간이라
우리의 영육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겠다는 결단의 행위인
진정한 삶의 산제사 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참석한 자로
낮아짐의 시간이라 주께서 높아지셔서 주를 따르는, 능력을 주신 성령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 영혼과 온몸으로 ‘서로 사랑하라’ 는 사랑의 시간이며 모임이라 이를 실천하고 밖의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삶이 진정한 산제사이고 진정한 예배이다.

그러나 어느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여
바울을 본받아 교회를 위하여 애써서 헌신하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으라 는 설교를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이 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아직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면 우리를 대속하여 고난을 받으신 ‘고난’ 이
속죄적인 고난이 남아 있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되면
완전한 복음이 아닌 우리가 남은 고난을 받아야 남은 고난이 완성된다고,
잘못 뀌어진 단추 하나로 인해 옷이 삐뚤어지듯이 잘못된 해석으로
비틀린, 어그러진 복음이 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교회의 일군임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이 헌신하고자 하는 의미로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 는 표현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 표현 했다.
베드로 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
이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며,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본을 보였듯이 주님을 따라오게 하였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벽하나,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몸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은
고난과 환난 심지어 순교도 감수해야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망으로
인내하고 믿음이 행위가 되어 보임으로서 여러 교회에 자랑이 되었고,
그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 후서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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